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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하나님이 이 땅에 호적하다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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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 땅에 호적하다 (눅 2:1-7)  

이 아침,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았지만, 지구촌은 벌써 성탄절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호주에서는 벌써 성탄절 맞이 행사들이 열렸다고 합니다. 여름철인 호주에서는 산타들이 수상스키를 탑니다. 산타들이 말 춤을 추는 것은 애교입니다. 호주의 전형적인 산타라는 모습은 익살스러움을 넘어 흉물스럽기까지 합니다. 산 티가 줄줄 납니다. 요즘 크리스마스는 산타의 계절인 모양입니다.

독일도 성탄절 준비가 한창이랍니다. 독일의 성탄절을 소개하는 뉴스는 온통 크리스마스 마켓, 물건을 파는 시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비스마르, 독일 북부에 있어, 핀란드와 스웨덴의 상인들도 이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장사를 많이 합니다. 이곳에서는 항구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산타클로스를 맞이하는 것으로 마켓을 오픈합니다. 

독일의 뉘른베르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자랑하는 도시랍니다. 크리스마스로 1년 내내 먹고 산다는 소개도 있습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독일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시장 중 하나랍니다. 매년 3백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갖가지 크리스마스 용품과 크리스털, 나무 제품들을 파는 가판대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하여 산타가 등장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자선행사는 어디에나 필요합니다. 크리스마스에 필요한 물건을 팔기 위해서 시장이 들어섰다고 해서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성탄을 축하하기 위한 용품들을 판매하기 위하여 시장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필요 때문에 시장이 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필요만 남고 이유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산타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흥겨움은 있는데, 축하 받으셔야 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돕기 위하여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았는데(요 2:14) 그것이 ‘강도의 소굴’(눅 19:46)이 된 것과 같아 보여 씁쓸합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이제, 성탄의 계절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력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어떻게 준비되었습니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맞아야 합니까? 호적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I. 호적  

호적은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하여 그 집에 속하는 사람의 본적지, 성명, 생년월일 따위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공문서입니다. 호적에는 호주가 있고 그 호주에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우리나라에서 호적법이 폐지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제 호적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가족 관계 등록부’가 호적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호적이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이름, 생년월일, 가족 관계 등등은 어디엔가 어떤 이름으로든지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 관리와 소속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호적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의 호적 이야기는 가이사 아구스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전 27년에서 주후 14년까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당시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는 아구스도,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 받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행정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이란 칭호도 받아 모든 종교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피살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신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아구스도는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호적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였습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자신의 통치를 위하여 호적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1. 황제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구스도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호적 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의 임금이신 예수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그를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가 호적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언자 미가는 유다 족속의 작은 땅, 베들레헴에서 하늘에 속한 분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필요와 목적을 위하여 호적하기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 그의 일을 하셨습니다. 잠언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황제의 명령은 지체 없이 실행되어야 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구레뇨는 주전 12년에서 주후 2년경까지 수리아를 다스렸습니다. ‘총독이 되었을 때’라는 말은 그가 총독으로 다스리던 때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총독[hJgemoneuvw/헤게모뉴오]’이라는 말은 ‘통치자가 되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흔히 어떤 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다투는 것을 ‘헤게모니 다툼’이라고 합니다. 구레뇨가 황제의 이름으로 주도적으로 자기 지역에서 일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지역은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리아의 한 지역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적은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수리아 총독에 의하여 시행되었습니다.

2. 총독의 시행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로마 시내였더라면 어쩌면 좀 폼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수리아 지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도 수리아 지역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리아 지역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런 변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에서 세계적인 일이, 아니 우주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본 총독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에게 동경이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경이 아니라 조선 총독이 다스리던 땅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조선 땅도 경성(=서울)이 아니라 시골구석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누가 주목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바로 그 곳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통하여도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은 수리아 총독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로마 황제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1)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마도 로마 황제는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적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총독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들은 행동하였습니다.

3. 백성의 실행이 있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은 일반적으로 그 땅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이 세속적인 통치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통치가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일을 통하여도 일하십니다. 

제 이름은 본래 ‘이성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갸루상도 아닙니다. 제가 사람이 아닌 것은 더욱 아닙니다.)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이승우’라고 부릅니다. 우리 집 족보에는 지금도 ‘승우’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기 위하여 중학교 3년 담임선생님이 호적초본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읍사무소에 가서 제 호적 초본을 떼려고 하니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님 성함과 형제들 이름까지 이야기하면서 ‘이승우’ 호적초본을 떼어달라는데 없다는 것입니다. 왜 없느냐고 항변을 하였더니, 들어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우리 가족 호적부를 보니 아버지와 형님들과 동생들의 이름은 있는데 제 이름을 없는 것입니다. 제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생년월일도 다른 ‘이성우’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다른 집 종이들은 누르스름한데 우리 집 호적을 기록한 종이는 비교적 하얀색이었습니다.

고등학교입학원서 마감이 다음날인지라 이성우가 누구인지도,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떼어다 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이성우’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우의 성자는 는 한자로 성스러울 성(聖)자이니 목사로 살아갈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호적을 하게 하였습니다. 총독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을 움직입니다. 백성은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르고 하는 일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우주의 섭리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세밀하게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구스도가 로마의 황제로써 호적을 명령하고, 구레뇨가 총독으로써 명령을 수행하던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II. 탄생  

그런데 모든 것이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요셉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태어난 고을이었고,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어느 지파에 속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지파와 가문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 증언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유다의 지파에서 출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1.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로마 황제가 호적 하게 하는 목적은 세금을 충실하게 걷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의 후손인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굳이 조상이 살던 곳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윗의 집’, ‘다윗의 동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라고 하였습니다. 이새의 줄기는 바로 다윗의 가문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롬 15:12)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마 9:27, 12:23, 15:22 등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다윗의 가문이라는 혈통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원자로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고생하는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호적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로마 황제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셉은 유대인으로서 전통만 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와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소개하는 마리아는 요셉의 약혼자입니다. 그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말로 속도위반을 하였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마리아에게 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0-31)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자와 관계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2.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은 1장은 마리아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수태하였음을 길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약혼한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다고만 간단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범죄 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탄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유혹한 사탄도 엄히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여자의 후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수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다만 온 몸으로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충격적이기는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웃 사람들의 눈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마리아를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호적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행여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놀라우십니다.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탄생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분으로 참으로 사람이었습니다.

3.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전혀 다른 임신이었지만 우리와 똑 같은 출산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b)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수태된 여자의 후손이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죄 없으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 드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해산할 날을 채워서 출생하신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우리와 똑같이 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첫아들로 탄생되셔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아주 나약하고 볼품없는 가장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다음 주일에 계속하여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호적 하신 참 사람이셨습니다. 이 분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로마 황제와 수리아 총독이 다스리는 역사 속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호적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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