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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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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신비 (요 1:9-18)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틀 후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거리에는 제법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성탄 절기를 돈을 버는 상업적 기회로 삼고자 애를 쓰지만, 우리 성도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계기로 삼기에 유리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 말은 ‘그리스도-마스’ 즉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예수님으로 가득찬 날’, 즉 Jesus-filled Christmas 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 14절을 중심으로 하여 성육신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 곧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신비를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교리 가운데 기독론(基督論)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14절은 간단하고 소박한 단어로 구성된 문장이지만 그 내용은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은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가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가 오심으로 우리는 어떤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1. 성육신의 본질: 말씀이 육신이 됨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the Word became flesh)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말씀(=로고스)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인간의 육신을 덧입은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육신(=사륵스)은 인간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를 구비한 완전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로고스의 인격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증거는 성경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탄생하신 장소와 시간이 분명합니다. 그는 우리처럼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마 21:18). 그는 행로(行路)에 곤하여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요 4:6). 그는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요 4:7). 그는 사랑하시던 형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무엇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의 존재는 태초 이전, 영원 전부터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말씀으로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처럼 성육신의 진리를 요한복음의 도입부에서부터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영지주의적인(gnostic) 경향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석학자 Barclay의 지적처럼, 헬라인들에게 있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지 못한 육신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매우 큰 설득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인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셨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주장은 아직 확립된 교리를 가지지 못했던 초대교회에 큰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본문과 같은 명제 형식을 통해 펼쳐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유혹에 약하고 악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입고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와 확연히 구별되는 분명한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분이 모든 일에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이처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속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하는 성육신의 진리를 확실히 믿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육신의 목적: 임마누엘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오신 목적이 우리 인간들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거하시매(에스케노센)’는 ‘천막을 세우다’ 혹은 ‘천막에 살다’를 뜻하는 동사의 부정과거형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요한이 여기서 부정과거형을 사용하여 말하고자 한 것은 로고스가 육체로 거하시는 것은 일회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 즉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머무신 기간은 분명히 짧았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33년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후로도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임마누엘’(God with us)이라 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갔을 때, 주님은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그 성막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유진(留陣)할 때는 성막은 그들 진영의 중심에 두고 세 지파씩 동서남북에 멈추었습니다. 

그 성막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신 십계명 돌비가 보관되었고, 주님은 그 성막 가운데서 사람들을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하기 위하여 그 성막에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성막은 후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자리를 잡고 왕국을 이루었을 때, 예루살렘에 고정된 성전이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일년에 세 번 이곳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던 이 성막과 성전은 때가 이르러 예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임마누엘의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을 위해 사역하시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의 놀라운 경륜을 목도합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피를 뿌려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구속(救贖)의 대업을 성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파송하셔서 교회를 시작케 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은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현시(顯示)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예배를 통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섬김을 통해,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주님의 피묻은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에서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이 교회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찍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셨고, 성육신 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교회와 함께 하시며, 자기 백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성탄의 절기에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다지고, 임마누엘의 주님과 새롭게 교통하는 계기를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육신의 축복: 하나님을 보게 됨

14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그 영광을 보니’ 라는 말은 육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다’고 한 것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우리’ 라는 복수대명사를 사용합니다. 혼자만이 아니고 많은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보니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며 또 하나님이시더라는 것입니다.

요일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요한과 제자들이 본 것은 인간 예수 안에 내재된 신적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게 하여 보내신 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인생들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서 믿게 하려는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영광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 발 아래 엎드리지 않는 이들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앞에 엎드려 ‘나의 주’(Dominus meus)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영광과 위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예수님 안에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육신의 축복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된 것에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이 세상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출 33:20).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감히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는 구약 시대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보여 주시고 우리를 향해 당신께로 오라고 부르십니다(벧후 1:3). 이 부르심은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초청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마누엘 하심의 원대한 경륜 가운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나님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창 17:7,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로부터 500년 후 하나님께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실 때도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계21:7):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부족한 자녀이고, 때로 하나님께 부끄러운 자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자녀로 받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로버트 레인즈는 그의 저서 「기쁨에 입맞추라」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의 한 친구가 얼마 전에 한 유고슬라비아 목사님의 집에서 그 목사님의 부인과 세 명의 아들과 함께 밤늦도록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잘 생기고 건강한 청년이었고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주 전도가 유망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무 살 먹은 그의 셋째 아들은 방 한구석에서 그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내 친구가 그들 부부와 정상적인 두 아들만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가족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질문했을 때 그 목사님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이를 준비시킬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진은 중앙에 자폐 장애인인 아들이 있는 채 찍혔습니다. 나는 그 아버지로부터 그 가족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 자녀도 그 사진에서 빠지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에 속하며 누구도 그 사진에서 빠져 있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추하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가족사진 중앙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찍혀 있습니다.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이처럼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바로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함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명심하여 겸허히 처신해야 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지중해 연안 케일이라는 마을에 한 성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 때 투옥됐다가 사형직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해방선언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고아와 전과자와 창녀와 가난한 어부와 병자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한밤중에 선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자루를 들고 마을을 순회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남몰래 선물을 나눠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니콜라스. 사람들은 숨은 선행의 주인공인 그를 성자로 추앙해 ‘성 니콜라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 니콜라스’가 발음이 변하면서 ‘산타클로스’로 바뀌었습니다. 

성탄 절기는 남에게 베푸는 절기입니다. 화해와 용서와 사랑을 주는 절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남을 도울 수 있는 한 구석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압니다, 남에게 베풀 때 오히려 풍성해지는 역설적 진리를….  

성탄절은 가까운 사람끼리 선물을 나누는 날 정도로 끝낼 것이 아닙니다. 이날은 불우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드리는 최고의 방법이요, 성육신의 하나님 사랑을 반포하는 최고의 찬양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탄 계절에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하신 주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 그 은혜와 진리를 풍성히 부어주시는 주님을 목청을 다하여 찬양하는 계절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절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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