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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3)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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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신앙(3) (마 25:31-46)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사상이 담겨있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씀하면서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즉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초청을 받고 기다린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기름인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주신 달란트, 그것이 시간이든지, 물질이나, 혹은 직분이나 은사, 건강이라도 중요한 것은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에 따라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고, 또한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참된 믿음은 결국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실천적인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역사적 종말에 주님 재림하심으로 있을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설명하시 내용입니다. 31절을 보시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재림하신 주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계 20:11절에 나오는 “백보좌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심판대에 앉으셔서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오늘 본문 32, 33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른 편에 양으로 표현된 사람은 영생을 얻을 성도를 가리키고, 왼편에 염소로 표현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이렇게 두 종류의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34절에 보시면 하나****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로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41절에 보시면 저주를 받은 자들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멸망 받을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무엇을 근거로 양과 염소로, 즉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른 편에 양으로 구분된 영생을 얻을 성도는 오늘 본문 35-36절에 보시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친히 주리신 적이 있었고, 목이 말라하셨고, 나그네가 되셨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구원받을 자들은 주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돌아보았고 섬겼다고 하십니다. 

그때에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 앞에 저희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37-39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말은 주님의 이름으로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심판 받을 자들, 왼편의 염소로 구분된 자들에게 책망하십니다. 42-43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때에 저주 받은 자들이 항변합니다. 44절에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리신 것을 알았다면, 주님이 목마르시고, 주님이 나그네 되시고, 주님이 헐벗으시고 주님이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알았다면 발 벗고 달려가 도와드렸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4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을 사라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종말적인 비유나 경고의 말씀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나 그물 비유는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르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의 날에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이 내려지느냐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심판의 기준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어 구원받은 자들도 어안이 벙벙하고, 왼편의 저주 받을 자들도 심판의 기준을 몰라 자기들에게 주어진 심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당황스러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비유를 보면 구원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분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구제를 강조하는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구제를 많이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정말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행함으로 영광과 생명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이 구제에 관한 말씀이라면 비록 예수를 믿지 않을지라도 구제를 많이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마치 테레사 수녀처럼 선행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행위로 구원받고, 행위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만 엡 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편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갈 2: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모두 교리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교리적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행위로 구원받느냐? 이신득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구제와 봉사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본 비유를 통하여 영생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이 어떤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새벽기도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 예배에 참석해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모습, 성경을 읽거나 찬송을 부르는 모습, 열심히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교회의 힘든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 등은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믿음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믿음이 실천적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신앙고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의 믿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아니한 믿음은 애초부터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강조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롬 1-11장에서 믿음을 강조했지만, 로마서 12-16장까지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행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무를 자르듯이 쉽게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성숙한 성도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행함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가 강조한 행함도 행함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성숙해지만 당연히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실천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약 2:24)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은 너무도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님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장 실수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여 성령 충만만 받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전도나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모습도 정말 중요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존재하는 목적,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교회들이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4:16). 이 때문에 사람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살 때 비로소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랑을 잃은 채 사는 사람은 마치 수분이 없어 시들어 가는 화초처럼 생기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어떤 화려한 일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이 한다면 그 일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감동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이 담긴 일만이 의미와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이 오실대 가지 우리가 어던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나의 신앙은 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동적인 신앙, 활동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행함에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믿음에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동적인 신앙, 마지못해 하는 피동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엔 박사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이었습니다. 그가 집필한 30여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성공과 성취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우엔 박사가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하였습니다. “나는 교수직을 포기한다. 이제 정박아 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고 하는가?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낮은 곳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유명한 말 가운데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다시 오실 주님, 영광중에 오시는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육신에 치우친 삶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그 나라와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고 다시 오실 심판의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준비된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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