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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처녀 마리아의 순종 (사 7:13-14, 눅 1:26-33,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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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마리아의 순종 (사 7:13-14, 눅 1:26-33, 38)


성탄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의례히 대두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녀 마리아의 잉태문제입니다. “처녀가 잉태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대두됩니다. 마태복음 1장18절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전하는 형태”로 동정녀 잉태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직접 천사로부터 고지 받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였지만 동거 전의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혼인 관습으로는 여자가 12세쯤 되면 1년간 약혼 기간을 보내고 일 년 후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왜 12세쯤에 정혼하는가 하면 그 나이 때가 되어야 초경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빨리 조혼시키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가 단명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평균 연령이 30대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도 결코 짧게 사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빨리 후손을 보려는 생존조건 때문에 조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상식을 가지고 이 본문을 보면 더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시골처녀 마리아에게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언제나 두 천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이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천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카엘 천사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험을 당할 때 사탄의 세력과 싸워주는 천사로 나타납니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를 찾아옵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나사렛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호화롭고 화려한 동네가 아닌 아주 초라한 마을 나사렛으로 처녀 마리아를 찾아 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나는데 하늘 아래에서 가장 초라한 동네인 나사렛에서 태어났습니다. 요 1장46절을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나사렛에서 낳은 선지자 예수를 만났다”다고 말합니다. 그때 나다나엘이 즉각적으로 나타낸 반응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동네에서 사느냐 하는 문제도 관심거리입니다. 좋은 동네에서 사는 것을 자존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강남에서 사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당시 나사렛은 그만큼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는데 너무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태어난 곳이 초라한 동네 나사렛입니다. 태어난 장소가 마구간입니다. 태어난 부모가 목수 요셉이었고 무명의 시골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70마일 떨어진 깊은 계곡 마을입니다. 그 뒤에 레바논 산이 있고 그 옆에는 눈 덮인 헐몬산이 있고 그 다른 쪽에는 갈멜산이 위치해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그곳에 갑자기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은 “은혜 받은 자여”(28) 하고 마리아에게 다가옵니다. 마리아가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놀라지 말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고지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메시야라는 말이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당시 예수라는 이름 많았습니다. “예수아” “여호수아”도 예수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할 때는 “다윗의 자손 예수”(마 27:37, 막 10:47-48 요 18:5)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부르짖을 때 모두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오시리라고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고백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장차 몸에서 태어날 예수는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왕(32-33)”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

본문은 마리아는 목수출신 요셉과 정혼한 상태라고 밝힙니다. 유대관습으로는 결혼하기 1년 전 쯤에 정혼을 합니다. 우리 풍습으로는 약혼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성경은 마리아의 처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는 동정녀였다고 강조하고 합니다. 천사의 수태고지에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34)”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모두 처녀잉태, 동정녀 잉태를 강조하는 문구들입니다. 처녀 잉태, 동정녀 잉태 이 문제는 신앙인들이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부딪치는 하나의 시험대입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신앙 입문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지난 2천년 동안 논쟁 많은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처녀 잉태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가나 요한이나 사도바울은 처녀 잉태 문제는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유독 누가와 마태만 이 동정녀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나 누가가 이 동정녀 탄생을 강조한 것도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처녀 몸을 빌려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룬 것뿐입니다. 본문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하등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잉태 강조 이유

그러면 본문이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녀 잉태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사야 7장14절에서 처음 언급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오늘 누가복음 1장 본문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신 그 틀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처녀 몸을 통해 오셨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본문에서 마리아가 처녀임을 강조한 것은 태어나신 예수는 순결하고 성결하고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동정녀 탄생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가 성결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이 강조된 것입니다.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에 오시는 과정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세상에 오셔야 합니다. 그 다른 점이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녀가 잉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하고 강조하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세상에 오시는데 특별하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의 몸에서 오신 것입니다.

강조점

그래서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35절입니다.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임하였다”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임하는데 처녀가 잉태하는 일쯤 무엇이 문제냐 하고 말씀합니다. 이 능력이 임하기만 하면 그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위에서도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처녀가 잉태하는 것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 보다 더 큰 기적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처녀 몸에서 태어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세상에 오시는 것이 처녀 몸에서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 중에는 상황에 따라 삶의 신비함도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늘 함께 있습니다. 이 초식동물들은 언제나 교미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새끼를 많이 낳습니다. 그런데 북극에 사는 곰이나 사하라 사막에 사는 곰들은 자주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만나면 교미부터 합니다. 배란기나 발정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미하면 언제든지 새기를 배고 낳습니다. 이것이 창조세계의 또 다른 신비입니다. 이것은 때로 인간의 세계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옛날 일제강점기시대 때 갑자기 징집을 당하여 군에 끌려갔습니다. 군에 끌려가면 모두 죽습니다. 젊은 아들을 둔 부모님들은 아들이 끌려가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 자손이라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네 처녀하고 갑자기 혼인을 시킵니다. 아들은 급히 하루 밤 지내고 전쟁터로 나아갑니다. 묘한 것은 그 하룻밤을 지냈는데 임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유복자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묘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생리주기가 다르고 배란기가 있습니다. 임신은 생리주기에 의해서 잉태되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해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잉태가 되는 것입니다. 요행히 생리가 맞았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환경이 위급할 때라든지 변화하는 역사의 길에서 하나님은 때로 이런 기적을 연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를 보내시는데 처녀 몸에서 잉태하게 해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 그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는데 그 앞에 장애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처녀 잉태부분을 강조하신 것은 처녀 잉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는 순결하고 성결하고 죄가 없으시며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처녀가 잉태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주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순결하기 때문에 순결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주 메시지입니다.

천사의 증언

다음 구절은 마리아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1:31)”고 말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시골에 살던 처녀 마리아가 저녁이 되어 잠을 자려고 하는데 환상이 보이더니 천사가 말합니다. “네가 아들을 잉태하리라”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가 하고 반문하였다(29)” 고 했습니다. 그 말은 너무 놀라 “무슨 이런 해괴한 일이 다 있느냐”고 물었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엘리사벳 이야기를 해 줍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36).”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와는 자매간입니다. 

그 자매는 본래 임신하지 못하던 불임 여인이었고 지금은 나이가 많은 여인입니다. 그 말은 임신이 불가능한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도 이미 임신한지가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요절이 35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말하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말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으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6).”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세상이 창조됩니다. 구원을 이룹니다. 살리심을 받습니다. 회복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죽었으나 부활의 은혜도 입습니다. 고목나무에서도 꽃이 피고 열매도 맺게 됩니다. 그런 능력이 이미 사라에게서도 나타났었습니다. 한나에게서도 나타났었습니다. 그리고 자매인 늙었고 불임여인인 엘리사벳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고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있고 종말과 심판의 능력을 지니신 능력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하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하고 응답을 했다고 했습니다. 

본문이 주는 결론은 아주 명백합니다. 본문은 3가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성결하고 순결하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오시게 되었는가 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보다 더 큰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는 마리아의 순종과 고백입니다. “나는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비록 인간일지라고 고백하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도 거부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들 것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너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을 때 순종하여 실행하였을 때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길이 열렸어도 거부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어나 걸어가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오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실로암 연못이나 요단강에 가서 순종하고 씻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 주저주저 합니다. 긴가민가하고 망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처녀 마리아의 고백과 태도와 결단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31).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이것이 신앙인의 태도이고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데는 이 마리아의 흔쾌한 결단과 순종의 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느냐 하고 묻기 전에 나는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하고 고백하고 결단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순종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고 계산하며 믿으려고 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인데 자꾸만 계산적으로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삶의 현장에는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현장에는 반드시 이런 순종과 결단이 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 일어나 걸으라,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 그때 모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진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먼저 요구되는 태도가 이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도 이 기적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도 내가 처한 곳에서도 이 기적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삶이 주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린 처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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