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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주를 찬양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눅 1:46-48)

첨부 1


주를 찬양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눅 1: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악명 높았던 헐레스코스라는 지방에는 6백만의  유태인을 비참하게 집단 학살한 인간 가마솥이 있었다합니다.  선민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유태 민족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다합니다. 이에 위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나는 원고요. 그는 피고다."라고 글을 썼다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통탄해 하며 원고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고소하였다합니다.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는지요?'라는 말들을 무수히 되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태인들이 죽어갔던 수용소를 탈환하여 수용소의 벽을 검사하다가 벽의 외진 한 구석에  희미하게 쓰여 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합니다. 거기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앙 고백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여 지는 찬송가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 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 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304장1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3절]

저주와 지옥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그들은 그 벽의 아랫면을 보고는 더욱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의 상태, 지옥의 절규 속에서 무엇보다 더욱 두렵고 안타깝게 그들을 떨게 만들었던 것은 독일의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아픔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결국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아주 오래전에 예고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소중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수백년 전에 예언으로 예고해 주셨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미 5:2-5)라고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예언 하였습니다.

메시아 예언을 전해주고 있는 이 말씀은 메시아 탄생을 예고하는 마태복음 2:6에서는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과 에브라다는 동일지명으로 ‘떡집’이라는 뜻과 ‘열매를 많이 맺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이 두 이름을 병행함으로써 이것이 스불론의 베들레헴(수 19:15)과 다른 지명임을 나타내며, 다윗의 집을 특별히 가리키기 위한 의도로 봅니다.

‘작다’는 표현을 통해 베들레헴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작다(차이르)라는 히브리어는 크기에 있어서 작은 의미보다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나타낼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새로 오신 메시아는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음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작고 천한 베들레헴 땅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품으시기 위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고 있지만 메시아의 기원을 분명하게 들려줍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케뎀)와 ‘영원’(예메올람)과 연결되면서 그분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의 이름의 위엄이며, 그분은 땅 끝까지 다스리실 것입니다.
“창대하여 땅 끝까지”라는 표현은 그의 통치의 영원성을 나타내며, 그분의 다스리심의 방법은 ‘평강’입니다.
목자와 같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며, 온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실 것입니다(시 2:8, 72:8). 그분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평강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오시며 무슨 일을 하게 될지가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눅 1:26-27)고 합니다.
  
왜 이 여인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처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당시 나사렛이 조그맣고 인기도 없는 시골이었고, 그렇게 평판도 좋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칭합니다(마4:12-15)

갈릴리는 이스라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방 땅이 아니었습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때 갈릴리 쪽으로 쳐들어왔고,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과 많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들의 피를 더럽혔다고 비판을 받으면서 이방 지역과 다름없는 지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하늘이 내린 형벌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는 유다 지방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인 나사렛으로 내려갔습니다. 나사렛은 교통의 중심지여서 로마 군대나 희랍의 상인들이 많이 지나쳐 갔던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혼합적인 경향을 많이 가졌습니다.
나다나엘이 그의 친구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도 받을 때,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선택한다면 어떤 곳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국한다고 해도 제일 큰 도시인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지위로 보나 문화 수준으로 보나 훌륭한 여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향력 있는 가문을 빌려서 오셨다면 훨씬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이 훨씬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처럼 우리 아들을 세상에 보내야 했다면 절대 그런 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땅에 내려올 때, 그 천사는 로마를 그냥 지나쳐 가고, 예루살렘도 그냥 지나갑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헤롯 궁전을 그냥 지나가고, 갈릴리 지방으로 갑니다. 가장 천대받는 지역인 나사렛으로 내려가 한 젊은 여인에게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실 때, 시골 벽촌 한 여인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유대 땅을 넘어가고, 예루살렘을 넘어가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과 다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자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 내 소유도, 내 지식도, 내 명예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처음으로 선포되던 때에 그 내용이 “은혜를 받은 자여!”(28)입니다.
성탄은 이렇게 은혜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서게 되는 것이 성탄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favor ‘카리조마이’ 카리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갓 약혼한 시골의 한 처녀였고, 그 정혼자는 요셉이라는 다윗 혈통의 청년이었습니다.
  
성탄을 이 땅에 전달하는 마리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선택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만한 자격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탄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성탄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것도 많이 있지만 정작 큰 것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거저 받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거저 주시는 수많은 은혜에 잠겨서 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은혜가 성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도 은혜,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벌떡 일어나신 것도 은혜, 내가 그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게 된 것도 은혜, 성탄의 복음을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도 은혜……. 은혜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커다란 결정체가 바로 성탄입니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밀감 밭을 경영하는 장로님께서 어느 해 제주도에는 특별한 자연재해도 없어서 귤 농사가 예년에 없는 풍년이라 귤 값이 너무 싸기도 하고, 한참 귤을 따야 하는데 일손이 딸리기도 하고 인건비도 안 나와서 그것을 미처 다 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들 교수의 동료들이 방문하자 바쁜 시간에 장로님이 친히 귤 농장으로 인도하셔서 맘껏 따서 가져가라고 하셨다합니다. 그러면서 맛있는 귤을 고르는 법도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함께 간 교수들 6명이 한참을 따는데도 한 나무도 다 못 땄다합니다. 짧은 시간에 4박스를 따 담았는데도 거의 흔적도 안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동료들은  그곳에서 천국을 이야기했다 합니다. 퍼 담아도 퍼 담아도 끝이 없는 은혜의 자리, 그리고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냥 빈손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 물론 동료 교수네 고향집이니까 주어진 것이긴 했지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었고,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지만 선물로 주시는 귤을 한 박스씩 받아오면서 거기에서 은혜를 생각했다합니다. 거저 주어지는 은혜를 말입니다.

성탄은 아들은 우리에게 몽땅 선물로 주신 은혜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눅 1:31)라고 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모두 기다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서 있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 1:36)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7)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합니다.
  
종(둘로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주의 노예이오니”라는 뜻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라고 이런 점에서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개역성경)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더 선명해지며, 하늘의 신비가 펼쳐지는 그 놀라운 사건 앞에서 엎드리는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적 유희가 아님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하심에 확인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승리라는 사실이 예언적으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성탄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이요, 예배요, 찬양이요, 선포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가 하기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 마련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보통 응답입니까? 21세기에 미혼모가 된다는 것과 1세기에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요즘에는 미혼모가 되는 것이 큰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라는 고백은 얼마나 엄청난 고백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목숨을 걸고 순종하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순종, 기쁨, 찬양, 자기 드림, 그것이 주님 오시는 길목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자세였습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자세 때문에,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님의 성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성탄이 이루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39)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눅 1:40)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41)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2)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눅 1:43)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여자 중에 가장 복 있는 여인”이라는 인사를 하며,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는 “내 주”(my Lord)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중의 세례 요한도 그의 어머니의 태중에 태동을 하며 예수님께 인사합니다. 
세상적인 조건은 뛰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유난히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던 여인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가 전하는 성탄의 복음이 담긴 말씀은 마리아나 엘리사벳은 단순히 육신의 눈만 가지고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만 열려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영의 눈이 열려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그는 눈을 들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응답은 무엇이어야 할까하는 이것은 성탄절을 사는 사람들, 하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주제입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6)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7)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8)고 고백합니다.
비천한 자를 높여 주시고,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은혜……. 그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어둠 가운데서 비추어 오는 빛을 보고 마리아는 일어섭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내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혼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중심이고 또 주체입니다. 영혼이 찬양한다는 것은 생명 전체를 바쳐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혼이 찬양한다는 것은 최대의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근거는 그녀가 메시아를 탄생할 유일한 은총을 입은 여자로 선택된 데 있고, 찬양의 주제는 그녀가 잉태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총을 입고 찬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녀의 전 생명력을 다하여, 최대의 경외심으로 그 놀라운 기적을 만드신 하나님께 찬양한 것입니다.
은총은 찬양의 샘이며 기적은 찬양의 근원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47절)다고 합니다.
이제 마리아에게는 처음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고 오직 풍성한 기쁨이 그 마음속에 넘쳤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기 가정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그 은총이 한 처녀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 내 구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어찌 기쁨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메시아의 오심은 마리아 개인만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 유대 민족의 기쁨이며 천하 만민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어느 개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기뻐해도 다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이렇게 큰 기쁨이 마리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메시아로 인한 기쁨보다 더한 기쁨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온 인류의 구원이 메시아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48절)고 합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기에게 '구주'를 잉태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데 대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사렛 한 촌에서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마리아에게 메시아를 잉태케 하는 은혜가 주어진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영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곳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심령의 샘입니다. 그녀가 비천함은 인간이기 때문이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주를 잉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누리는 최상의 영광입니다.
이제 마리아에게서 '계집종'도, '비천함'도 사라지고 오로지 '성모 마리아'만 있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영원히 마리아의 이름은 칭송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영원히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끊이지 않을 것을 뜻하고 있고 마리아의 이러한 예견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를 잉태한 사실을 확신 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주를 소우한 자의 실상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어떤 위기상황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기뻐합니다.
다윗도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가장 귀한 인생의 보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 즉 메시아의 '성육신'을 역사 속에서 시작하신 것은 모든 죄와 죽음의 두려움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긍휼의 표현입니다.
이 긍휼은 사유하시는 긍휼이며, 초청하시는 긍휼이며, 새롭게 변화시키는 긍휼입니다. 그 긍휼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긍휼이며, 멸망할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긍휼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긍휼의 최대의 걸작 품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죽음의 공포 아래 떠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구히 임하는 복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불멸의 은총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되시며 인간들은 세세토록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과 사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되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칠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소우하면 세상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기쁨이 그 영혼에 충만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를 잉태한 이유로 기뻐하며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고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주님을 내 안에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더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고 합니다.

1900년도에 중국에서 의화단이라는 사건이 있었다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받고 죽어 갔다합니다. 중국의 여기저기서 선교사님들이 죽임을 당하며 산속으로 쫓기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집으로 피신하는 고통과 박해를 경험하면서 지치다 못한 글로버라는 선교사님의 부인이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당하는 고통의 모든 한계를 지나갔습니다.' 

동굴에 숨어 있던 다른 선교사님들과 가족들은 글로버 부인의 이런 불평을 듣자 얼마나 기운이 떨어졌겠습니까? 그러나 그 옆에 게이트라는 유명한 선교사님 한 분이 있었다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글로버 부인의 불평이 끝나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주시는 줄을 믿기에 제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심으로 믿음이 있었던 이 선교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이상스럽게 선교사들을 핍박하던 순교의 행진을 그 순간 멈추게 했고 다시 중국 땅에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을 가져오게 만드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증언이 지금도 남아 있다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성탄절을 맞으며 주를 잉태함으로 기뻐하며 찬양한 마리아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고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주님을 소유하게 됨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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