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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창 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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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창 1:24-31)

근대합리주의가 발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11장까지를 신화 혹은 우화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11장은 역사적인 사실(facts)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존재했으니까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그로부터 인류가 퍼져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세기 1~11장은 역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토대(foundation)입니다. 만약 이것이 신화거나 우화라면 성경에서 믿을 내용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죄가 어떻게 해서 인류에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국가와 문화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구원은 어떻게 하나님이 계획하셨는지 모든 신앙의 토대가 되는 진리들이 창세기 1~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11장은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누구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두 이론은 서로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 이론은 진화론자들의 사상인데 어떤 작은 물질이 오랜 기간 변화를 겪어, 동물이 되고 동물이 또 오랜 기간 변화를 겪어 인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동물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어 살게 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을 동물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느냐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면에서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독일인 즉 옛날에는 야만족 취급을 받던 게르만족이 이제 좀 잘 산다고 가장 진화가 잘된 우수한 인종이라며 인종설(racial theory)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가장 진화가 덜 됐다며 600만 명이나 죽인 것 아닙니까? 

인간이 동물의 형상을 가졌다고 보니까 인간 죽이는 것을 동물 죽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정치적 사상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인간을 죽여 놓고 짐승 하나 죽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동물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지는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주는 굉장히 중요한 사상입니다. 

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만드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면 빛이 있고, 물이 한군데 모이라고 하시면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만물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 서로 의논을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의논하신 것입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이 천사들과 의논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와 의논하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사 40:13~14). 

하나님은 천사와 의논할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사 44:24). 하나님께서는 단독으로 만물을 만드셨고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위격이시고 세 위격이시며 한 분이십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며 세 분이고 세 분이며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고집하면 ‘군주신론’(Monarchianism)이라는 이단이 되고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을 고집하면 ‘삼신론’(Tritheism)이라는 이단이 됩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믿으십시오.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우리’라는 복수로 나오는데 27절에 보면 ‘자기 형상’이라는 단수로 나옵니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은 단수이며 복수이시고 복수이며 단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구약성경 많은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암시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께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그래서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줄로 믿습니다.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 30:4).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이름을 구약시대에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분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시 2:11~12).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망하지 않는다고 시편 2편에서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구약의 희미했던 것이 분명해집니다. 계시가 점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 위격 모두 창조에 관여했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창조자시라는 것은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자 예수님이 창조에 관여하셨는가? 신약성경은 성자 예수님도 창조자시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2~3).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2).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도 창조자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창조자시며 성령님도 수면에 운행하시며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신 대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대화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대화도 가능하고 의논도 가능하며 각각 사명도 다르고 그러면서 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을 지으셨을 때는 그냥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의 최정상인 인간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이 혼자 계시기 심심하셔서 인간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혼자 계셔도 심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느냐?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 목적을 부인해버린다면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겠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존재합니까? 돈 벌고 출세하려고 존재합니까? 이런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현대 심리학은 다 인간 중심적입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높이는 것이 현대 심리학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기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관으로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모형(pattern)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모형은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likeness)입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는 아주 중요한 논쟁주제였습니다. 

2세기 후반에 프랑스 리옹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어스’(Irenaeus)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영, 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삼분설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삼분설을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영과 혼은 따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레니어스’는 인간을 영, 혼, 육 이렇게 구별해서 영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혼은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자유의지가 들어가 있는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혼 즉, 하나님의 모양만 파괴되고 영 즉,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론을 옹호하기 위한 이론인 것입니다. 이것을 동방정교와 로마 가톨릭이 그대로 이어받아 지금도 자유의지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행을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도 있어서 구원에 공헌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긴 하지만 구원에 공헌하거나 기여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3). 자기 모양과 형상은 상호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셨다고 한 것은 동일한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의미를 강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잘못된 이론 세 가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이 도를 닦으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은 사단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의 모양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갖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육신의 모양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특징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육신의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고릴라나 원숭이에게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무릇 인간의 피를 흘리면 인간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음이니라” (창 9:6).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저주하나니” (약 3: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신이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과 똑같다는 이야기도 아니며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하나님과 같은 영적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특성이 무엇이냐?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세 가지 영적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과 의와 거룩함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인간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9~10). 

지식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묵상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대학입시도 있고 살아가면서 각종 시험을 봅니다. 하지만 짐승들이 공부해서 시험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짐승들이 본능은 있지만 인간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인간을 입으라” (엡 4:24). 

의롭게 사는 사람과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의 열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입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식과 의와 거룩이 있게 하시고,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어 남자와 여자가 교제하며 가정을 이루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도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인간은 교제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교회에서 성도 간에 교제도 하고 세상 사람들과도 교제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인간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인간은 만물을 다스릴 통치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19~20절을 보면 아담이 모든 육축과 새와 짐승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바로 통치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첫째, 하나님의 영적인 특성과 둘째, 교제할 수 있는 특성 그리고 셋째,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과 구원은 무슨 관계가 있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몹시 훼손되었습니다. 사람은 지식도 부패했고 의로움과 거룩함도 잃어버렸습니다.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고 사람과의 교제도 적대감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자정에 산에서 만나면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람입니다. 

요즘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서 가둬놓고 팔아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피조물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이 사람을 공격합니다. 개, 뱀, 모기까지도 사람을 뭅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여행을 가서 모기에게 물리면 말라리아에 걸려 죽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쯔쯔가무시란 병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드기에 물리게 되면 쯔쯔가무시란 병에 걸리게 되는데 처음에는 감기와 증상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고 몸에 물린 자국이 있다면 무조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봐야 합니다. 병원에 가서 약만 먹으면 하루 만에 낫는 병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피조물을 지배하는 통치권도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새로워지고 의와 거룩함을 자꾸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중에 중요한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이것이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귀의 형상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변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면 100%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때는 피조물도 인간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독사의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고 논다는 기록이 이사야에 있지 않습니까? 


결론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귀한 존재로 대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학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난해 보이는 인간도 존귀하게 대해야 됩니다. 그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을 자유롭고 존귀하게 대하시고 의와 거룩함을 이루며 지식도 새로워지도록 항상 노력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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