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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는 삶 (요 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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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삶 (요 13:1-15)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중략)…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장 1∼15절

종이 주인을 섬기고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은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이 종을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종을 섬기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라니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몸소 그것을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1. 섬기는 삶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1절로 15절에 몸소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당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시간이 점점 가까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어 나온 그날을 기념해서 유월절을 지내는데 유월절이 다가오는 그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것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발은 삶의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의 샌들처럼 생긴 신을 신고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길을 걸어 다녔기 때문에 발이 더럽습니다.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면 먼지투성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발이 먼지로 뒤덮이고 냄새가 나고 더럽습니다. 또한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발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더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행위가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불의하고 죄를 짓고 추악합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씻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했으며 이사야 59장 12절에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인간의 행위가 더러운 먼지와 티끌을 발로 더럽히는 것과 같아서 주님이 발을 씻겨 준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인간 행위의 죄악을 씻어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로 14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구약시대는 매일 같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매일같이 성전에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렸는데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시간적인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는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영원히 청산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한번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셨으니 더 이상 제물을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한번으로 완성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단지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영원히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절로 7절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길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심판을 받거나 심판을 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천당에 못 들어가게 하고 자기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새 출발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서 서로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편하고 이웃도 편하고 가정도 사회도 편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섬기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2. 예수님을 섬기는 마리아의 모습

성경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로 3절에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리셨지 않습니까? 그들의 마음에는 그 감격한 마음이 뿌리 내려 있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경배하며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에 그들 집에 와서 대접을 받을 때 마르다는 열심히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앞에 나와서 나드 한 근의 옥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옥합은 돌로 만든 옥합인데 단단하고 거기에 나드 기름을 넣어서 밀합으로 때웠기 때문에 그릇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올 수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그것은 결혼할 때 지참물입니다. 시집 갈 때 나드 기름을 얼마나 가져왔느냐에 따라 시집에서 평가를 해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결혼을 위해 준비한 300데나리온만큼의 나드 기름이 든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한 노동자가 1년 내내 일해서 받은 돈을 전혀 다른데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에 심취해서 감격해서 듣고 눈물을 흘리고 뛰어나가더니만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드 기름이 든 옥합을 가지고 나와 문지방에 ‘탁’ 때려 깨뜨리고 그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에 바르고 발에 붓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의 머리채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다 마리아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그것을 보고 굉장히 분노하며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로 8절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유대 나라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다가 향유를 붓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4장 6절에서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을 섬길 때 좋은 것은 다 감춰 놓고 쓸모없는 것을 가지고 섬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는 가장 좋은 것으로 섬겨야겠지요? 가룟 유다가 욕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한 것은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낭비에는 두 가지 낭비가 있습니다. 몹쓸 낭비가 있고 거룩한 낭비가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쓰는 것은 몹쓸 낭비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써도 좋습니다. 

주님을 위해 쓰는 것은 몹쓸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낭비요 거룩한 섬김입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갖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이러한 거룩한 낭비는 영원히 칭찬 받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3. 우리가 배워야 할 일

우리들이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의 우리의 죄와 허물을 피로 씻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준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씻겨주신 일에 대한 상징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로 9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였고 또한 시편 103편 2절은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섬겨 주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겨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차별치 말고 모두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대한 덕목은 바로 섬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섬겨 주었으니 우리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에 태도를 가지고 나가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감사가 마음을 치료하고 분노로 깨어진 마음을 바로잡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로 32절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원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움의 대상이지요. 미워하는 자를 어떻게 선대합니까? 욕하고 홀대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다 똑같고 비슷합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될 수 있는 에너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우리가 끌어안아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은 어떻게 달아졌습니까? 모세가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 넣는 순간 물이 달아진 것입니다. 우리도 가슴에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마라의 쓴물처럼 미워하는 마음이 달아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고 위로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마음이 생겨날 때 항상 보태야 할 것은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에 혁명을 가져오고 능력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감사를 고백하면 그 거룩한 능력을 통해 삶에 변화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삶을 우리 속에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하고 달리 특별하게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항상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31절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먼저 구하는 것도 이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끌어안지 않고는 그러한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힘이 생겨납니다. 십자가는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부활하신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진심을 다해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서 우리도 이웃을 섬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끌어안으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우리 몸에 직접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속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미운 생각이 사랑하는 생각으로 염려와 근심이 안식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평안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교만을 깨뜨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자존심이나 자랑을 다 버리고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기록되었고, 빌립보서 1장 20절로 21절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진심을 다해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섬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 우리도 이웃을 섬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항상 씻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눈물과 무릎의 회개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발을 씻어주십시오. 아낌없이 주님께 내어놓고 헌신하면 그 향기가 천국까지 넘쳐 흐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이웃이 기뻐하고 화목하게 됩니다. 

그러한 섬김의 삶은 오직 십자가를 끌어안아야만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섬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은 섬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온전히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십자가를 끌어안고 세상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게 들어와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집에 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다음에 남편을 바라보고 아내를 바라보고 자식을 바라보고 부모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한 힘이 샘솟듯이 생겨납니다. 모든 악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용서하는 생각, 사랑하는 생각, 도와줄 생각, 칭찬할 생각이 샘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 삶에 가장 위대한 삶이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 스스로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제나 원망스럽고 부족한 점만 반복해서 눈에 보이지만 섬기는 삶을 살면 무슨 일에도 만족합니다. 

우리가 전심을 다해 주를 섬기고 그와 더불어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축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예수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먼저 주고, 먼저 섬기고, 먼저 헤아려 주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가 더 큰 축복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시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그와 더불어 이웃을 더 열심히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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