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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아름다운 소식 (사 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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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 (사 40:9-11)


금번 대통령 선거는 역대 선거들 가운데 가장 치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네거티브 공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했고, 또한 짜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선거가 끝나고 전해지는 소식이 아름다워 다행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패배를 확인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소감을 피력했답니다. 여기서 우선 패배를 공식 인정했고, 박근혜 당선인에게는 당선을 축하했고, 나라를 잘 이끌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국민들에게는 박 당선인을 많이 성원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대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패자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를 축하하고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 승자를 성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그 후 박근혜 당선인은 문재인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축하 인사에 감사를 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협력해서 국민통합과 상생의 길을 열어가자고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처럼 반갑고 아름다운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게 해 줍니다. 우리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들으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는 아름다운 소식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바벨론이 침공해 올 것이고, 이 때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에게 나라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교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것을 예언케 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과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바로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 

이 아름다운 소식은 정리해 보면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임하셔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라가 망했지만 포로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임재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저들을 건져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저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은 또 다른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이면서도, 이차적으로는 죄 중에 절망하고 있는 온 세상 백성을 향한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셔서 저들을 구원해 내시겠다는 예언이면서도, 이차적으로는 죄 중에 고통 받고 있던 온 세상 백성에게 오셔서 저들을 구원해 내시겠다는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성탄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 1:20 이하의 내용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주의 사자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씀한 내용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 1:21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탄생할 아기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이름을 속에 우리에게 전해 질 아름다운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임마누엘의 소식

우선 본문 10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중에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셔서 우리 가운데로 보내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그 이름의 뜻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야 말로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은 우리 혼자서는 헤쳐 나가기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다니러 갔다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던 일이 있습니다. 한 한국 유학생이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에 대한 기사입니다.

이 학생은 ‘너무 힘들고 외로워 견딜 수가 없어 죽는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영어가 잘 안되기 때문에 공부가 너무 힘이 드는 데다가 재정적으로 어려우니까 수업이 끝나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몸은 지칠 데로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학생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이 어려움을 털어놓을 사람이 곁에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외로움은 가진 것이 없고, 뜻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문학가 헤밍웨이는 안타깝게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자살하면서 유서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고독하다” 큰 성공을 이루었고, 명예와 부를 남부럽지 않게 손에 쥐고 있던 헤밍웨이도 깊은 외로움에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깊은 외로움은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 누구나 겪을 수 있고, 실제로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길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의 성탄 소식은 이런 깊은 외로움에 고통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말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성탄 소식은 바로 임마누엘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아름다운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예언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주전 734년에 아하스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 아람의 르신과 북쪽 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 때 아하스 왕은 이웃나라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반대했습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하스 왕에게 전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르신과 베가 연합군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하지 말라 그리고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선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기는 태어난 뒤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그 능력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 저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살아가는 내내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소식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신 후에 우리도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 소식은 임마누엘의 소식이요,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복이 이 성탄 계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소식

다음으로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포로 중에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건져내 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고달픈 포로 생활 중에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기들을 그 딱한 처지 가운데서 건져주시겠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 1:21에는 이 아름다운 소식이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더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기에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여러 차례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막 6:34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주님의 눈에 비친 인생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자 없는 양은 정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양의 몇 가지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눈이 나쁩니다. 그래서 갈 길을 제대로 찾지를 못합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스스로 찾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가야할 길을 스스로 찾지를 못합니다. 어디가 길인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다음으로 잘 속습니다. 스스로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쉽게 미혹되고 쉽게 속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미혹되고 쉽게 속습니다.

그리고 잘 넘어집니다. 양은 몸집에 비해 다리가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민첩하게 상황에 대처하지 못합니다. 결국 잘 넘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잘 넘어집니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주저 않고, 쉽게 포기합니다. 

한 마디로 양은 목자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목자의 도움 없이는 이런 저런 문제에 시달리고 고통 받고 그러다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헝가리 부타페스트의 거리에서 늙은 걸인이 바이올린을 켜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바이올린을 켰지만 노인의 모자에는 달랑 동전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년의 한 신사가 노인의 바이올린을 받아들고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신사의 매혹적인 바이올린 선율을 감상했습니다. 얼마 안 가서 늙은 걸인의 모자에는 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잠시 후 중년의 신사는 걸인에게 바이올린을 되돌려주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중년신사는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바이올린을 켜주십니다. 우리의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주십니다. 특히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셔서 이 땅에서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십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갖가지 인생의 문제들도 풀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소식의 또 하나의 핵심입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신 후에 우리도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 소식은 예수의 소식이요,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소식인 것입니다. 이 예수의 구원의 복이 이 성탄 계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절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진 복된 절기입니다. 깊은 외로움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소식이 전해진 절기입니다. 그리고 목자 없는 양 같던 우리에게 예수의 소식이 전해진 절기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이 이 성탄절에 정말 아름다운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정말 ‘merry christmas’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번 성탄절에 예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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