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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과 요셉의 섭리주의 (창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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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요셉의 섭리주의 (창 45:8)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예수님의 모형이 된 구약의 요셉을 조명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제자들에게 신학적 설교를 하셨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모든 말씀은 나를 두고 한 것이라. 그 예언의 성취자가 바로 나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한 것이 마리아가 나를 낳은 것이고, 나사렛 사람이 될 것이라 예언했기 때문에 내가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고, 이새의 가문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 때문에 그 혈통의 가문을 빌려서 내가 세상에 온 것이며, 나귀 새끼를 탈 것이라는 스가랴 예언 때문에 내가 예루살렘에 갈 때 나귀새끼를 타며, 이사야 53장 예언 때문에 내가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나에 대해 예언되어 있는 것이 나한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기록된 대로”가 “예언된 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이미 하나님이 정해놓은 것이라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말이 있습니다. “신본주의 역사관” 다른 말로 바꾸면 16세기 존 칼뱅의 “예정론 신학”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말을 쓴다면 “섭리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섭리주의는 신약에서도 많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에 의한 나의 삶을 고백하는 신앙을 섭리주의 신학, 예정론, 신본주의 역사관이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요셉이 바로 그러한 섭리주의 신학을 발표하는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를 본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형들이 인신매매를 해서 돈 받고 노예로 넘겨주어서 소년 시절에 강제로 애굽이라는 외국 문화권으로 이민을 가서 살았습니다. 17살에 그렇게 되어 110세에 죽었다고 했으니 93년을 외국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경험상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나라에서 살던 사람이라도, 또 아무리 부자 나라로 이민을 갔다고 하여도, 어린 시절 살던 곳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장 그리운 땅입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한 분은 미국에 있을 때인데 한국에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자녀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미국으로 다시 이민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자녀들은 내가 한국 사람인지 파라과이 사람인지 미국사람인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앞으로 일평생 어디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가 생각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어린 시절에 떠났으니까 이 문화에 맞지도 않고 힘들고, 그렇다고 미국에 가서 살자니 미국은 어린 시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인데 더 힘들고 “우리는 파라과이에 가서 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여기서 사십시오.” 파라과이는 후진국입니다. 못살고 가난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험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있어서 여기서 살겠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고, 삼형제가 다 파라과이로 가서 거기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요셉은 17살에 팔려갔고 93년 동안 고국에 한 번도 못가보고 거기서 죽었으니 얼마나 고국 땅이 그리웠는지 죽으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이 땅을 떠나 우리 조상에게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면 내 무덤을 파서 두개골을 꺼내서 고국 땅에 가서 묻어주어라.” 그 한 서린 이야기를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갈 때 유언대로 그렇게 파가지고 나가서 가나안 땅에 묻었습니다. 93년 동안 그리움에 파묻혀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 집을 떠난 지 22년을 지난 후에 되어진 일을 하나 소개한 것입니다. 요셉이 소년 시절에 파란 만장한 삶을 경험했습니다. 형들의 미움 때문에 죽음의 구덩이에 3일 동안 갇혀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노예로 또 팔려갔습니다. 이때 노예 문화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돈을 주고 매입한 노예는 생명의 권한까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죽여도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득한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 노예문화에는 최근까지도 사회악으로 실행되어 왔습니다. 미국 같은 세계적인 나라도 링컨 대통령의 남북 전쟁 이전까지는 똑같았습니다. 

불과 몇 백 년 전입니다. 노예 시장에 가서 노예들을 잡아다가 팔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노예시장(Slave market)이라고 문화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있어서 제가 일부러 가서 구경한 일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다가 배에 싣고 오면 제일 먼저 닫는 항구가 미국의 남캐롤라이나 찰스톤입니다. 거기 가면 그 노예를 잡아다 팔던 시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슈퍼마켓에 가서 시장 보는 것과 똑같이 들어가면 칸막이로 되어 있고 거기 노예를 잡아다가 나이별로 나눠놓고 남녀별로 나눠 집어넣고 사람들이 시장 보러 가서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끄집어내서 계산대에 가서 돈을 내고 가지고 갔습니다. 

부부일지라도 다른 곳으로 팔려갈 수가 있습니다. 링컨이 노예제도를 폐지시켜야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 때가 그의 기록 중에 19살 때라고 나옵니다. 노예시장을 보고 그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팔려 가는데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갈 수 없어 헤어지기 싫어서 막 울면서 매달리는 그 광경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다. 사회악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남북 전쟁을 일으켜서 흑인들을 해방시켜 주었지 않습니까? 요셉은 그러한 노예가 된 것입니다. 

노예는 인권이 없기 때문에 아무 소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먼저 했다는 말을 끝까지 안했지 않습니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신변보장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보디발이 죽여 버리면 그만입니다. 형들 때문에 주어진 원한에 사무친 삶을 소년 시절부터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만든 형들이 지금 식량 좀 달라고 왔습니다. 그러면 원수를 갚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아주 많이 보아온 일인데 아무리 친형제간이라고 할지라도 두 가지 면에서는 절대 양보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다 똑같습니다. 하나는 사상적 차이입니다. 이데올로기의 극복은 도저히 형제들 간에도 안 됩니다. 여러분! 요즘에 대통령 선거 때문에 가족들 간에 서로들 싸우지 않습니까?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우리나라 사람이 되는데 그 집안 식구들은 그것 때문에 원수들 같이 싸우는 것은 이데올로기 차이 때문입니다. 3일 동안 말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인들끼리도 심방 가서 보면 은혜스럽게 예배드리고 눈물 흘리고 밥 같이 먹고 이야기하다가 대통령 뽑는 거 나오면 싸우고 끝납니다. 아버지와 아들도 싸우고 이혼 말까지 나오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 차이가 그렇게 힘듭니다. 또 하나는 돈 문제가 걸린 겁니다. 절대 양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돈 많은 재벌도 신문, TV에 형제간에 서로 돈 때문에 고소하고 난리치지 않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집사님이 저한테 기도 부탁하셨습니다. “뭐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너무 괴로운데 목사님이 기도해주십시오.” 뭐냐고 여쭤보니까 어머니를 돈 때문에 고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은 재판에서 이겨서 어머니께 10억을 받아내셨습니다. 어머니가 왜 자기 몫을 안주고 혼자 가지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런 소소한 문제가 아니고 생명에 관계되는 문제를 겪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형들이 요셉을 살인하려고 계획적 음모를 해서 구덩이에 집어넣었습니다. 또,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요셉의 형제들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들입니다. 

요셉이 그 구덩이에 빠졌던 것을 한번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3일 동안 맹수들에게 잡혀 먹혀야 될 처지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먹고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까? 피 묻은 옷 보여주면서 “짐승에게 잡혀먹었나 봅니다.” 말했습니다. 창세기 37장에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금방 판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사자, 호랑이, 치타 같은 맹수들이 모두 멸종입니다. 옛날에는 늑대도 많았는데 요즘에는 늑대도 없어졌습니다. 멧돼지 정도가 가끔 내려와서 피해를 주는 정도입니다. 맹수들이 있는 들판에서는 사람이 좋은 먹잇감입니다. 사람냄새가 얼마나 많이 풍기는지 수십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고 찾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자리에 야생의 들판에서 3일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맹수들에게 잡혀먹는 노릇입니다. 형들이 여기서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보이니까 금방 판단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찢긴 것이다.” 왜입니까? 그 사회에서는 야생의 들판에 맹수들에게 수없이 그런 피해를 당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큰일 날 뻔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막이 없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는 엄청난 사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날 온도가 화씨 111도였으니까 한국의 삼복더위보다 훨씬 더 뜨거운 날이었습니다. 그 모래벌판 위에다 담요 한 장 깔고 담요 한 장 뒤집어쓰고 “하나님! 내가 미국 땅에 왔는데 보내신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서 막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한두 시간쯤 했을 때입니다. 이상한 소리들이 들립니다. 무슨 물체들이 재빠르게 제 주변을 지나가는 게 들립니다. “샤샤삭샥!” ‘뭐야? 무섭게?’ 거기 사막에는 둥글둥글한 가시덤불이 많습니다. 

그리고 가랑잎이 아주 바짝 말라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샤샤삭” 소리가 나고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으쓱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보니까 짐승들이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오는 것도 있고 뱀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야 기도가 되는데 짐승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려고 하다가 결국 중간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했더니 “목사님이 사막을 모르셔서 그러십니다. 

사막은 살아있다는 영화도 안보셨습니까? 거기는 짐승 떼가 얼마나 사막 땅 속에 많은지 방울뱀을 비롯해서 한번만 물면 곧바로 돌아가십니다. 어쩌자고 거기서 잘 잡아먹으라고 앉아계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팜스프링에 있는 그 동네 자연박물관에 일부러 가서 봤더니 정말이었습니다. 이 사막이 엄청난 맹독들이 수없이 깔려있으니까 절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3일 동안 그런 곳에 먹잇감으로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한다면 지금 자기를 찾아온 이 살인자들을 원수로 갚아야 합니다. 

“나 죽이려고 하던 이놈들! 잘 만났다. 끌어다 죽여라.”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셉이 그 증오와 복수심에서 자기를 자유롭게 만들고 오히려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살 길을 줄 수 있었는가 말입니다. 이게 오늘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해석하는 섭리주의자, 예정론을 믿는 것이 바로 요셉의 신앙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노예로 팔았고 나는 팔려서 애굽으로 왔지만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입니다.” 형들에게 죄를 책망하지 아니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바로 섭리주의 신학적 기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기록된 대로 가겠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이 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우주적인 계획이 있으니 내가 그 길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지금 “보십시오. 형들이 나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여기 와서 애굽 바로 왕국의 주인이 되었고 애굽 온 땅의 치리자가 되었나이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니까 그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우리 사실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아팠던 사건은 다 잊어버립시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이냐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 섭리주의 신앙 고백자에게는 형들이 미움의 대상이 아니고 자신이 미움을 받은 것도 또 구덩이에 빠져서 있던 것도 노예로 팔려온 것도 보디발의 집에 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간 것도 “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위한 도우미 역할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예수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예수의 섭리주의 신학의 동질성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셉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와 변화가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가니까 그 집이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고 보디발이 너무 기뻐서 젊은 애송이 청년에게 “이 집의 모든 권한을 네게 맡기노라.” 그가 감옥에 가니까 감옥이 또 평화스러워져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아 주관하는 권한이 또 그에게 주워지고 나라를 맡기니까 국정 책임자가 되어서 온 국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부강한 국가 건설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가는 곳에는 뭐든지 잘되었습니다. 예수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모든 미신의 귀신들이 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 없어집니다. 미대한 국민과 국가가 다 문명국으로 변화를 가져오고 빈곤의 나라가 풍요 민족으로 변화되고 2천년 동안 우리 주변에 확실하게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요셉도 팔려갔고 예수도 팔려갔습니다.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30세에 메시야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헤어졌던 열한 형제를 지금 요셉이 다시 만났는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헤어졌던 열한 제자를 다시 만나고 감옥에 두 관원과 함께 있는데 십자가 위에서 두 죄수와 함께 있었고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형제들을 용서했는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만 백성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결국 요셉은 자기 온 가족을 애굽으로 영접했는데 예수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늘나라로 다 영접하였습니다. 요셉과 예수의 섭리주의 신학의 동질성이 나타납니다. 역사의 주체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에게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요셉과 같이 불행하게 구덩이에 갇혀있을 수도 있고 죽을 거 같기도 하고 노예로 팔려갈 거 같기도 하고 억울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인생이 끝났나, 가족은 언제 만날 수 있나, 캄캄한 인생으로 희망은 하나도 없을 수 있지만, 믿음이 있는 섭리주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이것도 내 인생에 필요해서 우주적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셉과 예수님의 사역의 기초 신학이었습니다. 

요즘 한반도는 정치적 상황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생깁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3일 후에 대통령을 선출하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이미 결정하셨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향하신 계획이 있어서 그 역사 진행에 그 사람이 필요해서 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국민 총화도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협력도 이루어지고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고 내 소원대로 되지 아니했다고 해서 괴로운 심정을 갖고 피차가 반목질시하면 나라가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는 뉴스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을 접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이 되었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롬니를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어려워진 미국을 위해서 같이 협력하자고 하고 롬니가 “그렇게 합시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하고 싶었던 일을 협조하겠습니다.” 그래서 평화스럽게 둘이 사이좋게 차를 마시면서 회담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역시 큰 나라요 큰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북한의 로켓 발사가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북한은 국제 관계에 매우 강력한 협상 파트너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보했습니다. 그 분야에서 세계 10대 강국이라고 한국의 모든 신문들이 인정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자존심이 좀 상했습니다. 북한은 로켓 발사로 우주 진입을 했다는데 우리는 그 떨어진 파편 조각을 찾느라고 모두 다 밤잠을 안자고 국민 우울증에 걸렸단 말입니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볼 때 경제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이 39배 차이가 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배 차이입니다. 그래서 남한은 이렇게 잘살고 북한은 그렇게 못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장거리 로켓 과학은 남한이 10년이 뒤떨어졌는데 확실해진 것은 북한은 국민들을 비참하게 만들며 로켓을 발전시켰고, 대한민국은 국민에게 혜택을 주고 발전을 시키지 아니한 결과가 되겠습니다. 

그거하나 쏘아 올리는데 1년 반의 식량이 날아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문제도 하나님의 섭리주의 신학에서 해석하고 싶습니다. 설사 북한이 그런 기술이 앞서갔다 할지라도 역사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사회국가 건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는 말도 그렇게 많고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이루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고 했으며 시편 33편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패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북한은 이번 사건으로 큰 소득이나 볼 것으로 기대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더 큰 고통이 그 나라에, 그리고 그 국민에게 닥쳐올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허사를 경험하는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우주적인 한반도를 향하신 계획 속에는 북한이 그렇게 가면서 그렇게 망해야 될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길만을 그렇게 국민을 굶주리면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넉넉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내리시려는 도우미 역할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이것이 섭리주의 신학, 즉 요셉과 같은, 예수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려고 열심히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다가 TV를 잠깐 켰더니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순서가 나오는데 무엇에 대해서 나오느냐 하면 “탈모증”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가장 예뻐서 연애해야 할 19~21세 시기에 머리가 다 빠져버렸습니다. 저의 양심선언을 한다면 그 시절에 내가 하나님을 제일 열심히 잘 믿었습니다. 자나 깨나 주님만 생각하고 밤새도록 산기도 다녔습니다. 너무 그래서 머리가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다 빠지니까 사람이 흉하게 되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빠진 것도 아니고 원형탈모증에 걸려서 빠지니 무슨 부스럼이 난거 같기도 하고 문둥병 환자가 된 거 같기도 해서 그때 저는 여학생 기피증에 걸렸습니다. 한참 예쁜 여학생들과 연애하고 데이트해야 할 나이에 사람이 그렇게 되어 버리니까 인생관이 달라지고 동네 어른들이 저를 보면 “너 이놈아! 장가는 다 같다! 젊은 놈이 그게 뭐냐?” 그래서 연애도 못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나만 보면 “어머, 어머! 쟤 좀 봐!” 다 귀신 보고 도망가는 거 같이 하니까 사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에 와서 요셉의 섭리주의 신학의 기초로 내 인생을 평가해 보면 ‘아! 그것이 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미 역할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혼났습니다. 어디 나가기도 싫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만약 그때 하나님이 내 머리카락을 그냥 두셨다면 내가 영화배우가 되었지 목사가 되었겠는가?’ 다 하나님이 아셔서 ‘이 놈은 그래도 끼가 있으니 머리카락을 빼놔야 되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요셉의 섭리주의 신학은 오늘 우리들에게 결과주의적인 승리를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브엘세바에서 돌기둥 세워놓고 야곱이 기도할 때 뭐라고 약속합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너와 약속한 모든 것이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그대로 다 되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약속받고 이렇게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 과정이 ‘과거에 모든 이루어진 역사가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론이었다. 신본주의 역사의 섭리주의다. 그래서 오늘 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훌륭한 신학의 기초입니까? 여러분!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요셉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이렇게 요셉의 신앙을 조명하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대림절을 맞게 하여 주시니 하나님의 역사가 나한테 이루어져 오늘날 우주적 하나님의 계획성에 의한 오늘의 나를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대림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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