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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샬롬의 왕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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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의 왕 (눅 2:8-14)


성경에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한 것이 많이 나타납니다. 동방박사들도 헤롯에게 와서 물었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말했고, 또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군중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시며 예수님 자신도 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왕에 대한 일반적 상식은 ‘한 나라 안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 그의 말은 절대적 힘이 있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 가장 좋은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위치,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다가 그 좋은 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또 물려줄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소유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고난스러운 삶을 사시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는가? 바로 그 차이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속에 갈등이 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 의미의 임금이 아니라 오늘 성경말씀에 “샬롬의 왕”,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를 사람들이 잘 모르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예수님 오신 결론의 목적을 표현했습니다. 오래 전에 저와 함께 사역한 부목사님이 자기는 아들을 둘 낳고 싶다고 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둘 낳으면 누가복음 2장 14절로 두 아들의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아닌 게 아니라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영광”이라는 말씀의 한 글자씩 따서 “김하영”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땅에는 평화” 그래서 “김땅평” 그런데 부동산 이름 같고 땅장사 이름 같아서 자기가 그렇게는 못 짓겠다고 해서 돌림자로 이름을 짓는 것을 봤습니다.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민족이 가장 즐겨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평화” 혹은 “평강”이란 뜻으로 이 평화와 평강은 사실 세상에서는 얻기 힘든 것으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노니” 주님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샬롬인 것입니다. “나는 그 샬롬의 왕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안정감, 흔들림이 없는 상태의 의미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분쟁이 없는 상태, 다툼의 존재가 없는 고요함, 공포감이나 두려움이 없음을 표현하는 샬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핍박이 두려워서 한 곳에 모여서 문을 잠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때 그것이 곧 “샬롬”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 “샬롬”하는 말은 언어학적으로 해석하면 “살렘”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예루”하면 “터전”이란 뜻입니다. “살렘”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터전”이란 의미입니다. 또, 풍요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풍요하여지기를! 영적으로 풍성하여지기를!” “샬롬”은 “넉넉하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났을 때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샬롬!” “복 받으세요.” 또, 완성과 성취의 의미입니다. 개인이나 민족, 교회가 다 성취되라는 뜻의 기원으로 상대방을 향해서 “샬롬”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여행하신 분들은 예루살렘이 보이기 시작하면 버스에서 안내자가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보이니 다 같이 샬롬하세요.” 그러면 따라서 다 말해야 합니다. 다 마치고 갈 때, 예루살렘이 가물가물 사라질 때 그 쪽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샬롬!” 외칩니다. “평화의 터전!” 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간의 내면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평화의 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그가 평화를 주셨는가? 평화의 왕으로서 자기 임무 수행을 무엇으로 하셨는가? 세상의 임금들은 온 백성의 섬김을 받는 자리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임금과 정반대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샬롬의 의미가 전쟁이 없는 상태인데 전쟁이 왜 일어납니까?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서 노예화함으로 자국민의 행복을 더 많게 하려는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을 해서 식민지로 만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가정도, 교회도, 공동체도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가? 누군가는 샬롬의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등이 있었는가? 예수님이 주고자 했던 것을 제자들이 안 받았고, 제자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그렇게 컸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만왕의 왕이요 샬롬의 왕이신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다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는가? 그 나라에서 제일 빈민촌입니다. 왜 말구유 간에서 탄생하셨는가? 더 낮은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낮은 자리가 있으면 그곳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과 수없이 많은 다툼이 있는 이 세상에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20세기를 살았습니다. 100년 동안 이 지구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에 가장 많은 전쟁을 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피 흘려 죽은 역사입니다. 1차 대전, 2차 대전, 우리나라에도 6․25 전쟁에서 300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얻었는가? 그래서 20세기에서 우리가 얻은 지식은 전쟁무용론입니다. 전쟁은 절대 승자가 없다는 철학을 우리가 하나 얻었습니다. 죽음과 질병과 굶주림, 폐허와 장애인, 고아, 전쟁미망인, 윤락촌, 씻지 못할 상처만 남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데올로기 무용론입니다. 

100년 이상 이데올로기 전쟁을 했지만 남은 것은 상처뿐입니다. 외우라는 것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으면서 사상의 절대화를 꾀했는데 어떤 사상이 인간의 희망이냐? 몇 년 전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 호치민에 갔더니 베트남 사람들이 옛날에 그렇게 싸웠는데도 역사 이래 가장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60년대 그렇게 많은 천문학적인 경비를 들여가면서 폭탄을 갔다 퍼부은 그 전쟁은 무슨 유익입니까? 예수님은 “인간들이 어리석어서 이렇게 평화를 해치고 있다. 나는 평화의 왕, 세상 임금들과 정반대의 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렇게 절대 권력을 자랑하던 소련도 15개 나라로 독립해 버렸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부활된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선교사들이 모스크바에 아주 많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앞으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필요한 전쟁이 하나 있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입니다. 뿌리를 살펴보면 이슬람교도들도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무슨 싸울 이유가 있습니까? 괜히 사람들이 이런 거, 저런 거 만들어서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 욕심을 부려서 싸우는 거뿐이지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나는 샬롬을 외치러 왔다.” 

요즘에 저는 아주 언짢은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이렇게 세대 갈등이 있어서 보수, 진보니 편 가르기를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이 진보이십니까, 보수이십니까? 저는 아무리 나를 평가해 보아도 내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연구나 주제에 의해서 사람들이 이런 의견도 낼 수 있고, 저런 의견도 낼 수 있는 것이지 말 한마디 했다고 진보라고 하고, 보수라고 하고 그래서 세대갈등을 부추기고 자꾸만 여러분들이 편 가르기 작정을 하니 유감입니다. 

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저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이 각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20대는 어떻고, 50대는 어떻고 자꾸만 언론이 편 가르기를 해버리니 괜히 갈등이 생긴단 말입니다. 단일민족도 단일화가 안 되니 걱정입니다. 저는 남북문제도 10년 전까지만 해도 남북의 문제는 우리들이 기도한 내용대로 잘 진행이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남북에 철도가 연결이 되었지 않습니까? 마지막 철도가 연결할 때 사진을 다 신문에 보도하고 그래서 기차 왕래가 열려졌었습니다. 또, 개성 공단이 가동되어서 북한 노동자들이 만든 제품을 남한에서 다 사용했지 않습니까?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루어져서 쉽게 왔다 갔다 했습니다. “남북 휴전선 비방선전 방송 그만하자.” 마이크를 다 중단했습니다. 해상 군사분계선 충돌방지조약이 체결되어서 “불필요한 충돌 앞으로 하지말자.” 좋다고 하였고, 이산가족상봉은 국책사업이 되어서 남북한을 눈물바다로 만드는 일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외국 수입쌀은 북한으로 보내자.” 농민들이 쌀이 넘쳐나니까 북한 보내자고 해서 그러자고 하며 모두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무너졌습니까? 우리 남한의 박왕자 씨가 금강산 관광 갔다가 북한군이 쏴 죽이는 바람에 그때부터 단절되었습니다. 전쟁시에는 비전투원은 죽이지 않도록 국제조약이 되어있습니다. 아침 산책하는 여자가 무슨 위험요소가 있다고 총살을 해서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들어버리니까 “이 사람들하고는 못하겠다.” 그때부터 단절된 것이 지금까지 된 것입니다. 

1979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씨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 세 사람이 평화 협정을 맺었을 때 카터 대통령은 “나는 어젯밤 12시가 넘도록 이사야를 읽고 왔습니다.” 베긴 수상은 “그러셨습니까? 나는 미가서를 읽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자유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렇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이 평화의 왕이다. 샬롬의 길은 이 길이다.” 어느 날 예수님이 샬롬의 길의 최종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세상 임금님 생각을 하고 있는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그리 마옵소서.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하나는 세상 임금 쪽으로 하나는 샬롬의 임금 쪽으로,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자신들의 소원이 다 무산되었다고 판단될 때 예수를 버리고 성경에 보면 “다 도망하니라.” 샬롬의 왕을 생각지 못하고 세상의 왕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세상의 임금의 자리는 누구든지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원은 “누구든지 자신과 같이 섬기는 샬롬의 왕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일본 기독교인은 매우 약합니다. 얼마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강한 힘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일주일 동안 회의를 할 때 스티브 야마구찌라는 젊은 청년이 회원이 되어서 회의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저한테 말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 4학년인데 지금 그 사람은 학기말 시험을 마지막으로 치르고 졸업을 해야 합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또 1년 후가 됩니다. “나는 이것을 안 하겠습니다.” “왜 안합니까?” “지금 우리 일본에서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재일교포들 다 새롭게 지문을 찍으시오.” 

졸업반인 야마구찌는 자기 인생에 그 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공부를 해왔는데 포기를 하고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도쿄 거리를 날마다 다니면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일본이여! 회개하라. 과거에 조선인에게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 갚을 길이 없는데 이제 또 그런 죄를 일본인이 지으려 하느냐?” 목이 터지라고 외쳤습니다. 일본 기독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아더홀더 씨는 미국계 일본 목사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등에 지고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본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마음에 한을 품고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지금도 정신대로 끌려간 할머니들이 수요 집회를 매일 하고 있나이다. 그런데 일본이 왜 또 이런 일을 합니까? 하나님이 막아주소서.” 평화의 사도, 샬롬의 가는 길을 갔습니다. 나는 희생되고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내가 샬롬의 사역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박사, 본회퍼, 마틴 루터 킹 목사, 프랜시스, 데미안 신부,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모두 자신들은 다 희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빛은 온 세상에 비추었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시던 2천 년 전 유대 나라는 암흑기 역사,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주권을 빼앗긴 그 백성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곳곳에 부대 건설을 하고 가이사랴에 총독 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령만 내리면 전 유대 땅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빌라도가 가지고 있습니다. 숨도 크게 못 쉽니다. 그런데 로마에 붙어서 왕이 된 헤롯은 또 폭군입니다. 얼마나 그가 폭군이었나 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하니까 죽이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모든 두 살 이하 남자 아기는 다 죽이라.” 그래서 어린 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폭군 밑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철저한 세금 징수를 위해서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린 상태 아닙니까? 그래서 마리아, 요셉도 베들레헴으로 호적 조사에 응하기 위해서 갔다가 예수님을 출산했지 않습니까? 경제 공황이 생겨 여리고 계곡에 끊임없는 강도가 출현했고, 살해당한 아기들의 부모들은 미친 사람들이 되어 생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마저도 예수님을 바라본 시간이 유대 나라의 임금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할 일 없는 로마인에게 이렇게 식민지가 되어 살다니 꼴도 보기 싫은 저 빌라도가 유대 나라 총독으로 정치를 하고 로마 군인들의 유니폼을 입은 행렬이 치욕으로 느껴지는 암흑의 시대에 우리의 희망이 무엇이냐?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택한 백성의 그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야여! 어서 오시옵소서.” 

세상 임금의 고난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그런 힘을 발휘하지 않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샬롬의 왕이라는, 평화의 왕이라는,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이 영적 의미를 유대 백성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임금으로 기대했던 메시야관의 차이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불러오는 하나의 동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살로메가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곧 왕이 되실 텐데 이 두 아들은 공천을 좀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예약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말을 듣자마자 한심해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히려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가는 길은 너희가 생각하는 길의 정반대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이 세상의 역사와 문화는 어떤 한 사람이 주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샬롬의 사역을 진실하게 했을 때 그 자체가 그때는 아주 작은데도 문화화되고 역사화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교도 123명이 영국을 떠날 때 오다가 몇 사람이 또 죽었습니다. 그들은 미국 땅에 와서 인디언들에게 가서 옥수수 씨를 빌려다 농사를 지어서 그 소박한 음식 재료를 갖다 놓고 추수 감사절 예배라고 초라한 통나무 교회에서 드렸습니다. 그래도 신앙의 자유와 일용할 양식이 생긴 것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먼저 드렸다는 그 의미 하나 때문에 그 몇 사람이 모여서 보이지도 않는 숲속에서 행한 일이 전 세계의 “Thanksgiving Day”라고 하는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냈지 않습니까? 샬롬의 사역이 이렇게 됩니다. 이제 산타클로스가 많이 보입니다. 

전 세계 어린아이들은 산타의 복장만 봐도 행복하고 우리도 산타클로스를 보면 아주 평화스럽고 괜히 살맛나고 흥분하게 됩니다. 지중해 연안의 케일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조그만 교회를 목회하는 감독 니콜라스가 12월이 되면 주머니 하나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해서 평소 자기 판단에 이런 거 하나조차도 누려보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아이들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몰래 그 집에 선물 하나씩 놓고 온 것이 시작입니다. 

그 물건은 값비싼 물건이 아닙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그 케일 마을의 모든 어린이들은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만 기다리고 사는 것입니다. ‘아! 내년에도 또 갖다 놓을 것이다.’ 나중에 누구라고 밝혀졌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의 니콜라스 감독님이야!” “그래? 그러면 그렇겠지.” 그래서 그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는 훌륭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성”자를 붙여주지 않습니까? “성 니콜라스” “세인트(Saint) 니콜라스” 그래서 “세인트 니콜라스”, “세인트니콜라스”하다가 이 부르는 말의 발음이 변형 음으로 발전한 것이 “산타클로스”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분 한분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모두 샬롬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뭐하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나도 나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숭고하고 거룩한 진리를 따라 샬롬의 주역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뭐합니까? 세상 임금과 같은 생각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와는 정반대의 삶을 내가 살게 됩니다. 

로마 시대에 세계 정복의 철학적 이유를 깃발로 내걸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깃발을 걸었습니다. “시저에게 굴복하라. 로마의 통치를 따르라. 그리하면 누구든, 어느 민족이든 배불리 먹고 평화롭게 살게 되리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로마의 기마병들이 나갈 때 제일 앞에 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깃발을 펄럭이면서 신나게 춤추며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깃발만 보면 사람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굴복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깃발을 기독교인들이 로마에서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깃발을 들은 것입니다. 

그 깃발을 들은 사람들은 다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결과는 “로마의 평화” 깃발을 다 내리고 굴복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지금 교황청이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 복음의 중심지를 거기로 했습니다. 이게 샬롬의 왕이 가는 길입니다. 지금은 고난스럽고 지금은 피를 흘려도 나중에 그 작은 일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힘이 있습니다. 끌려가서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우리가 본 것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우리가 조명한 거 아닙니까? 두들겨 맞고 못에 박혀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끝이 났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아침 온 세계 교회는 다 저같이 설교하고 “샬롬의 왕이여! 당신은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다 똑같이 고백합니다. 이게 샬롬의 평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성탄에 이 샬롬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나 자신에게 내려져서 내가 가는 샬롬의 길 때문에 우리의 주변이 “예루” “터전”이 되고 풍요가 약속이 되어, 풍성한 삶의 “예루” “살렘” 축복과 완성의 성취가 바로 현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는 영광이요 우리 자신에게는 행복이 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왜 예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는가? 무슨 의미인가? 세상 임금과 만왕의 왕의 차이를 몰랐던 유대인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봅니다. 결국 예수님은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샬롬의 만왕의 왕이 되어 오늘날 온 세계가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있나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우리 모두가 샬롬의 사역자로 성탄을 맞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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