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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나 홀로 집에 계신 분을 찾아 (눅 2:41-51)

첨부 1


나 홀로 집에 계신 분을 찾아

누가복음 2 : 41 - 51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는 우리를 통하여 계속 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매컬리스터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조카들을 포함한 11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여행을 떠나는 아침 늦잠을 자다 일어나 허둥지둥 공항으로 나갑니다. 겨우 비행기를 타고 안도의 숨을 쉬며 행복한 휴가를 출발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 엄마는 비행기 안에서 식구들의 머리를 세다 깜짝 놀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덟 살 소년 케빈이 없는 것입니다. 형과 싸우다 벌로 다락방에서 자고 있는 것을 북새통에 그냥 두고 온 것입니다. 케빈 역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 가족이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나 홀로 집에 남은 여덟 살 아이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여행 간 것으로 알고 집을 털려는 두 명의 도둑과 상대하여 싸우는 소동이 재미있게 전개됩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 ‘나 홀로 집에 계신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열두 살 난 아이 예수님입니다. 늦잠을 자다가 홀로 집에 남은 것이 아닙니다. 뜻이 계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2012년을 보내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좋은 습관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되면 위험합니다. 관례는 따라야 할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관례는 조심해야 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I. 관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신16:16)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일 년에 세 차례 순례를 가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사는 사람도 유월절에 한번만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41절과 42절 말씀입니다.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신실한 마리아와 요셉 역시 유월절은 맞으면 갈릴리에서 며칠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일은 그들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던 해도 관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관례[e[qo"/에도스]는 ‘익숙한 것’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관습이나 법에 의해 정해진 ‘습관’입니다. 

1. 그들은 관례를 따랐습니다.

무엇인가를 익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더욱이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바람직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한 두 번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따라서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감동과 감격을 잃어버린 신앙은 율법적이거나 외식적일 수 있습니다.  

관례를 따라서 하는 일에는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바로 그 해 유월절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그 부모가 갈릴리로 돌아올 때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그 부모가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의 순례 여행은 주로 떼를 지어 여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노상강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나 요단광야를 지나야 했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여행에는 온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이 떼를 지어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는 동안에 남자들의 일부가 앞장서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중간에 서고, 뒤에 남자들이 따르는 행렬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숙박 장소에서 잠을 잘 때까지 가족들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44절 전반 절 말씀입니다.

:44a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하룻길 즉 아침에 출발하여 온 종일을 걷고 저녁때가 되어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려다가 식구 중에 하나가 없다는 것을 마침내 발견한 것입니다. 친족과 아는 자 중에 있으려니 하고 찾아보았으나 그 일행 중에는 없었습니다. 어딘가 있으려니 하였지만 사실은 아이를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3. 그들은 있으려니 하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대전 시내를 쏘다니다가 때가 되어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서로 격의 없는 친구들인지라 누가 돈을 내겠다는 사람도 없는데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자장면을 시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후가 문제였습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버스 값까지 톡톡 털어도 음식 값이 모자랐습니다. 누군가 돈을 가지고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식사하였지만, 사실 아무도 돈이 없었습니다. 서로 당황하여 얼굴만 쳐다보다가 다음에 갖다 주기로 하고 제 시계를 벗어 맡기고 음식점을 나왔습니다.

음식점에서 일이라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맡길 시계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챙겨야 할 아이가 없어졌는데 있으려니 하고 있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욱이 믿음이 있으려니 하였는데 천국 문 앞에서 자신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이 세상에서의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고 나니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에 품에 안겼는데 자신은 음부에서 고생을 하였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 잘못 살았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늘 예수님과 함께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였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거니 하면서 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고 말은 하지만 그 분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질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를 살아오면서 너무 바쁘고 분주하여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예배당에 나오면 예수님이 계시고 세상에 나가면 계시지 않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행여 우리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이제 여기에 서서 자신의 길을 뒤돌아봅시다. 과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길이었는지를 돌아봅시다.

진짜 문제는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문제를 깨닫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II. 자각  

그들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를 비로소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44절 후반 절입니다.
:44b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예수님의 부모는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어린 예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로소 그들이 돌보아야 할 어린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1. 그들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암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건강검진을 받지 않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어떤 분은 암을 발견하고 고생하며 사느니 차라니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앉아서 병을 키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진단도 빨리 하면 빨리 치료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호 14:1).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게시지 않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계셔야 할 그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간 후에 ‘아이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가던 길을 되돌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하루 동안을 걸어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잃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아이를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를 추적하여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떠나기 전에 보았고 여행 중에는 전혀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채 하룻길을 간 후에 되찾기 위하여 다시 길을 돌아갔습니다. 

2. 그들은 되돌아가며 찾았습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서는 것은 용기입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되찾아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아서야 합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면 즉시 다시 돌아가서 찾아와야 합니다. 잘못하였으면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되돌아 섬, 회개는 한 해를 보내며 우리가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룻길을 갔다가 하룻길을 되돌아와 언제 만났습니까?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들은 꼬박 사흘을 예수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다시 올라오기는 하였지만 예루살렘에서 잃은 아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틀을 보내야 했습니다. 계신 곳으로 곧장 왔다면 금방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몰랐습니다.

3. 그들은 다른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에 되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아이를 잃어 버렸다고 신고할 경찰서도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알아볼 전화도 없었습니다. 확인할 컴퓨터도 없었습니다. 함께 찾아다닐 경찰관도 없었습니다. 자동차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늘 예배하려 올라오는 사람들로 복잡한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유월절 명절 끝이라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다만 있을 법한 곳을 두 발로 걸어서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을 잡는 곳에 계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양 잡는데 갔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좋아하니 마술놀이를 하는 곳에 가서 찾았을 것입니다. 혹시 실족하여 위험한 곳에 떨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위험한 벼랑 밑을 뒤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틀을 헤매었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곳에서 찾았습니다. 우물에 가서 숭늉을 구하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말씀을 듣게 됩니다. 회복의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III. 회복  

그들은 결국 헤매고 헤매다가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46절 말씀입니다.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예수님은 성전에 계셨습니다. 성전에서 유대인의 율법 선생들과 함께 앉아서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들에게서 들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분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린 예수님은 율법에 통달한 지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처음부터 성전으로 올라갔어야 했습니다.

1. 성전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것이라고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고생을 덜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찾느라고 헤매고 다녔습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지난 일 년을 지나면서 성경 말씀을 얼마나 읽으셨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점점 무기력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믿었던 신앙으로 겨우 버티는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말씀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새 해에는 다시 말씀을 읽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전에 올라간 그들은 어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예수님에게서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49절 말씀입니다.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자신을 찾아서 가던 길을 돌아와 사흘이나 찾아 온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어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시면, 그를 찾아 헤맨 마리아와 요셉은 누구냐는 말입니까? 이렇게 매정하고 냉정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이해 못할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습니다.

50절 말씀입니다.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생각은 유대인들의 보편적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사실을 마리아나 요셉이 아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없이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은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성전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자신의 온 몸으로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기도하였습니까? 기도를 영혼의 홉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호흡을 잘하셨습니까?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기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닙니까! 다시 기도하기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순간마다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만 하면 금방 예수님처럼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까?

51절 말씀입니다.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듯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예수님은 힘겹게 찾아온 부모에게 자신이 성전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내셨습니다. 약 20년이나 되는 시간을 그렇게 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자라야 하셨습니다. 

3. 성장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을 배워 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난 한 해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성장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이런 저런 일로 기도하면서 그만큼은 자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꼭 닮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계속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12년이라는 또 한 해를 분주하게 살아왔습니다.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달려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 혼자서 달려오느라고 애쓰고 힘들었다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맡기는 연습을 더욱 많이 합시다. 잃어버리고 산 것이 하루라면 다시 찾는 데는 사흘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있는 감격을 잃고 있었다면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2013년도에는 더욱 성전을 가까이 하는 생활 즉 예배와 기도에 힘쓰며, 우리의 삶을 구별하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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