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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어두워가고 (눅 24: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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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어두워가고 (눅 24:13-52)

프랑스 산골마을 부가리슈에 전 세계에서 꽤 많은 취재진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2012년 12월 21일이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마야인들 가운데 전해오는 지구 종말의 날에 그 마을만이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천진난만한 마야인들의 예언을 비웃듯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종말이나 우주적인 종말이 피부적으로 감지되는 사실 앞에 아니라고 할 자는 드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필연적으로 임할 종말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는 좌절과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생전에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과 교훈마저도 그들 마음속 깊숙이에서부터 영향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동네로 길을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슬픔과 낙심으로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석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과 같이 가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신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24:16).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24:17). 
그리고 그 중에 글로바라는 자가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된 일도 모르느냐고 반문했습니다(24:18).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은 일로 인하여 몹시 허탈해 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졌다는 성경의 표현을 한날의 우주의 질서가 가져오는 여자적인 의미를 구태여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분명히 영적으로 당시의 어두움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종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24:29).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에게는 실망과 공포와 허무의 포로가 아니라 찬란한 광명의 새 날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졌지만 소망의 밝은 새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와 함께 찾아온 것입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도" 

Ⅰ.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있습니다. 

1)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셨습니다.
본문 24장 15절에 『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1절에 『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에 『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7절에 『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1절에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에 『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2) 예수께서 동행하십니다.
본문 24장 15절에 『 …저희와 동행하시나 』라고 했습니다.

3) 예수께서 곁에 계십니다.
사도행전 27장 23절에 『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 『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도"

Ⅱ. 성경을 풀어 마음을 뜨겁게 해주십니다. 

본문 24장 32절에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향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을 향하여서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근일에 된 일을 모르느냐고 오히려 실망적인 어투로 반문했습니다. 

저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라고 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다고 했습니다(24:19). 그들은 나사렛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24:21).
그리고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았다고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했습니다(24:23). 
또 자기들 중에 두어 사람이 예수의 무덤에 가보았으나 예수를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24:24). 이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은 책망 섞인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4장 25-26절에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의 글(모세가 받은 오경)과 선지자의 글(구약의 선지자들이 받은 말씀), 모든 성경(그 외의 지혜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24:27). 
이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24:32). "뜨겁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불타는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본래의 뜻을 해석할 때 성령이 역사(work)하십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 이들의 마음은 뜨거운 용광로처럼 타올랐을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이 합니다. 이 말은 구약의 해석은 신약이 하고 신약의 해석은 구약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마지막의 일은 계시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신약을 내다볼 수 없으면 성경해석은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신약이 구약을 기초하지 아니하면 성경해석을 가능케 하지 못합니다. 
구약의 언약이 신약에서 성취되고 신약의 성취가 구약의 예언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약에 따르는 그 언약의 성취를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7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9-40절에 『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곧 구속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역사도 동일하게 구속사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목전에 둔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역사를 광야교회라고 한 말을 주목해야합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 『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고 했습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도"


Ⅲ. 눈을 밝혀 주십니다.

본문 24장 30-31절에 『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 알아보더니 』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완전히 알아서 인식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떡을 떼시는 그 모양은 그의 생전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때 그가 예수신줄 알게 되었습니다(24:35).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빨리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영안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떡을 떼실 때 영안을 열어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제자들은 떡 떼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신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제자들에게는 어두움과 절망의 세상이 이미 아니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의 세상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을 보는 광명이었습니다. 
본문 24장 44-45절에 『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귀와 눈과 마음 어느 쪽이 먼저 열려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먼저 눈이 열려야 성경을 보게 되고 마음이 열려야 성경을 깨닫게 되고 귀가 열려야 성경을 듣게 됩니다. 

기독교가 계시종교인 것을 감안하면 귀가 먼저 열려야 합니다. 듣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5절에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눈과 마음과 귀는 어느 것이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8절에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눈이 열려야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눅 24:31).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실 때 샘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1장 19절에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여시니 손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2장 31절에 『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는 다윗을 괘씸히 여기셨습니다(대상 21:7). 하나님이 이 일로 이스라엘을 칠 때 온역으로 죽은 자가 칠만이나 되었습니다(대상 21:14).
이 때 다윗이 눈을 들어 진노하시는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입니다. 
역대상 21장 16절에 『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라고 했습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도" 


Ⅳ.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십 니다.

본문 24장 33-34절에 『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나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 『 그 시로 』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지체 할 수 없는 동시적인 시간이란 말입니다.
마침내 부활의 생명은 실망에 찬 제자들을 식탁에서 일으켜 세워 예루살렘으로 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풀어주는 말씀 운동의 저력입니다. 복음전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습니다(24:47)

1) 그곳에는 예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 24장 50절에 『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2) 그곳에는 축복 받은 자들의 찬송이 있습니다.
본문 24장 53절에 『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말씀이 주는 힘으로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절망의 옷을 벗어버리고 소망의 찬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다사다난했던 2012년을 뒤로하는 연종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침몰해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이 저물고 어두울 수록 주의 진리와 그의 몸된 교회는 더욱 순결하고 밝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해지는 쪽을 향하여 절망의 걸음을 걷는 자들이 아니라 밝은 아침을 향하여 어두움을 삼켜버리는 자들입니다. 
언제까지 절망적인 세상과 벗하여 살기를 고집하십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힘 있게 도약해야 합니다. 

칼라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기 또 하루, 푸른 하늘의 아침은 밝았다. 눈을 뜨고 일어나서 옷을 입고 나갔다 돌아와서 식사하고 드러누워 잠잔다. 이것만으로 오늘 하루를 다한 것인지 당신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달력의 아라비아 숫자에다 숫한 의미의 동그라미를 쳐가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숫한 사연의 역사가 녹아있는 한 장씩을 넘기면서 한 달 한 달을 보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넉넉한 세상 역사의 활주로를 타고 지난 한해가 어떠했던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까이 이르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우리 가슴에 불을 붙이고 계십니다. 이 불이 빨리 붙여지는 것이 우리 주님의 소원이십니다.
우리의 장래는 창대합니다. 다윗의 말년은 지는 노을이 아니었습니다.

역대상 29장 28절에 『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고 했습니다.

가는 세상은 오는 소망을 관조觀照(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의 실상을 비춰봄)합니다. 늙는 인생은 부활의 새날을 기림(잘 되는 것을 추어서 말함)니다. 붉은 저녁하늘은 맑은 날의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한 우리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설립된 지 23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갈보리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여기에 걸맞은 영적 깜냥(specification, 자격 쌓기)을 쌓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님을 만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의 예루살렘인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을 삶의 의의와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때가 저물고 날이 이미 기울어졌어도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고후 4:16).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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