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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산상수훈의 결론 (마 7: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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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결론 (마 7:20-27)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베푸신 교훈 또는 산에서 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누가 천국에 들어가느냐입니다. 주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내용은 인생의 집을 어떻게 짓느냐입니다. 집을 짓는데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 무너지지 않는 집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은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22절은 ‘그 날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 날은 온 인류가 심판을 받게 되는 심판의 날입니다.
   
성경은 심판의 날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히 9:27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마 25:31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십니다.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마 25:32에 보면 심판의 대상이 나오는데 ‘모든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은 아담 이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계 20장에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천사가 마귀를 잡아서 결박하고 무저갱에 던져 넣습니다. 무저갱은 끝이 없는 구덩이를 말하는데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귀가 무저갱에 들어간 후에 지상에서는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이 때 예수님을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 년이 찬 후에 사탄 마귀가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고 모아서 성도들과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웁니다.
   
이 전쟁을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은 반드시 성도들이 승리합니다. 그 이유는 이 전쟁은 성도들이 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성도들이 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후에 흰 보좌 심판이 시작됩니다.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이 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계 20:12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언행심사는 하늘에 있는 책에 다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2.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25, 27절을 보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여기서 창수라는 말은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로 물이 넘쳐서 집에 부딪친다는 말은 고난을 당한다 환난을 당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5절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즉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7절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 즉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집을 잘 지은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고, 신앙의 집을 잘못 지은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 욥 5:7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삭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야곱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13년간 고난을 당했고, 모세는 40년간 고난을 당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차이이고 많고 적으냐의 차이이지 누구든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땅이 저주를 받아서 사람들은 평생에 수고를 해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수고가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들에게로 내려온 것입니다. 원죄 말고 우리 스스로가 범한 죄는 자범죄라고 합니다. 이 자범죄 때문에 고난이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 5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요 5:14에 보면 주님께서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나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38년 된 병은 그의 죄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분이 있다면 속히 회개하시고 죄 없이함을 받으십시오. 죄가 원인이라면 죄 문제를 해결하면 그 고난도 해결 될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 또 하나는 더 아름다운 결과를 위한 과정입니다. 광야의 고난을 통과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고,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더 아름다운 결과를 위한 과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8:2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류영모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고구마 하나가 머리통만하더랍니다. 고구마 간식을 주는데 여섯 토막 여덟 토막을 내어도 될 정도였답니다. 고 김용기 장로님이 그 고구마를 들고 고구마가 왜 그렇게 커졌는지 청년들에게 가르쳐 주더랍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고구마가 잠자는 걸 보지 못하고 충격을 준답니다. 아침에 이슬을 먹고 고구마가 푹 퍼져 잠들어 있으면 호미를 들고 가서 흙을 푹 돋워 주면서 손으로 잠자는 고구마를 툭툭 건드려 준답니다. 빗자루로 고구마를 슬슬 쓸어주면서 충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으면 고구마가 긴장을 해서 커진답니다. 한번 충격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커진답니다. 그래서 고구마가 머리통만해졌다고 설명하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잘 자라라고 건드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건드리시면 충격을 받은 고구마가 충격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처럼 우리들이 영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베데스다예수마을기도원에서 3일간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기도원이 지금 물질적으로 상당히 어렵습니다. 건축을 하면서 사기를 당해서 경매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원장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오직 믿음으로 사신 분입니다. 이 분이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이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철야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제게 주신 마음은 “사명이 크기에 연단도 크다”라는 응답이었습니다.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는 고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어려움 중에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환경에 눌리지 마십시오. 욥의 고백처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는 믿음과 고백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인생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 누구든지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산모가 자연 분만을 하지 못하면 수술을 받아야하는데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에게 마취를 해야 합니다. 어느 날 의사가 수술을 받아야하는 산모에게 마취를 하기 위하여 “심호흡 하세요”라고 말했더니 그 산모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심호흡을 하지 않고 말로 “심호흡” “심호흡” 하더랍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심호흡을 하라 하시면 행동으로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마치 말로만 심호흡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은 늘었는데 생활은 말씀대로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21-23을 보면 천국 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지옥 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주님께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에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주님께서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2을 보니 지옥 가는 사람이 주님을 5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말로는 주님을 찾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에 나오는 그 사람은 선지자였습니다. 평신도도 아니고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직분이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역이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들도 지옥 갈 수 있습니다. 교회를 몇 십 년 다닌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구역장도, 교사도 지옥 갈 수 있습니다. 직분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나 체험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에 나오는 사람은 귀신도 쫓아내었고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나 체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가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니 “그 날에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자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는 구원 받았는지 알았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날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했다고, 봉사를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하나 가져야 합니다. ‘분명히 교리적으로 믿으면 천국에 가는데 22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분명히 믿는 사람 같은데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겨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들의 문제는 사실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믿음이 없습니다.
   
약 2:20에서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26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진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행함으로 믿음이 증명되어야 가는 것입니다.
   
24-27절을 보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히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 “건축 재료는 인생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자신의 인생을 지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크고 튼튼한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부실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상당히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부임하시고 첫 설교로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교인들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난주일 설교를 똑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은 수군대면서 킥킥 웃었습니다.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모양이야. 어떻게 지난 주일 설교를 그대로 하실 수가 있을까?”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또 다시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이라고 목사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모양이다.”
   
결국 교인들은 목사님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보따리를 싸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교인들은 목사님이 좀 안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한 달을 채울 겸, 그 다음 주일에 고별 설교를 하시고 가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역시 그 날도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 없는 모습을 보였으면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시는 시점에서도 똑같은 설교를 하셨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되돌아보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목사님이 못 가시도록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회에 그대로 계시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께서 당연히 똑같은 설교를 하리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사님은 다른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물질생활에서부터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 분이 있으면 이제부터 모두가 십일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십일조를 했을 것 같습니까? 안 했을 것 같습니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 하면 1년 내내 계속 똑같은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고 적고 간에 다 순종해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또 바뀌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도에서 나타납니다. 모두가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나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서 봉사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교회가 놀랍게 바뀌어졌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크게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4.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건물은 기초가 중요합니다. 일본에 임페리얼호텔이 있습니다. 이 호텔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로이드라이프라는 사람이 세운 건물입니다. 오래전에 이 건물이 지어질 때에 2년 동안 기초 작업을 했습니다. 수년의 골조공사가 끝난 다음 다시 내장공사까지 완전히 끝마치는 데 또 다시 2년이 걸려서 세운 건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인다, 너무 시간을 끈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52년 동경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동경에 있던 모든 건물들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초토화 되어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 임페리얼호텔 만큼은 그 안에 있는 물건하나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집을 지을 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기초공사가 힘듭니다. 그런데 일단 집을 지어놓으면 비가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서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기는 굉장히 쉬었습니다. 아주 손쉽게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 위를 와디라고 하는데 와디는 비가 오지 않는 평소에는 모래 바닥인데, 본래는 강바닥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겨울이 되면 갑자기 물이 흐르게 되는 곳입니다. 평소에는 평평하고 집을 짓기에 편리합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평소에 괜찮던 집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의 집도 이와 같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져버립니다.
   
반석은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 18:2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시 19:14에서도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0:4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기초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놓쳐도 되지만 예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신앙의 기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전도한 사람,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없어져 버리면 신앙이 무너진다면 모래 위에 건축한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이 신앙의 기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복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 교회생활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적인 어려움이 찾아오면 신앙이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역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자기 기분이 신앙의 기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교회일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상하면 예배도 소홀히 하고 교회 일도 놔버립니다. 역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신앙의 기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열심히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조금만 섭섭한 마음만 들어가도 무너집니다. 역시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만 붙잡아야 합니다. 그분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견고한 것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마 16:18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왜 와야 합니까? 축복 받기 위해서,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건강의 복을 받기 위해서 등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정확한 대답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와서 많은 축복을 받았어도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생활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와서 다른 축복은 받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붙잡았다면 교회생활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고 교회의 기초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필재 목사님의 설교에서 미국의 이민자 목사님에게 있었던 기막힌 일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민 가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잘 안 된다 말입니다. 이민자들은 스트레스가 많고 안되는 게 많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그래도 괜찮게 나가던 사람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금방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어떻게 하면 이민자들을 위한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것이 이민자다.’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을 살펴보니까 이민을 와서 사는 게 참 재미없단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행복하고 재미있었는데 이민 오니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미있는 교회를 하자.’ 이것이 목회 철학으로 정해 졌습니다. ‘이민 생활은 날마다 짜증나고 쫓기고 스트레스 받고 좌절감, 실패감, 그래서 가정마다 이혼을 많이 하게 되고…. 이거, 안되겠다. 이걸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아주 재미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디어가 좋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와서 재미있다고 느끼고 갈 수 있도록 주일마다, 계절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구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은 점점 안 나오는 겁니다. 나오던 교인들도 안 나오는 겁니다.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하면서 안 나오는 겁니다. ‘이상하다! 재미있어서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교회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목사님은 재미에다 철학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 커피만 마시면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싸움만 한다. 우리 맥주를 마시도록 하자!” 재미있게 하느라고 맥주를 박스로 갖다 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교인이 다 없어지고 8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주일 예배 간단히 보고 8명 데리고 할 것이 없어 사택에 데려가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를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예수님을 붙들어야 하는데 재미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할 때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이름 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죄사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말세가 되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놓아버립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가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입니다. 전에는 오직 예수였던 기독교가 이제는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도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외치고, 책에 그렇게 쓰고, 심지어 방송에 나와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목자는 자기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교인들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는 목자관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시대는 진리 싸움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육신적으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666표를 받게 되는 때가 오면 예수님만 붙잡으면 매매를 못하게 되니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고 짐승의 표를 거절하니 순교를 해야만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역시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 이 길이 살길입니다. (마경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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