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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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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을 바라라(Hope in God) (시 43:1-5)


시편 43:1-5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최근 한국 사회나 도서출판계의 경향을 보여주는 키워드 중 하나는 ‘힐링’입니다. 우리 사회가 많이 지쳐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경쟁으로 지쳐 있고, 상처와 분노, 불안과 좌절 등으로 유명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나한 자나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 난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평범한 일상사에서 행복과 쉼을 맛볼 수 있도록 돕는 책이나 프로그램들이 유행입니다. 오랜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에 있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최근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 스님들의 책들이 많이 팔립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힐링캠프’란 대담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주목을 얻기도 합니다.

시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힐링 하는 책입니다. 힐링은 무엇보다 자기 속 안에 있는 것을 토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냥 가슴앓이를 하는 것보다 노래로나 말로 토해내는 것이 치유가 됩니다. 시인은 3번이나 ‘어찌하여’란 말을 사용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5절에서는 시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하며 자기 마음속을 끄집어냅니다.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 있는 내가 믿음 없는 나를 달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자기 속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 힐링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탄식은 벽을 향한 탄식이 아닙니다. 세상 곳곳에는 하나님의 귀가 있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누군가 우리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면 우리 고통은 많이 경감될 것입니다.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잘 들어주는 것, 여기서부터 힐링이 시작됩니다. 공감하기보다 먼저 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은 전심을 다하여 들어주고 공감해주십시오.

힐링은 욕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괴롭혔던 세력에 대해서 욕과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이것이 성경이 맞나 할 정도로 원수에 대한 저주가 많습니다.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세력이나 사람에 대해서 ‘간사한 자’, ‘불의한 자’, ‘원수’라고 부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컷 욕하고 저주하다보면 가슴이 풀리면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는 흔치 않지만 이렇게 답답할 때, 때론 원망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저주도 하고, 때론 기도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처럼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일들이 잘 풀려가지 않을 때, 불가항력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사정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5절에서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Hope in God”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하나님을 바라라(Hope in God)”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소망은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에 가까이 갈수록 그림자는 뒤로 멀리 물러납니다. 태양과 같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 거짓된 소망에 이끌리면 절망과 무력감은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나 세력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함이 없는 물질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우연을 또한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소망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일이 되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셔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14:24) 하나님께서 작정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혜의 천수답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은혜의 비가 부어져야 일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인간의 계획과 ‘빨리빨리’가 무성한 시대에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됩시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아픈 것은 충분히 아파해야 하고, 채워질 것은 채워지고 난 다음에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성급하면 나중에 고생하고 오히려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망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3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 앞에서 의롭게 만드십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것이 칭의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칭의론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칭의는 재판과정 상에서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재판을 다투고 있는데 재판관이 그 중에 한 사람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칭의입니다. 이것을 법정적 의미의 의라고 합니다. 1절에 보면 간사하고 불의한 자와 시인 사이에 재판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적으로 시인의 편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경건치 않은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의롭다고 판결 내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내 송사를 변호하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변호사는 내 이해관계와 함께 하고 나를 지지해 줍니다. 그런데 그런 변호사가 바로 동시에 재판관이 되어서 나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우리의 낙담이나 실망감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옳다고 손을 들어주십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우리가 낙담하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여러 무리들 가운데서 우리가 옳고 우리가 승리자임을 선언하십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 재판에서 이겼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재판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리들 가운데 우리 손을 번쩍 들어 올리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서 우리 불안을 제거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책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는데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내 자신도 못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시인이 자신 스스로를 향하여 달래듯이 여러분 스스로를 달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아침마다 우리 영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소리나 세상의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8:6)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시편 기자는 2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내가 가진 지혜, 능력, 은사, 물리적 힘 등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 우리는 힘도 얻을 수 있고, 지혜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힘으로는 도저히 골리앗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의 힘을 주시니 다윗이 근접전보다는 원거리에서 물맷돌을 던져야겠다는 생각을 주셔서 이겼던 것입니다.

역대기서에서는 하나님이 힘이 되는 모습을 매우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의 대군이 쳐들어왔는데 전투는 하지 않고 오히려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하고 기도합니다. 선지자 야하시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20:15, 17) 하고 말씀으로 격려합니다. 한편의 예배입니다. 이 전투의 절정은 그 최전선에 성가대를 배치하고 성가대가 앞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결과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에서 싸우셔서 이스라엘은 전혀 힘 하나 안들이고 승리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매우 극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신앙인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또한 매우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때로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3)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어둔 앞길에 밝은 빛을 비추어 우리로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보내어 우리가 함정에 빠지거나 돌아가지 않고 곧장 목적지를 향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힘 되신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하시는지 4절에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극락은 한자로 지극한 기쁨을 뜻합니다. 얼마나 큰 기쁨이 있기에 극락의 기쁨이라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감옥에 갇혀서도 “크게 기뻐한다”(빌4:10) “기뻐하고 기뻐한다”(빌1:18)고 하였고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기쁨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도무지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우리 안에서 찬송이 나오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채찍에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송하였습니다.

기쁨이나 웃음은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이나 웃음이 내 안에 있는 불안이나 문제를 일시에 몰아낼 때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잔인한 수용소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서는 자기 아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 아버지가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기들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게임의 내기에서 승리하면 탱크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면서 여러 게임들을 합니다. 결국 주인공 아버지는 죽지만 아들은 수용소 안에서 마지막까지 살았고, 게임을 즐기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타고 온 탱크를 선물로 받습니다. 한 번의 웃음이 만 가지 근심을 몰아냅니다. 유태인들은 웃음을 통해서 근심을 이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 안에 기쁨이 솟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 얼굴을 도우십니다. 

시인은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를 도우신다는 표현이지만 나를 내 얼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얼굴빛이 좋지 않으면 내 안에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얼굴이 빛나면 내 안에 즐거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 얼굴을 상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죄, 수치, 두려움, 근심, 슬픔, 쇠약함. 우리 하나님은 내 얼굴을 빛나게 하십니다. 우리 얼굴을 땅에 떨어뜨릴 때가 있습니다. 성과가 없을 때 그렇고, 패배했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 얼굴을 들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3:3)고 고백합니다. 부끄러움으로 땅에 떨어뜨린 고개를 다시 당당히 들게 하십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인 노회에서도 머리를 당당히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교회를 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자기 일이 분명히 있고 이 일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얼굴을 당당히 들고 다니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인생으로 당당한 인생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마르틴 루터는 궁지에 몰려 몹시 상심하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루터에게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루터의 아내는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하고 묻자 그 지혜로운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토록 기가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낙심하고 무기력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소” 하나님은 우리 기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창고 강당에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이라는 글이 걸려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이 정신 대로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 살다 남의 눈치만 보는 인생이 되어버린 현 세태를 꼬집는 통쾌한 면이 있습니다. 그 십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 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8.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9.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바꿉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불안에 떨고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들로 축복하십니다. 금년 한 해 이런 당당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확신이 넘치는 복된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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