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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물 (사 5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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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 (사 52:7-10)


이사야는 왕족 출신 예언자입니다. 당시 왕은 절대군주였습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왕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었으면 아주 평안하고 행복한 안일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부름에 순종하여 응답합니다. 그는 그때부터 고난의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수난의 선지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그는 순교를 하는데 톱으로 정수리에서부터 온몸이 반으로 켜져서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사야는 그 시대에 아주 혹독한 수난을 받는 예언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는 평화를 선언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52년 동안 집권하던 웃시야 왕이 갑자기 죽던 해에 나라가 걱정되어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장기 집권하는 것은 그래서 좋지 않습니다. 장기집권 하던 사람이 죽으면 한사람만 의지하던 습관 때문에 장래가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 그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앉으신 보좌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서 흘러내린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기가 기도하고 있는 성전의 지붕을 온통 덮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 이 나라와 이 백성은 내가 지키고 있다”하는 싸인 이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이사야가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소망적인 안도의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그 환상을 본 이사야는 그 길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지키심과 이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메시아 탄생을 처음으로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예수께서 태어나기 700년 전에 처음으로 장차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가장 큰 뉴스거리인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예고한 특종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말할 때는 의례히 이사야를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만 보아도 평화를 선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500년 역사 가운데 3,500년을 압제와 고난을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현재도 바벨론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구원을 선포하고 장차 자유함과 해방이 주어질 것이고 장차 메시아가 탄생 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희망과 자유와 해방과 구원과 비전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3가지 소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평화의 선물” 

7절을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이 평화와 구원과 자유함입니다. 그야말로 너무나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나라를 잃고 이곳저곳으로 유리방황하며 압박받아가며 살아가는 이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을 이사야는 공포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2장에서 이사야는 이 백성들에게 장차 주어질 희망과 자유함과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이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 평화가 참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몇 가지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평화입니다. 이 육신의 평화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 건강의 평화를 잃으면 다 잃게 됩니다. 사람이 몸의 건강을 잃으면 꿈도 잃고 소망도 잃고 일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몸의 평화가 상실되면 정신의 평화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도 병들고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전 대법원장이라는 분이 한강에 투신해서 죽었습니다. 한나라의 대법원장을 지낸 분이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종말을 맞아서야 되겠습니까. 한강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건강도 있었다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몸의 평화를 잃으니까 정신건강 까지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신의 건강을 잃으면 분별력도 의지도 상실됩니다. 이 육신의 평화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평화도 중요합니다. 몸이 건강해도 물질의 건강을 잃으면 삶의 균형이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한데도 온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것은 물질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또 가정의 평화도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물질만 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가정이 해체되는 시대입니다. 참 무서울 정도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평화는 더욱 중요합니다. 물질에도 평화가 있고 건강도 평화가 있고 가정의 건강이 있어도 이 영적인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영적인 안정의 상실입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상아침대에서 누워 잠을 자도 불면증에 걸리면 그 집은 지옥입니다. 그 삶에 감사함이 없습니다. 삶에 재미가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건강함과 평화인 것입니다. 영적 평화가 복입니다. 

사람은 여기서 감사함과 행복함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엊그제 어느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네 분의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중 한 남자가 “불신자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악한 생각을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마음이 없으니 그 자체가 복이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참 건전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 영적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과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평화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또 소중한 평화는 국가적 평화입니다. 본문은 국가적 평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 없는 백성의 고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중동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애환을 보십시오. 나라를 빼앗기고 유리방황하는 저 모습들은 나라의 평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서남아시아의 지진피해국 백성들을 보십시오.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가는 저들에게 어느 때에 안정과 편안한 잠자리가 주어지겠습니까. 국가적 평안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4,500년 역사에 3,500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에게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국가적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본문에서 이 평화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를 공포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위로의 선물 

9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로하고 구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잡혀 살고 있습니다. 언제 고국에 갈지 기약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때 이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공포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리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유리방황하는 민족에게 이제 곧 해방과 자유함과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평화를 공포한 언약입니다. 그러니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소망적이고 기쁘고 즐거웠겠습니까. 사람은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위로와 격려 한마디가 죽어가던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은 위로를 받아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삭개오는 가지고 누리고 부리고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많이 그는 소유하고 누리고 살았지만 그는 외로웠습니다.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어서 세금을 떼먹고 착취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고독한 법입니다. 얼마를 더 먹자고 그렇게 착취하며 이웃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살아갑니까. 그래서 그는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동네에 오신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허기진 눈빛으로 예수님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외롭고 고독에 쌓여있던 삭개오를 향하여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뭐 하느냐, 빨리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가겠다.”고 하십니다. 얼마 만에 듣는 위로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그는 나무 위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눈물로 아뢰며 그토록 아끼던 재산을 송두리째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 한마디가 그의 얼어붙었던 차가운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받아냈습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격언 중에 “고난당할 때 제일 먼저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는 중보 하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삶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서 엎드려 있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곧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온대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꿈을 꾸었습니다. 눈길에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아주 건장했고 또 한사람은 지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 사람도 나처럼 매우 지쳐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가더니 한사람은 없어지고 발길도 한사람의 발길만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건장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사람을 엎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저 두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 길래 엎고 가고 업혀 가는가 하고 생각하다고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건장한 사람은 예수님이었고 등에 엎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그는 자신을 주님이 위로하고 계신 것을 알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위로를 받아야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전도사 때 너무 몸이 쇠약해서 목회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목회사역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새벽기도였습니다. 새벽마다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기도회에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너무 힘들어요, 나에게 힘주세요.”하고 기도하면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10시까지 그렇게 엎드려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새벽시간만 되면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놀라 깨어나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깨웠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 병이 완치될 때까지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께서 나를 깨우셨다는 것을 한참 후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이고 격려입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인구가 100억 가까운데 주님은 새벽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기억하시고 깨우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그러니까 그분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할 때 참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이 세상교회가 지니는 모든 불협화음의 문제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이 안으로는 다툼이요 밖으로는 욱여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게도냐로 피신을 갑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식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갔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바울이 얼마나 의기소침합니까.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젊은 집사 디도를 위로차 대표로 사도바울에게 보냅니다. 

디도를 맞이한 바울은 그로부터 상당한 용기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 디도의 옴으로 위로를 받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나라를 잃고 미래가 암담하도록 희망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나타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구속하셨다”고 공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위로와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도하심의 선물” 

본문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가 너희를 이제부터 지키고 호위하고 보호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것이 또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호위하신다.” 여기서 자신감이 주어지고 믿음이 생기고 힘과 용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뒤에 든든한 보호자가 있다” 이 얼마나 든든한 백입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사람이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위인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호위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 만만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철저하게 보호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밤잠을 설치고 노심초사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그만큼 기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경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 배후에 하나님이 나를 호위하고 계신다.”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얼마나 큰 힘과 용기와 자신감에 사로잡혀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전 재산을 다 내 놓기도 하고 목숨을 내 놓기도 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주를 위해서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 s Li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말 나치수용소서 1,200여명의 유대인을 구출한 오스카 쉰들러와 그의 아내 에밀리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부부는 독실한 독일인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나치를 설득해서 1천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빼냅니다. 폴란드 크라크에 신설된 독일군 무기 도금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구실로 유대인들을 사지에서 빼내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자꾸만 밀렸습니다. 

그래서 1944년 나치는 크라크에 수용되어 있는 유대인 노동자 1천명을 다시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데려다 집단학살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끔찍한 계획을 알아차린 두 부부는 체코의 브린리츠에 있는 무기 공장에 손이 필요하다고 끈질기게 설득해서 200명을 더 빼내 모두 1,200명을 도피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다 1945년 마침내 소련군이 독일로 진주하자 이 1,200여명의 유대인들을 전원 풀어서 도피시킴으로 그들을 살려냅니다. 그 내용이 쉰들러 리스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쉰들러는 죽어 예루살렘에 묻힙니다. 그 부인은 94세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그해 독일에 귀국 후 죽었습니다. 그 영화가 촬영될 때 그 부인은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덤 앞에 서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보듯 수많은 고생과 위험은 날마다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행복했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 부부의 배후에서 인도하시고 호위하시고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은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은 더불어 모두가 함께 행복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서남아시아에 지진 피해로 고난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병원 문을 닫고 직장을 쉬고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느 지역은 주민 수 보다 자원봉사자들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참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예수를 앎으로 우리민족이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삶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리들이 예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알면 이런 눈이 뜨입니다. 생각이 열립니다. 마음도 열립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호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소망적인 위로이고 축복입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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