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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의 찌꺼기 같으나 (고전 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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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찌꺼기 같으나 (고전 4:8-13)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었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 不敢爲天下先

여러분의 인생 행로에서 얻은 가장 귀한 보물은 무엇입니까?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자기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세상 앞에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我有三寶, 寶而持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노자, 67장). 그는 그것이 보물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누구를 만나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게 되니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검소하여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니까 어딜 가든 편안합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귀히 여깁니다. 생각해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 노자의 세 가지 보물은 별로 인기있는 품목이 아닙니다. 사랑보다는 경쟁력이, 검소함보다는 풍족함이, 겸비보다는 자기 존재 과시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셋 가운데서 공동체 생활을 위한 가장 큰 미덕은 不敢爲天下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잊혀진다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함께 웃어주고 격려하던 어른들이 어느 결에 자기들의 대화에 집중하면, 아이는 어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과도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공동체에 가든지 그런 이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모임에 가도 사람들은 어디에 앉아야 하나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합니다. 

자기 지위에 합당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기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지 남들과 구별되는 자리에 앉으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후에 “주요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발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산다면 자리다툼이 웬말입니까? 하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여러 파로 분열된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라 하는 이들의 주도권 다툼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헛된 자만심이 공동체를 분열로 이끌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립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뒤에 줄을 섬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조’(conformity)라고 합니다. 외부의 압력이 없는 데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병적이 되면 결국 패거리주의, 연고주의가 되는 겁니다.

패거리주의가 판을 치는 곳에는 진리의 자리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라 하는 이들의 행태를 바라보며 기가 막힙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영적으로 완성된 사람인양 처신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기쁨이 지탱해주는 동안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의 영적인 나태를 보며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8a)

이상 난동에 웃자란 보리가 고개를 들다가 뿌리가 허실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헛된 자만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순례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 세상의 구경거리

그에 비해 사도들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있습니다. 아무도 맞아주는 이가 없는 낯선 환경 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온갖 고난을 다 겪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그래서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9)

이 구절은 우리에게 로마 장군들의 개선행렬을 연상시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그 행렬의 맨 끝에는 포로로 잡아온 이들이 굴비두름처럼 묶인 채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검투사의 칼에 찔려 죽거나 동물들의 먹이로 던져질 사람들이었습니다. 원형경기장에 모여든 군중들은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들의 운명이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경거리’는 곧 ‘굴욕거리’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18).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락과 평안함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닙니다.” 어떤 열정이 그들을 사로잡았길래 이런 시련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은 불난 집과 같습니다.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욕심의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하찮은 것들에 정신이 팔려 ‘불이야’ 외치는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불쌍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옷에 불이 옮겨붙는 것도 모른 채 동분서주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도들을 조롱하고 박해합니다.

• 이상한 사람들

대체 그런 수고를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들이 받는 대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고된 노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르침을 받는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고전8:11) 바울은 자기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권리를 쓰지 않습니다. 행여라도 복음 전하는 일에 지장을 줄까 싶어서입니다. 몸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겼던 그리스 로마의 문화 전통에 속한 이들이 볼 때 밤낮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이상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사도들은 욕을 먹으면 도리어 그를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했습니다. 이것 또한 사람들에게 낯선 반응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모욕을 당하거나 비방을 받으면 맞서 싸워는 것이 명예로운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독교가 노예 도덕을 가르친다고 조롱했습니다. 굴종을 받아들이고 참는 것은 노예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압도적인 힘 때문에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물러선다면 우리 마음에 짙은 그늘이 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바울 사도에게는 그런 그늘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정신이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보다 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이를 축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크기가 저들의 미움까지도 품어안을만큼 넉넉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억울한 비난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의고 염치고 없이 마구 들이대는 사람들을 만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명해 보아야 구차해지기만 하고, 가만히 있자니 바보 같고, 어찌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모욕을 모욕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음이 시원해지지는 않습니다.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그 때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 공부의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속에 일고 있는 분노의 감정에 굴복하지 말자 다짐합니다. 

하지만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동체입니다. 마음 공부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동행이 필요합니다. 넘어진 이야기, 실수하고 욕심부린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 공부는 깊어집니다. 털어놓고 나면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깁니다. 성도의 교제는 잘한 이야기만 나누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격려할 수 있게 됩니다. 

• 더 타고 속이 타야

어느 분은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기어서 천 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닥에 납작 엎딘 채 겨울을 나는 냉이처럼, 우리가 조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도들의 삶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13b)

이 말은 지나친 자기 비하처럼 들립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쓰레기’, 혹은 ‘찌꺼기’라는 말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고대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거나 큰 기근이 닥쳐오면 가장 무가치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바다에 던지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사회나 공동체의 죄를 전가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희생양인 셈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게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하지만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는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고 살 맛을 가져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혹시 누룽지를 좋아하십니까? 어린 시절 가마솥에 밥을 해먹을 때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뜸을 들여야 하니 불을 줄이라고 하시면 못들은 체하면서 불을 조금 더 넣곤 했습니다. 누룽지를 만들려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밥을 태웠다고 야단맞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누룽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인 정상현은 <누룽지>라는 시를 통해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배고픈 날 누룽지 한 조각 먹어보아라.
밥 짓다 태웠다고 푸념할 일이 아님을 
꼭꼭 오래 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알리라.
인생도 씹을수록 맛이 나는 누룽지처럼
더 타고 속이 타야 멋도 알고 맛도 알까?

시인은 저보다 좀 진지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는 누룽지의 고소한 맛보다는 ‘더 타고 속이 탄’ 사정에 주목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서 인간미가 나는 사람은 인생길에서 속 태우는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속을 태운다고 다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독기를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중의 실패입니다. 기왕 사는 인생, 실패와 고통을 삶의 맛으로 멋으로 바꾸는 재주 하나쯤은 익혀야 합니다. 솥의 맨 밑에 깔린 채 가장 뜨거운 불기를 제일 먼저, 그리고 맨 나중까지 받는 누룽지가 고소한 맛을 품듯, 세상의 쓰레기처럼 찌꺼기처럼 천대받던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살 맛을 전해주는 이 역설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던 예수가 참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은 비겁함입니다. 하지만 무지한 자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무기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화낼 일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마운 이들입니다. 지금은 안으로 생명을 품을 때입니다. 이 여름 날의 무더위 속에서도 여러분의 영혼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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