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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자 (히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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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자 (히 12:1-4)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떨리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요즘 유행하는 독감으로, 설사를 하고 두통으로 고생,, 토요일 결혼식 주례와 지역장 세미나는 겨우 감당하였는데, 주일 설교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 기도하면서 감사가 터져나왔습니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도 이 정도라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습니다.
1절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이것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의 삶입니다.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불가능합니다. 재벌도 자살하고 재벌 딸로 자살하고 인기 연예인도 자살하고 대통령을 지냈던 이도 자살하는 것을 보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은 그나마 낫습니다. 하소연할 수도 있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얽매인 죄는 말도 못합니다. 수치스러워서 상담받기도 힘듭니다.

훌륭하고 존경받던 환경 운동가, 환경 오염을 걱정하여 하루에 한끼 밖에 먹지 않는다던 그가 성추행 스캔들로 사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처음 미성년자불가 영화를 보고,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지만 하나님께 다시는 그런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는 약속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제 삶에 낙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얽매인 죄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먼저 1절에서 “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증인들이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도 얼마든지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도 믿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무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달려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과 나는 달라요!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잖아요? 달리기, 등산, 수영, 암기, 손재주, 성격, 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잖아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2절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셨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짓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유일한 노력은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리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커스에서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높은 곳까지 그네를 타고 올라가서 건너편에서 그네를 타고 오는 사람을 행하여 몸을 공중에 던집니다. 그 때 상대편 사람을 완전히 믿어야 완전한 자세가 나오고 결국 몸이 떨어지는 듯하다가 상대방의 손에 자신의 손이 탁 나꿔 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대방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게 되고, 결국 완전한 자세가 나오지 않아서 상대방이 붙잡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중그네 타는 사람이 공중에 몸을 던지고 완벽한 자세를 취하는 그 순간의 마음!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이렇게 믿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보여져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세상이 얼마나 복잡한데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미국에서 한 안경점 광고가 히트를 쳤답니다.“나는 안경 밖에 몰라요.”이 광고가 그 해 전 미국에서 광고대상을 받았답니다. 
안경 밖에 모르는 안경점 주인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작 예수님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교회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이고 주님이고 왕이심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제 결혼식 주례 때 신랑 신부에게 권면한 말이 있습니다.“행복한 결혼은 배우자 잘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이고 아내를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여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누구를 대하든지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결정하지도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큰 실수를 할 위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는 40년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매일 만나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병들었을 때 구리 뱀을 바라보고 나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어 이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40년을 거쳤습니다. 

영성일기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훈련입니다.
일기를 나누지 못하시는 분은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식에 가면 ‘고인이 이제는 무거운 세상 짐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났구나!’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으면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가 벗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을 때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자아는 죽는 것입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암에 걸리면 사람이 왜 변합니까?
암 선고를 받을 때 마음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죽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보니 사람도 달리 보이고 시간도 환경도 돈도 성공도 재미도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암이 걸린 후에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용규선교사님이 최근 내신 [떠남]이라는 책에 보니, 몽골 사역을 마치고 잠시 가족들과 미국 애틀랜타에 머물러 있던 중, 열흘간 한국과 인도네사아를 사역차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답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이제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더랍니다. 그런데 문득 내 집이 어디인지 잠시 햇갈리더랍니다.‘한국? 몽골? 미국?’워낙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살다 보니 내 집이 어딘지 혼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어디가 내 집인가?’하는 질문이 떠올랐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기다리는 곳이 내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내가 찾아가는 대상은 집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였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디 있든지 그곳이 내 집이고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때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분명히 공간적인 개념이지만, 우리가 천국에 가려는 것은 천국이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계신 곳이니 가려는 것입니다.
그 주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천국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천국을 죽고 난 다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큰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순간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서 무거운 짐, 얽매인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미에게 꽃을 피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장미 꽃을 피우고, 강아지에게 짖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짖어대며, 독수리에게 날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늘 높이 비상하여 날아 오릅니다. 
어떤 생명이 어떤 것을 살아 낸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2절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고 왕이신데,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요 이기지 못할 고난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려면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도를 닦으러 산에 가고 자해를 하고 금욕생활을 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집회 후 성령께서 교인들에게 강력한 기도의 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저도 뜨겁게 기도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충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게 다가와 기도를 요청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마음이 무너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해들어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단한 것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기도제목이 아니라 탄식이었습니다.
벌써 무너졌어요!”이제 1월 3일인데 작심삼일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 저도 얼마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변화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거운 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무너진 후, 절망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몸무림치는 것 때문에 실패를 반복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안되나 봐!”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때, 주님은“나는 죽었습니다.”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 고백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게 구원의 줄이었습니다. 죽고 싶은데, 이미 죽었다니 말입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저에게‘모든 것을 맡기고 편히 잠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정말 비참하였지만 잠을 잤습니다. 그 때 저는 비로서 주님께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금 더 늦게 무너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3일이면 절망이고 3개월 후면 괜찮은 것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완전히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당뇨병, 고혈압 환자가 매일 운동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혈당을 체크하고 혈압을 체크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암 환자가 먹는 것 하나 마음 하나 잘 다스리려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지나치다고 할 것입니까?
우리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암 보다 비교할 수없이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인 죄를 지고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새해들어 벌써 무너지고 좌절한 이들이 있다면 잠잠히 주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실패한 자아는 소리지릅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깊은 탄식을 내 뿜습니다. 그러다가 절망의 깊은 침묵에 빠집니다. 
그러기에 무엇 보다 먼저 우리 자아가 죽음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하면 비로서 주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노래하라‘

저에겐 죄의 즐거움이 없어졌습니다, 조그만 죄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의 유혹은 너무나 작은 것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주님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선명히 보이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삶의 차이입니다.
이따금 보이는 것과 계속 보이는 것 차이입니다.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왕으로 모시고 삽시다.
그러면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어떤 죄도 무거운 짐도 다 벗어집니다.
여기서부터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  1.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후렴>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2. 정결케 되기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생명수 마시기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3. 진실한 친구를 원하거든 네 맘 속에 주 영접하며 
         네 맘에 평안을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4. 즐거운 찬송을 하려거든 네 맘 속에 주 영접하며 
        평안한 복지에 가려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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