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마 3:13-17) - 세례

첨부 1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마 3:13-17)

엊그제 금요일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병상세례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남편이 1년여 전에 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재발하여 재수술을 받고 지금도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그 동안 교회라고는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남편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집사님께서 많이 기도하고 권면했는데, 남편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상태가 아주 약화되어서 중환자실에 계셔야 했고 지금은 일반병실로 옮겨오긴 했지만,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1주일 전부터 마음을 열더니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더랍니다. 주치의도 그렇고 집사님 보시기에도 그렇고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것 같아 돌아가시기 전에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세례 이야기를 했더니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1년여를 서울 병원에 계시면서 다니시던 병원 옆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께 부탁해서 세례를 받게 할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남편이 대답을 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러면 전주남성교회 우리 목사님 모시고 오면 세례를 받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세례를 받겠다.’고 허락을 해서 ‘연초라 바쁘시지만 와서 세례를 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고, 주님을 영접한 것을 확인하고 병상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접한 지 불과 한 주 밖에 되지 않는 분에게 세례를 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교회에 출석한 지 1년이 지나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불과 1주일 밖에 되지 않는 분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려오면서 ‘혹 다른 사람들 가운데 불만이 있는 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도 빨리 세례를 받고 싶은데 나에게는 1년이 지나야 한다고 하면서, 왜 그분에게는 예수 믿은 지 불과 한 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교회에 한 번도 나와 본 적이 없는 분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하고 불만이 가질 수 있는 분도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그럴 분은 없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한 마을에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던 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분은 장로교 목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침례교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분이 크게 싸우고 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세례 때문입니다. 

침례교 목사님이 장로교 목사님에게 ‘세례는 성경대로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가 되어야지, 어떻게 머리에 물 몇 방울 뿌리는 것으로 참다운 세례가 될 수 있느냐’고 공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침례교는 세례를 침례라고 부르고, 실제로 침례를 베풀 때에는 온 몸을 물이 잠그는 침례를 베풉니다. 그래서 침례를 해야지 세례를 행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장로교 목사님이 대꾸했습니다. ‘성경에 어디 반드시 침례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침례교 목사님이 공격합니다. ‘왜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러 요단 강에 내려가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려가셨다는 것은 물속에 잠기셨다는 말 아닙니까? 성경대로 해야지요! 성경대로요!’ 

그러자 장로교 목사님도 지지 않고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성경대로 합시다. 그럼 침례교는 성경대로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해야지 왜 목욕탕에서 합니까? 성경 어디에 목욕탕에서 침례를 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경대로 하자면서요! 성경대로요!’ 

다시 침례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요단강에 갈 형편이 안 되니까 하다못해 목욕탕 안에서라도 물속에 잠겨야지요. 세례란 말의 뜻이 뭡니까? 물에 잠긴다는 뜻 아닙니까?’ 

다시 장로교 목사님이 공격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세요. 자꾸 몸이 물에 잠겨야 한다고 하시는데,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 때 도대체 어디까지 잠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무릎까지 잠기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허리까지 잠깁니까?’ 
‘아니지요.’ 
‘그럼 목까진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잠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머리까지 잠가야지요!’ 
‘분명히 머리까지지요?’ 
‘그렇다니까요!’ 

그러자 장로교 목사님이 자신만만하게 한 마디 합니다. 
‘이것 보세요. 그러니까 우리 장로교도 머리 위에 물을 뿌리잖아요!’ 

그러자 침례교 목사님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 장로교에서 만든 이야기일 것입니다. 장로교 목사님이 이겼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여야만 합니까? 아니면 머리에 물을 뿌리고 하는 세례라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둘 다 옳습니다. 

성경에는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말씀하고 있지만, 반드시 침례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분명 침례를 받으셨고,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에티오피아 내시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베푼 것은 침례가 아니라 세례였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행한 것도 침례가 아니라 세례였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있는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갇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지하 감옥에는 감옥 바닥에 손바닥만한 샘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 물로 로마 감옥에서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샘물로는 침례를 행할 수는 없고,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가 가진 의미입니다.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이냐, 아니면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냐 하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의미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한 사람이 새롭게 거듭남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지금까지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생의 삶을 사셨고, 시험도 당하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신 분이시지만 죄는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말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요단강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내게 세례를 받으려고 내려오셨습니까?’ 그 세례 요한의 고백은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 전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태복음 3:11) 

세례 요한이 자신의 뒤에 오시는 능력 있는 분, 물로 세례를 주는 자신과는 달리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런 말씀으로 세례 요한을 설득하신 것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의를 이룬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이루어질 ‘모든 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당신의 마음속에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그 뜻을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알려주진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믿음을 고백한 후에야 비로소 메시야로서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라는 말과 ‘비로소’라는 말입니다. ‘이 때’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데, 그 사실을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는 죽을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시키셔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계획과 그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 그 죽음을 제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메시야)’라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메시야가 가야 할 길을 이제는 알려주어도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말씀을 그 때 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앞서 세례 요한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분명히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하는 당신의 앞길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죄 씻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루실 구원을 세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자고 말씀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허락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이치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 맞느냐?’고 물어올 때에 아주 단호하게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실 분입니다. 자신이 베푼 물세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과 성령의 세례를 베풀실 분이 예수님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게 이치상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치상 맞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세례 요한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메신저일 뿐입니다. 자신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먼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자존심을 전혀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하셨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누군가의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자신의 낮은 신분을 의미했습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님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주인이요 스승이시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기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자존심도 기꺼이 내려놓으실 수 있었고, 철저하게 낮아질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크게 방해하는 요소를 하나 꼽으라면 자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존심은 내 안에서 바위보다 더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고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자존심을 버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 자존심을 버리면 내가 사라지고 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 자존심은 오히려 나를 패망의 길로 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존심을 버리고 철저하게 내를 버릴 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던 핫산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현자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핫산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의 스승은 아직도 그가 속세에서 가지고 있던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핫산이 속해 있던 높은 계급의 특권이나 부의 잔재가 아직도 그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핫산아, 시장에 가서 양의 내장 40kg만 사가지고 오너라. 그러나 반드시 등에 메고 돌아와야 한다.” 

스승의 말씀에 따라 핫산은 즉시 마을의 한 쪽 끝에 있는 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장을 사서 메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흘러내리는 핏물은 순식간에 핫산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몰골로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돌아가야 하는 핫산은 난감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돈 많은 세력가로 알고 있기에, 핫산은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태연한 척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으로 얼룩져가고 있었습니다. 
  
핫산이 힘겹게 사원으로 돌아왔을 때, 스승은 내장을 부엌으로 가져가서 요리사에게 전해주고 모든 제자들이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스프를 끓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렇게 많은 양의 내장을 끓여낼 만한 큰 냄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핫산에게 ‘정육점에 가서 큰 냄비를 빌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정육점은 시장과 정반대편에 있었습니다. 스승이 시킨 대로 큰 냄비를 빌려 짊어지고 오는 핫산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사원에 도착한 핫산은 급하게 세면장으로 가서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몸을 씻고 나온 핫산을 스승이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핫산아, 지금 당장 시장으로 가거라. 그리고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혹시 등에 짐승의 내장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도록 해라.” 

핫산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혹시 조금 전에 등에 짐승의 내장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거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핫산이 사원으로 돌아오자 스승은 이번에는 정육점 방향으로 가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피로 얼룩진 채 큰 냄비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피로 얼룩진 채 큰 냄비를 들고 가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핫산이 돌아와 이 얘기를 스승에게 전했을 때 스승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아무도 너를 보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너는 사람들이 형편없는 네 모습을 보고 너를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아무도 네 모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만 네 스스로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네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저녁이 되자 스승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모든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마음껏 들어라. 이 스프는 핫산의 자존심과 명예로 만든 스프이니라.”

여러분, 내가 자존심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거나 위대한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만 더 내려놓으십시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지난 한 주 우리는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주님께서 나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내 인간적인 자존심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올 한 해 하나님 앞에 나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내려놓으십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 앞에서조차도 자존심을 내려놓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목사님이 쓴 『작은 소리 주님의 음성 큰 울림』이란 제목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죽어가는 한 원주민 여인을 들쳐 업고 백인의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를 임신한 산모였는데, 몇 주 전부터 앓아누웠는데, 그 부족 사람들이 민간요법으로 그녀를 치료하려 했지만 차도가 없자 의사에게 업고 온 것입니다. 의사의 진찰에 의하면 뱃속의 아이는 맥박이 뛰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태아의 맥박이 뛰지 않았느냐고 묻자 ‘맥박이 뛰지 않은지 이틀이나 지났다’고 말합니다. 이제 아이는 포기하고, 산모를 살려야 했습니다. 잘못하면 뱃속의 그 죽은 아이로 인한 독혈증으로 산모까지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선 뱃속의 죽은 아이를 끄집어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의사는 수술을 준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남편이 수술을 하지 못하게 막아섰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해도 남편은 아내를 자기 마을의 주술사에게 데려가겠노라고 우겨댔습니다. 백인 의사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그 의사는 분통이 터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묘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의사는 그 원주민 남자에게 지금 당신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내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것인지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떠나버렸습니다. 

의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내는 머지않아 통곡하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백인 의사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그런데도 그 먼 곳까지 여행하느라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그리고는 다시 자기 방식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살아가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우리도 한번쯤 생각해 보십시다. 신앙인이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가 하나님께 미소를 드리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겠습니까? 사역의 시작부터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우리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신할 일꾼으로 사십시다. 내 안에 있는 자존심은 결코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사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