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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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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28-44)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신의 탄생을 알리는 방법이 바로 ‘울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해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우는 울음. 
신생아의 울음은 폐를 빨리 확장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갓난아이에게 울음은 언어와 같아서 울음소리를 잘 분석하면 아이의 기분과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피곤할 때, 기저귀가 젖었을 때, 화가 나거나 몹시 아플 때 등등 울음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간혹 본래 성격이 순해서 잘 울지 않는 아이들 가운데는 지능박약으로 그럴 수도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 지능발육에 대한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갓난아이의 울음이 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신호인데 비해 성인의 울음은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해소하는 울음입니다. 대개 여자가 남자보다 우는 빈도도 많고 우는 시간도 네 배나 길다고 하는데. 이는 프로락틴이라는 호르몬이 남자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슬플 때 우는 울음은 기뻐서 우는 것보다 길며,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덜 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울음은 그 감정의 표현에 따라 표현하는 말도 각기 다릅니다. 울음을 나타내는 한자어 ‘체(涕)’는 소리 없이 주르르 흘리는 눈물을 말하며, ‘읍(泣)’은 소리를 내며 흑흑 우는 울음, ‘곡(哭)’은 소리를 크게 내어 엉엉 우는 울음, ‘통(慟)’은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내며 몸부림까지 치는 울음을 말합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다이애나 비가 비명에 횡사하고 장례식이 있던 날 온 섬이 눈물바다였으며, 장례식 이후 한 달 동안 영국 내 정신병원이나 상담소를 찾는 환자수가 예전의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이때 정신건강 관련자들이 모여 이 현상을 ‘다이애나 효과’라고 이름 붙였는데, 우리나라에도 ‘남의 초상집에 와서 자기 설움으로 자기 울음 운다’고 하는 경우가 있듯 남 눈치 볼 것 없이 우는 것으로 그 동안 쌓였던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입니다. 울 때 나오는 눈물은 스트레스의 결과로 만들어진 독성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 데, 양파를 썰 때 나는 눈물에는 이런 성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슬플 때 울지 못하면 우리 몸의 다른 장기가 대신해 웁니다. 즉 슬플 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소리 내어 우는 것은 슬픔을 가슴속에 삭이는 것보다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슬플 때는 후련해질 때까지 소리 내어 우십시오. 그러면 건강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우는 두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와 그와 함께 한 유대인들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는 이유는 각기 다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입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야 자기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맞으며 마르다는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를 받아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미 죽었으니 다시 살아나는 것은 마지막 날 부활 때나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의 생각을 뒤바꿔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말에 마르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집에 남아 있던 마리아를 부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그 말에 슬픔에 잠겨 있던 마리아가 얼른 일어나 예수께 나아갑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뵈옵고 그 발아래 엎드려 이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웁니다. 그걸 보고 함께 온 유대인들 역시 눈물을 훔칩니다. 
처음 마르다도 똑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하나같이 자매의 믿음은 예수님만 계셨더라면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도 귀한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만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니 얼마나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까? 하지만 마리아 역시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믿음이 아니라 보다 앞선 믿음,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에게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아픔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왜 우는지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왜 우는지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 아픔을 무어라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해도 이 땅에서는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순도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워도 마지막 날까지는 아니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는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보통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그건 형제자매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오누이의 정이 각별했다면 그 슬픔은 더할 나위가 없이 클 것입니다. 오랫동안 앓아온 병이라면 그토록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긴 병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 아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보느니 차라리 다시는 아픔도 없는 세상으로 떠나기를 바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긴 병을 앓던 사람이 아닙니다. 긴 병을 앓던 사람이었다면 벌써 예수님께 말씀드려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시기 전에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병은 갑작스러운 병입니다. 갑작스럽게 죽을병이 생긴 것입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황수관 박사처럼이나 급성 질환으로 나사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옆에 계실 때가 아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시고 난 다음에 생긴 일입니다. 서둘러서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께 기별을 하였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벌써 장사재낸지 나흘이나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 더 서럽습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에 더 눈물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쉽고 한편으로는 이왕 오시려면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이제 오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섭섭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라버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한 없이 작아만 지는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죽어가는 데도 그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자기들이 너무 작아만 보여서 또 슬펐을 것입니다. 

하여간 마리아의 눈물은 아쉬움과 슬픔과 절망과 이별의 아픔을 동반한 눈물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같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 것을 믿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당장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파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보면서 조문 왔던 유대인들 역시 같이 웁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그런 말을 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그렇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거기까지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아닙니다. 죽음은 끝이라는 데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현실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막혀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울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결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이요 영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아니 죽으면 어떻게 삽니까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죽습니다. 그런데 영생이라니요? 그렇다면 영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살아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를 내다보며 지금 잠시 있고 없는 것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것을 생각하며 항상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입니다. 
마리아와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마음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너무도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시니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뿐 아니라 유대인들 역시 한 편으로는 원망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는 순간 그들의 마음에 모든 원망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생각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나사로를 사랑하셨던 분이 어찌 그가 죽고 난 다음에야 오셨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사람들이 말 속에 담겨있습니다. 
사실 주님이야말로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슬퍼하는 자와 함께 그 슬픔을 나누는 것은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함께 우는 것입니다. 같이 울어줄 수 있다는 것, 같이 눈물을 흘려준다는 것은 마음의 공감입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함께 통하는 것입니다. 함께 우는 가운데 서러움도 슬픔도 아픔도 다 위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닌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르다에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지만 그들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마르다에게 물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결코 책망하지 않으시고 저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며 그냥 웁니다. 그런 마리아가 너무나도 안쓰럽습니다. 마음에 비통히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그런 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다시 살아날 오라버니를 생각하지 못하고 죽은 오라버니만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는 왜 그렇게 믿음도 없이 울고만 있느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책망하지 않으시고 함께 울어주십니다. 울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엉뚱한 데를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우십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내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그저 살려고 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주님이 우십니다. 그 길로 가면 안 되는데 뻔히 죽음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지 못하고 달음질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주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우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울어주시는 주님의 눈물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우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엉뚱한 데서 헤매며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를 위해 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려 그 주님과 함께 울고 그 주님과 함께 다시 웃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입니다. 
이제 무리들과 함께 무덤으로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이를 보시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가 펄쩍 뜁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나는데요?” 

방금 전에도 예수님의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토를 달다가 주님으로부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한 말씀 들었던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에 토를 달고 있습니다. 우리네 나쁜 버릇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 이건 정말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예’ 하면 됩니다. 

그런데 꼭 이러니 저러니 토를 답니다. 그러면서 궁시랑 댑니다. 아니 그럼 주님이 지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래 예수님이 다시 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 아차 싶어 마르다가 얼른 사람들과 함께 돌을 옮겨 놓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냥 나사로를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은 아들로서의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시지 않습니다. 즉 우리들의 본보기로서 우리 모든 믿는 자들 모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가를 이 기도를 통해서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능력으로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으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 때에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님이 큰 소리로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아 그랬더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습니다.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 그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마치 영화에서 보는 바 강시처럼 나오지 않았을까요? 
다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미 죽음의 돌이 옮겨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 심령에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김을 받았습니다. 한데 생명은 있는데 아직 수족이 동인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는 없지 않습니다.
이 베로 동인 것들은 죽었을 때 무덤에 장사지내기 위하여 세마포로 감싸고 베로 동이고 얼굴에는 수건을 덮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은 자의 모습이 주 안에서 다시 살아난 우리들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마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기는 하였어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기는 하였어도 여전히 베로 동인 채요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는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은 세상에 받을 딛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곧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사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먹고 마시는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도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스트레스가 된다면 이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 유지의 첫째 조건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정신력이나 도덕성까지 멸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일차적 요구라고 말합니다. 굶주리게 되면 도덕성이 없어집니다. 일단 굶주림의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게 됩니다. 사실 너무 굶주리면 신앙마저도 저버리게 됩니다. 온 세상이 그토록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먹는 문제의 확실한 보장입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염려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먹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를 누려야 할 것이요 그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유의 문제입니다. 

넉넉하게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사람이 넉넉히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안식하면서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여전히 2%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조금 갖추었다 싶으면 그때는 종을 부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명예와 권세에 집착합니다. 

사실 명예 싫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소위 부귀영화가 싫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건강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리를 묶고 있는 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풀어놓아 다니게 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준행하십시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건강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자투리 시간을 내어서도 운동을 하십시오.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100배의 복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누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가 하면 십일조와 봉헌물을 주님께 드리는 자들입니다. 심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붕헌물을 드리는 자들에게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까지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주의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능히 채우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치 수족을 베로 동인 것처럼 얼굴을 수건으로 싸맨 것처럼 그렇게 세상과 세상의 있는 것들로 동여져 있고 싸매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끌려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 매여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그런 모습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즐기십시오.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먹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고 먹는 것도 즐기십시오. 먹고 싶은 대로 잡수세요. 대신 그만큼 운동하십시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운동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시간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고 정성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십시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래서 건강도 평화도 물질도 영광도 다 자유롭게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는 인생의 말년에 암에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새 출발의 정신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암과 투병하면서도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았습니다. 험프리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역경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극일 뿐이다. 역경은 ‘약간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는 문제’일 뿐이다. 사람들은 예배 때 축도만을 기다린다. 개회예배의 가슴 설레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고별연설을 한 적이 없다"

새 출발은 항상 장엄합니다. 새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창공을 날 때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도 아닙니다. 새가 창공을 날기 위해 깃을 활짝 펼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돛단배가 먼 바다에 출항하기 위해 돛을 활짝 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출발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시작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말씀은 “왜 울고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은 책망이 아닙니다. 격려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새 출발의 선언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들이요 기쁨으로 섬기며 사랑으로 하나 되심으로 모든 역사와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여나가도록 항상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즐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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