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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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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연초가 되면 개인도 단체도 국가도 모두 새해에 대한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표를 세워봤자 지켜지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니 소용없는 일이다. 마음만 더 산란해진다.” 특별히 어떤 나쁜 습관에 대한 정리를 목표로 하면 더 안 된다고 합니다. “나는 새해부터 술을 끊겠다.” “담배를 끊겠다.” “도박을 안 하겠다.” 이런 목표를 세우는데 언제나 답은 똑같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러면 아예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더 좋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잘 안 지켜져도 목표는 세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목표는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한 목표를 내 머리에 자꾸만 입력시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효과가 있는 작동을 하도록 우리 뇌의 구조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9번 실패했어도 한 번의 성공을 위해서 목표를 세우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선한 결심이 자꾸만 무너지는가? 이것도 심리적으로 작용을 하는데 과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여태까지 했던 일인데 결심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이런 심리 작용이 나로 하여금 그 길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평생 하던 일을 이제 끊어봤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런 체념적 심리작용이 언제나 나에게 장애물이 되고 방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바울 사도는 뭐라고 합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바보같이 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뒤에 것에 구애받지 말고 오늘이 그 시작이라는 새로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두 가지 반응이 언제나 나타납니다. 과거가 너무 화려했던 사람도 그것이 방해가 됩니다. 너무 과거에 좋았던 기억이 오늘을 좌절하게 만드는 영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명심이나 아니면 명예심에 집착한 나머지 현재 위치를 비하하는 일들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누구였는데 지금 이런 일이나 하고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아마 우리가 외국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카터 대통령은 지금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 성경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합니다.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소문난 미국 목사님이 한분 계신데 선교사로 20년 살았습니다. 아주 잘했습니다. 돌아와서는 그를 후원하던 교회에 마침 담임 목사가 안 계셔서 담임 목사님을 하라고 해서 허락하고 얼마 담임목사로 사역하더니 그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물었더니 “그냥 교인으로 살아보겠습니다.” 목사님이 장로교회에 계셨었는데 “그러면 이 교회 장로로 계십시오.” 1년 하시더니 “장로로 못하겠습니다. 장로 하다가 싸움만 나고 마음만 불편해지고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뭐하실 겁니까?” “집사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집사를 하더니 “이것은 천사의 직분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평생 집사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까지 집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괜히 교회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면 의견 충돌이 일어날 경우 마음이 불편해지고 어떨 때는 잠을 못 자는데 이 집사는 봉사만 하면 되니까 정말 좋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 별명이 천사 집사입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대구에서 큰 대형 교회 목회하셨고 미국 오셔서도 목회를 잘하신, 저와 친구라면 친구이신데 김상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저보다 7~8년 나이가 위이십니다. 아주 덕망이 있으신데 그분의 특징은 평생 화를 안내십니다. 화 안내시기로 아예 작정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화를 내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화 안내시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셨습니다. “이제 뭐 하실 겁니까?” 자기 후배 목사 교회에 가셔서 베이스 파트에서 성가대 하십니다. 제가 그 교회 부흥회를 하러 갔다가 그분을 만나서 성가대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늘나라 주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어려운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과거 자랑을 하도 많이 하니까 “누구든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더욱 그러하다. 나도 과거를 한번 들춰내겠다.” 그러면서 쭉 말했습니다. “나는 8일 할례자요” 유대인은 8일 할례자만 출세합니다. 중간 할례자들은 취급도 못 받습니다. 할례 없는 사람이나 중간 할례자는 그 사회에서 사람 이하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입니다. 8일 할례자만이 절대 평가 받고 신분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족속이요.” 유대인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순수 국적이 아닌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것을 지독하게 따지는 사람이 유대인들입니다. “나는 순수 국적이요 베냐민 지파요” 이것은 왕손이란 말입니다.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혈통이 순종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이스라엘 선교사 제이 목사는 지금 이스라엘에 가서 제일 겪는 고통이 뭐냐고 물었더니 “너는 왜 유대인이 한국 여자와 결혼했느냐?” 이게 제일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물으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무척 따집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만을 평가를 받습니다. 여러분! 이삭도 이스마엘도 다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복형제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른 본처와 후처의 자손이라고 하는 그 문제 때문에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바리새인이요” 복음서에 왜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그렇게 의견 충돌이 많았는가?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아는 게 많습니다. 누구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아는 체 못합니다. 우수성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했습니다. 최고 명문대학 출신이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입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최고의 국가 법적 기구 회원이 되었고 최고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거를 다 들춰내고 마지막에 하는 말 “나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 똥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화려했던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래야 앞을 향해서 갈 수 있다. 나의 현재 크리스찬 삶에 지장을 주고 있는 과거는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나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이게 크리스찬의 삶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반대로 과거에 죄를 많이 진 경험이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도 암흑가 주먹 출신들이 얼마든지 있고 북한 공산당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반공포로로 석방되는 바람에 잡혀 있다가 살아난 사람 가운데 제 주변에만 해도 목사가 세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형당할 입장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부흥사로 잘 나가는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다른 분야의 세상의 많은 직업들은 과거가 험악하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나쁜 점수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국회에서 청문회 하는 것을 보십시오. “과거에 당신은 이런 것이 있었다, 저런 것이 있었다.” 하면서 별것을 다 끄집어내서 밝혀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떤 때는 과거가 험악할수록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과거를 잊어라.” 이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 앞에서는 “뒤의 것은 잊어버리라.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가라.” 지금 이렇게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큰 이유는 목표를 잘못 세웠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National Association For Mental Health”라고 하는 “정신건강협회”라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발표한 것 가운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안내가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있는데, 첫째는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해봤자 나 같은 놈은 안 돼!’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안 된다고 합니다.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자살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뇌에 자꾸 입력되기 때문에 그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람 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답니다. 자기가 말하는 대로 나를 인도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조건들이 넉넉히 있는데도 불행 요소들을 자꾸 기억하려고 하면 구제불능적 사람이 됩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복하게 사는 둘째 비결이 자기 평가를 현실적으로 해서 목표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 같은 목사는 목사의 행복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목사가 재벌을 목표를 정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같은 목사끼리도 절대 남과 비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을 생각하면 별안간 내가 초라해지더라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그 사람이 행복합니다. 남의 부인 아무리 예뻐 봤자 제 아내만 못하단 말입니다. 이것을 자유함이라고 합니다. 이 자유함이 없는 사람은 별것을 다 마련해 주어도 늘 불평만 합니다.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니는 우리 갈보리교회 참 행복하다.’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항상 다른 교회 우수한 점을 들어서 불평하는 교인 많습니다. 그 사람은 그 교회에 가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어디 가도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통계로 보면 미인과 사는 남자들이 바람을 더 핀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연예인들은 왜 이혼율이 그렇게 높습니까?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는데도 오래 못살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삶의 현장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살면 넉넉히 성취할 수 있고 행복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성경말씀에 바울은 무엇이 목표였는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본래 바울 사도의 인생 목표가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철학자요 역사가인 알렉산드리아 필로라는 인물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되는 것이 그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헬라 철학에 능통해야 되기 때문에 헬라 철학을 공부했고, 종교적으로는 율법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율법학교를 다 마쳤고, 바리새인이 되었고, 그런 조건들이 다 구비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와 유대의 인정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유대 교회에 충성하고 로마에 충성하기 위해서 스데반을 돌로 때려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서 옥에 가두고 “나같이 열정이 있느냐?” 온 천하에 최고의 열정이 있는 사람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그 일을 더 확대하기 위해서 이웃 나라 다메섹까지 진출하다가 길바닥에서 예수님께 잡혔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잡힌바 되어서 예수님이 그를 잡은 목표인 세계 선교에 쓰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소원은 달라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하신 그 자체가 나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나는 좇아갑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자기 삶의 목표를 새로 정합니다.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니라.” 이렇게 목표를 정하고 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목표가 두 가지입니다. 1차적인 목표가 있고 2차적인 목표가 있는데, 1차적인 목표는 다 똑같고 2차적인 목표는 다 다릅니다. 1차적인 목표로 다 똑같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내가 살아가겠다.” 이 1차적인 목표는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2차적인 목표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삶의 목표를 현실적으로 적응시키려면 손해가 난다는 판단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대로 살았다가는 괜히 손해난다. 돈 손해나고 시간 손해나고 인격 손해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절대 손해가 안 납니다. 1899년에 어떤 사람이 콜로라도 롱먼트에 고기 집을 하나 내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믿음 좋은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 집을 내놓고 파니까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고깃간을 유지하려면 자기 신앙에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을 해야 유지가 되는 그런 상황이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날에는 자기 신앙으로 봐서는 문을 닫아야 되는데 주일날 고객이 가장 많이 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하지만 내 신앙대로 살아야겠다.’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여보시오. 당신은 이 동네 와서 이제 거지 되겠소. 당신이 하는 일을 보니까 망할 짓만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사업이 된단 말이오? 이 어려운 세상에 손님이 토요일, 주일에 많이 찾아오는데 교회 봉사한다고 토요일에 문 닫고, 주일에 문 닫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에 반대되는 일이 자꾸 생기니까 끝까지 고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의 예언대로 망해버렸습니다. 돈 한 푼도 없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거 보시오. 우리도 하나님 믿고 살지만 당신처럼 하나님 믿어가지고 누가 살겠소? 하나님도 당신 같은 사람은 도와주실 마음이 없을 거요. 현실에 적응하고 맞추셔야지….” 그래서 동네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필요 없소.” 그러면 그가 그렇게 신앙으로 지켰다는 자부심은 무엇입니까? 

그가 고집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신앙 일차적으로 정하고 내가 살아야지.” 그러니까 사업 성공을 목표로 정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자유함을 목표로 정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그 이름이 점점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사업가가 되어서 1971년에 95세로 죽었습니다. 그때 계산해보니까 미국 전역에 그의 상점, 백화점 1660개 점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10대 크리스찬 기업가 중의 하나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제이 시 페니(J. C. Penney)입니다. 우리나라도 무척 많이 도와준 사람입니다. 신학교에 장학금도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 해 교회 표어를 “중단 없는 순례 공동체”라고 정했습니다. 지금 와서 결산을 내니까 우리 갈보리교회는 지난 10년 동안 영혼을 찾아 헤매는 지구촌의 순례자 같이 살았다고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더 이 교회가 중단하지 말고 그대로 이 표어대로 10년 또 가라고 제가 금년의 표어를 10년 전 것으로 정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주어지는 아름다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은 다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구체적 사역자로 제일 먼저 부르신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역사 신학에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를 선택하자마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첫 번째 주신 사명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나그네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로 평생 살았습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 영적 축복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팥죽 한 그릇 사건 때문에 나그네로 평생 또 살았습니다. 

요셉은 17살에 고향을 떠났는데 110세가 되도록 나그네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히브리 민족은 끝없는 나그네, 바벨로니아에서 70년 나그네 생활, 애굽에서 440년 나그네 생활, 근래 역사의 1500년 동안 방황한 나그네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전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유대 민족은 언제나 본국에서 사는 숫자보다 외국에서 사는 숫자가 훨씬 더 많은 민족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아브라함의 혈통이 420만이요 귀화 민족이 80만이라고 해서 500만 이스라엘 인구가 되는데 해외에 사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에만도 유대인이 620만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에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인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신약 사도 시대에 와서 똑같은 순례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서 예수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다 순례자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디아스포라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순례자로 만드십니까? 나그네가 되어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 당시 남쪽은 애굽 문명이 있었고, 동쪽으로 연결된 끝없는 대륙과 지중해 해상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의 중심지라서 온 세계 사람이 드나드는 장소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애굽의 장사꾼이 거기 왔다가 요셉을 인신매매해서 은 20세겔에 사가지고 가는 모습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곳에 아브라함을 세웠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불빛 하나를 세계인이 오고가는 그 중심에 하나 세워놓음으로 말미암아 오고가는 수없이 많은 세계인에게 그 신앙의 불빛을 보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나그네로 살게 하신 이유 가운데 이 땅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본향으로 돌아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이 땅에서는 누구든지 외국인과 같은 심정으로,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순례자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너무 튼튼하게, 이 세상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내 주변을 마련해도 우리는 언제나 미완성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 향해서 본향을 향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가 “이 세상 나그네 길” 찬송을 불러주었지 않습니까? 토인비 박사가 말한 대로 이 세상의 모든 문명은 종교를 기초로 이루어졌습니다. 인도 문명은 힌두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중국은 유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회교 문명은 이슬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애굽 문명은 아문 신종교 때문에 기초가 되어서 생긴 것이고, 서구 문명은 절대 기독교입니다. 인류 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헬라 문명과 로마 문명인데 그 문명들은 다신교적 종교 의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문명도 일본의 신도와 불교의 합작품입니다. 그러면 한국 문명과 문화는 뭐가 기초입니까? 무당종교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종교가 마지막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무당화 되는 것입니다. 지난 200년 동안 한국 기독교는 그 문제의 정리 때문에 수많은 갈등을 겪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 21세기 한국 교회가 가야될 목표가 어디입니까? 바로 기독교 문명과 문화의 확실한 정착이라고 생각하고 가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계의 확실한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이단들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번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단들이 한국에서 이렇게 잘됩니까? 바로 한국 종교인의 모든 기초가 무당 종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춤을 잘 추는 무당 같은 사람이 그럴 듯한 주문을 하나 작성하면 사람들이 비판도 하지 않고 우르르 몰려갑니다. 지금 대한민국만 해도 내가 재림 예수라고 춤을 추는 교주들이 수십 명 있는데 하나같이 다 잘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유일신과의 이해 부족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무당 종교는 다신교로 뭐든지 신개념을 두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무당 종교는 다신교 개념입니다. “어떤 것도 신 개념을 둘 수 있다.” 그게 힌두교나 무당 종교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기독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분 밖에 안 계신 유일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무당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다신교 개념들이 우리나라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의 메시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 바로 우리 교회는 그것을 푯대로 정하고 요즘 번성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 같은 것을 절대 배격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메시야요 구세주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교회 일을 고백하고 주님의 진리대로 섬겨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언론에까지 자꾸만 거론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형교회 세습화 문제입니다. “마치 교회를 자신의 기업처럼 성장시켜서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훌륭한 일이냐?” 심심찮게 비판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감리교단에서 세습방지법을 총회에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비판해 보십시오. 외국에서는 세습이 오히려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그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도 오랄 로버트 목사, 로버트 슐러 모두 다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절대 비판 거리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외국은 세습이 악습이 된 문화가 아닙니다. 세습이 더 아름다운 문화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습이 악습이 된 문화였기 때문에 이것이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에 왕 세습 문화라서 비록 나이가 10살 밖에 안 된 어린애라도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라를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국민이 다 겪어야 되는 문화에서 우리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 이 세습은 악습이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강한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한이 세습 왕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세습을 악습으로 보는 문화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예수로 정하고 모든 일에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결정을 해야 그것이 살아있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2013년도 1년도 우리 모두는 주님을 푯대로 바라보면서 이 한해에 우리에게 또 주어진 이 역사적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 갈보리교회 모든 교우님들 가정에 하나님의 세밀하신 보호와 관심이 있어지기를 기도하고 성도 여러분! 우리 일 년 동안도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2013년도 첫 주일을 저희들이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이 해에 “오직 푯대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푯대 위에 다른 어떤 목표도 있지 않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역사에 계속해서 쓰임 받는 우리 갈보리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영혼을 찾아 헤매는 지구촌의 순례자로서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우리 갈보리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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