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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아름다운 열매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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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아름다운 열매 (창 4:1-15)


아주 우정이 두터운 세 친구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아주 큰 금덩어리 하나를 주웠습니다. 셋이서 공평하게 나누자는 의견에 일치했고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시며 즐기기 위해 한 친구가 술을 사러갔습니다. 그런데 술을 사 오다가 생각을 합니다. ‘저 두 친구만 없으면 저 금덩어리는 내 것이 될 텐데...’ 욕심이 생겨서 술에다 독약을 탔습니다. 한편 친구가 술을 사러간 동안에 두 친구는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셋 보다 둘이 나눠 가지는 게 훨씬 더 많으니까 저 친구를 없애버리자.” 합의 하고 술 사러갔던 친구가 들어오자마자 그만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친구가 사온 술을 둘이서 나눠 마시며 자축했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셋 다 죽고 말았습니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때로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릴 때가 있습니다. 생각의 자유도, 판단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행동의 자유마저도 일순간에 앗아가 버리는 것이 무서운 욕망입니다. 
인간이 가장 듣기 싫어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며 깨끗이 잊은 채로 살고 싶어 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주제와 죄라고 하는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은 가장 가까이 있고 어쩌면 영원히 멀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식조차하기 싫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죄는 자기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경각의 자세가 있습니다. 바로 신전의식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내가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의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행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 있는 우리들에게 원하는 게 있습니다. 자기들과는 무언가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예배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무안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상식적으로도 예배를 드리면서 뭔가가 달라지고 나아지고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그래서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니 예배를 드리면서도 더욱 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성경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왜 이토록 교회도 많고, 예배도 많은데 불구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세상에 죄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왜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답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첫 아들 가인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고 큰 소망을 품었습니다. “해산하는 고통을 주겠다.” 는 말씀을 듣긴 했어도 정말 고통을 겪으며 얻은 아들인 만큼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여자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쁜 아이를 보면 그 아픔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처럼 하와도 그 아픔을 겪으면서도 둘째 아들 아벨까지 낳게 되고 잠시나마 행복하게 자식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 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죄는 먼저 형이 아우를 미워함으로 무서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은 급격하게 퍼져나가서 노아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피 흘리는 것을 예삿일로 여기며 온 땅을 피로 물들일 정도로 수 없는 살인이 일어나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 과정 속에 결정적인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제사문제였습니다. 즉 예배의 문제가 그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사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배라는 형식자체만으로 무조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을 향해서 호된 책망이 나옵니다. “누가 너희에게 여기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느냐? 누가 너희에게 여기 와서 땅을 밟게 했느냐? 이런 제사는 절대 드리지 말라!” 
오늘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사의 성격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인에게도 아벨에게도 종교성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본성은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께서 곡식을 많이 추수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 감사한다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본성에 따라서 드린 제사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주일이니까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이고, 예배를 드려야 되는 수요일이니까 교회에 간다는 종교적 본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를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죄를 아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그 짐승의 기름을 태우는 행위 속에는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중요한 행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중심의 차이입니다. 사실 외형적으로 준비하는 것만 생각해도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다.” 는 것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는 기록상으로 느껴지는 정성도 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이런 표현도 역시 그 중심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 히 11:4절에 보면 이 부분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다만 내 의를 나타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과 나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이 믿음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제사냐 그렇지 못한 제사냐는 본인이 먼저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예배드리기 싫은 마음으로 억지로 나왔더라도 자기의 마음이 달라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뭔가가 새로워 졌구나!’ 라는 자기 느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아벨은 이런 의미의 제사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제사를 드리고도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다는 아무런 증거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변화도 없었습니다. 제사 전에 가지고 있었던 분노 그대로이든지, 아니면 제사 후에 생겨난 분노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제사입니다. 감동도 없고 죄 사함도 없습니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제사가 가인의 제사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변해야 됩니다. 기뻐야 됩니다. 내 욕망이 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오늘 이 예배에서 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망한다.” 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대로였습니다. 제사를 통하여 자신의 인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얼굴을 들지 않고 다녔습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면야 양심이나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항의요 시위였습니다. 이게 얼마나 비뚤어진 모습입니까?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중에 뛰어난 것이 있다면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바꿀 수 있고, 잘된 것은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사그라지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 전에는 얼굴빛이 잿빛이었다가도 예배가 끝나면 얼굴 표정이 밝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 전에 실컷 싸우다가 잠시 휴전하면서 “예배 끝나고 보자!” 그러고 또 싸우면 안 됩니다. 예배는 용서이고, 예배는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동생을 찾아가서 “나의 제사는 하나님이 안 받으셨는데 너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받으셨냐? 그 좋은 길을 좀 가르쳐 주라.” 묻고 동생이 “형님,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화목하게 협력해서 제사를 드렸더라면 하나님이 받았을 것이고, 두 사람 다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왜 가인은 아벨이 죽어야 된다는 어리석고도 무서운 생각을 했는지 안타깝지 않습니까? 세상에 죽어야 되고, 죽여서 해결된다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인은 잘못 생각했습니다. 자신과 동생 아벨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제사의 문제, 예배의 문제였지 아벨과의 문제는 아니었단 말입니다. 믿음의 예배가 우선입니다. 2013년 올해 여러분들은 꼭 예배에 성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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