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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로 오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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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오라 (마 11:28-30)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하나만 바꾸면 김태희처럼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내가 ‘그게 뭐냐. 말해 달라. 내가 바꾸겠다.’ 그랬더니 이름을 바꾸면 된대요. 그 얘기를 듣고 다른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하나만 바꾸면 김태희처럼 될 수 있다.’ ‘그게 뭔데?’ ‘얼굴!’ 병 주고 약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약을 주고 병을 주는 것입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도 병 주고 약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공부함으로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게 아니고 불편해 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편해진 다음에야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진실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외면하는 진리를 직면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고만 말씀하셨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어려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다마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 말씀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 너희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시도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목사들이 더 이 문제가 심합니다. 목사들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지릅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을 편안한 수준으로 낮춥니다. 아마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어려우면 따르기가 불편하니까 편안한 수준으로 예수님을 낮추고 그리고 두 번째 실수는 교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쉽고 단순한 패키지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면을 부각시키고 불편해할만한 것을 축소시키고 마케팅 전략 세우는 것처럼 잘 팔릴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중화될수록 그것이 심합니다. 대형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가르침으로 대형교회가 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 잘 팔리는 면만을 강조하고 안 팔릴 것은 창고에 쌓아두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창고에 재고가 넘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쉽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년전 유니온 신학교 서점에 갔을 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대한 책을 한권 샀는데 수십 명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저마다 산상수훈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정리한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불트만 · 볼트만 · 칼 바르트 · 슈바이처 수많은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쓴 글을 모아놓았는데 저마다 견해가 달라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지를 않나, 어떤 이들은 산상수훈이 우리가 이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을 더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를 않나, 어떤 이들은 아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된다, 

이렇게 고수하지 않나, 어떤 이들은 우리가 그대로 다 살수는 없더라도 목표로 삼아 근처라도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저는 그 책을 읽고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그러면 내가 성도들에게 뭐라고 가르쳐야 되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느냐, 지킬 수 없다고 가르치느냐 지킬 수 있다고 가르치느냐, 난감한 것입니다. 

아마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설교가들을 여러분은 많이 접하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병 주고 약주는 것이 된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은 사람은 성경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는 만큼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질문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기는 게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누가 나를 너희 재산 나누는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제자들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적으니이까, 주께서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니이까, 어느 계명이 제일 크니이까,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크니이까.’ 제자들도 예수님께 질문을 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질문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경외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을 할 수 있고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제 기도를 엿듣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아마 그걸 듣는 분이 계시면 경악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못마땅한 사연을 많이 아룁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하소연을 하나님에게 합니다. 못마땅한 내용 · 불만 · 의문 · 제 인생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신앙생활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남이 말해줄 수 없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거기에 대한 답변을 얻게 하십니다. 제가 기도할 때 소리를 내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제 음성을 통해서 기도를 인도하시고 때로는 말씀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묵상기도를 더 많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성경말씀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 것처럼 사람이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서 말할 때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시간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또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제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만 기도할 때 남이 듣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막고 기도합니다. 그렇잖아요. 사람이 들으면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이건 신앙생활의 단순한 지혜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했지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 이런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는데 그래서 지난주일 이후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제부터 성도들에게 강해를 해야 되느냐. 그러다가 그게 병 주고 약주는 것이 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먼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타종교 지도자들과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면입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내게 배워라, 내 말을 배워라, 이렇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먼저 내게 오라, 다 내게로 오라 – come to me 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으로의 초청이요, 예배로의 초청이요, 믿음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내게 배우라고만 말씀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유교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무미건조한 윤리와 철학을 말하는 종교가 되었을 것인데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영성이 가능하고 영적인 예배와 인격적인 만남과 예수님과의 동행과 예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것은 많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에요.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하여 아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을 압니다. 그 자녀의 생각 · 느낌 · 소원 · 상처 · 인격 이것을 압니다. 알지 못한다면 부모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하나님의 속성 · 사랑 · 의지 · 능력 이것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게 오라고 초청하신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으로의 부르심이에요. 이것이 신앙생활의 영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두 가지가 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만을 강조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샤머니즘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진리가 골격을 제공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영성이 있고 감동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감정적인, 영적인, 인격적인 요소가 추가돼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말씀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라고 하신 게 아니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다 알지 못하고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님과의 사귐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오라고 초청하셨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요한복음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하여 다른 시대에 다른 곳에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머리를 맞댄 것처럼 일치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보면 이건 성령의 영감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은 원리에요.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마찬가지로 요한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일은 뻔합니다. 사람들 보면 거기가 거깁니다. 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그 고민이 그 고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만을 쳐다보면 갑갑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본주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람을 쳐다보면 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저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도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이느냐.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느냐. 물어보고 싶어요. 사람을 알면 사람이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것이 도피가 아닌 이유는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의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의 말씀을 배울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이요 선택이요 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예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는 내게로 오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십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을 다 이루실 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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