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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날 계수할 지혜를 주옵소서 (시 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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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날 계수할 지혜를 주옵소서 (시 90:1-12)

 
저는 학생 때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탁구를 많이 쳤습니다. 학교에 탁구대는 한정이 있고 탁구를 치려는 학생은 많으니 자연 게임을 해서 지는 사람은 탈락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좋아하는 탁구를 오래 치려면 게임에서 지지 않고 계속 이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지는 수가 있어서 다시 제 순서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생들끼리의 게임에서 저는 주로 잘 이기는 편이어서 내가 치고 싶을 만큼 치다가 운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재미있고, 게임에서 지는 것은 재미없습니다. 물론 인생을 너무 게임처럼 생각해서 승부에 몰두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경쟁 일변도의 삶을 살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라는 게임이라고 이해하면 문제가 되지만 스스로와의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인생을 아주 재미있고 또 중요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당신의 인생을 게임처럼 승부하시고 그리고 그 인생의 경기와 게임에서 승리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게임과 경기에서 패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경주와 게임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생의 게임이 끝난 후 패배하고 나서 그때 이렇게 했었으면 좋았을 껄 하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운동이나 게임에서도 승리한 후의 쾌감이 만만치 않은데 짧지 않은 긴 인생을 다 산 후 예수님처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쾌감과 만족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누가 혹시 김 목사는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인생이라고 하는 경주와 게임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려고 예수를 믿는다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그 지혜를 실행하는 능력입니다. 탁구를 잘 치기 위해서 탁구를 배워야 합니다. 무조건 치기만 하면 실력이 느는 줄 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늘기는 느는데 더디 늘고 느는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탁구의 이론을 알아야 하고 이치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론과 이치를 안다고해서 당장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게 된 것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하여 정말 피나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는 것을 근육이 알 때까지 수도 없는 반복을 통해서 그것을 훈련하고 연습해야만 합니다. 저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지혜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요한 지혜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는 ‘우리 날 계수할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 3장 1절에도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때가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와 기한을 아는 지혜가 인생을 승리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지혜 중의 지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삶의 능력을 가지고 매우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놓침으로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높은 산을 등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와 같은 등정에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성공에 도취하여 너무 오래 그 정상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내려 올 때를 놓쳐 하산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등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 올 때가 위험한 법입니다. 대개 보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올라간 정상에서 저들이 머무르는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복한 순간 그 정복을 포기하고 다시 내려옵니다. 정복은 머뭄에서 완성되지 않고 내려옴에서 완성됩니다. 아무리 성공적으로 올라갔다고 해도 무사히 내려오지 못한다면 결국 실패입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지난 해 또 다시 세습반대 운동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세습반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저는 대형교회에서 시작하여 미자립교회를 제외 한 안정된 대부분의 교회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담임목사 세습이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오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합법과 절차를 위장하지만 그것은 공정성을 상실한 위법이며, 기독교의 정신과 수준을 땅에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는 수준 낮은 부끄러운 행위입니다. 삼대 째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 그것이 옳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라고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북한은 삼대 세습으로 말미암이 세계로부터 정치 후진국으로 치부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교회가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선교의 문은 결국 닫히게 되고 우리 한국 교회는 결국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왜 목회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려오고 싶지 않은 정상을 밟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바쳐서 헌신하고 수고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목회적인 성공을 하게 되자 그 성공이 주는 열매가 너무 크고 달아서 그곳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승리와 성공의 장소이지만 그러나 그곳은 또한 죽음의 장소입니다. 정상을 정복한 산악인이 잠깐 머물러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곳은 그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 성공과 승리는 죽음의 덫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 덫에 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덫에 걸리면 저도 죽고 제 자식도 죽고 우리 교회도 죽고 한국 교회도 죽게 됩니다. 세상에는 정상에서 죽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정상이 죽음의 자리라고 아예 올라가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올라가려고 하다가 포기하고는 안 올라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정상에 오르려 하는 것 조차를 부인하고 부정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정과 부인을 넘어 그것을 죄악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정복해야 할 정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정상을 위하여 자신을 극기하며 오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그것을 통하여 정상을 정복함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 일들을 통하여 자신도 발전하고 세상도 발전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내려옴입니다. 올라가는 것도 아름답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정상을 정복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것에 미련 갖지 않고 내려놓는 것은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정말 인생이라고 하는 경기와 게임에서 통쾌한 승리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밑바닥과 내려옴은 모양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밑바닥에는 고지가 없습니다. 고지를 얻기 위한 치열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려옴에는 고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흘렸던 눈물과 땀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있기에 내려놓음은 의미가 있고 내려옴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 올 때가 있습니다. 올라 갈 때는 올라가야 합니다. 내려올 때는 내려와야 합니다. 그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자주 설교 중에 예화로 사용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려서 돈 줍는 꿈을 자주 꾸었었습니다. 가난하여 용돈이 궁하다보니 그런 꿈을 자주 꾸었나 봅니다. 그런데 돈을 주을 때는 기분이 너무 너무 좋은데 그러다 꿈이 깨면 세상에 억울하기가 그 보다 더 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꿈이 돈 줍다 깨는 꿈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에는 하도 속이 상해서 꿈을 깬 후 성질을 부리며 울었었습니다.
 
이런 억울하고 속상한 꿈을 주기적으로 꾸다가 어느 날 하도 약이 올라서 생각했습니다. ‘다음에 또 돈 줍는 꿈을 꾸게 되거든 절반만 줍고 가게로 뛰어야지. 줍다가 깨지 말고 가게 가서 사먹다가가 깨어야지.’ 다음에 또 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정말 절반만 줍고 가게로 뛰어가 제가 먹고 싶은 것 사 먹다가 깨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통쾌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특히 제 아내는 저축의 도사입니다. 저도 제법 돈 아끼는 거 잘합니다. 저는 해외 나갈 때 휴대전화 로밍 안 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제 수입과 경제수준을 생각하면 그 로밍 비용은 제게 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그렇게 부담스럽습니다.
 
어제 밤에 운동을 나갔다가 혈당이 떨어지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럴 땐 급히 무얼 먹어야 합니다. 그럴 때를 위하여 운동 할 때 입는 옷에 천 원 짜리 몇 개를 가지고 다닙니다. 어제는 외대 운동장을 돌았는데 근처에 유명 제과점과 그렇지 않은 제과점이 있었습니다. 운동하다가 혈당이 떨어질 때 제가 주로 먹는 것이 단팥빵입니다. 유명 제과점의 단팥빵과 그렇지 않은 제과점의 단팥빵 값은 200원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제 200원 싼 단팥빵을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어제도 혼자 웃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저축이 쉬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목사로서는 모으기 쉽지 않은 돈을 저축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어려서의 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어라고 저축만 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가게로 뜁니다. 그리고 큰 돈을 씁니다. 제가 200원 싼 단팥빵을 먹는 이유는 그렇게 작은 돈을 모았다가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몫돈을 쓰기 위함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가치 있는 일은 헌금과 구제하는 비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스스로를 위해서도 쓴다는 말씀입니다. 휴대폰 로밍도 못하고 단팥빵 200원도 따져 아끼지만 때론 큰 돈 저와 자녀들을 위해 잘 씁니다.
 
저는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모으는 것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고 돈을 쓰는 것은 산을 내려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모아 그것이 몫 돈이 되고 어느 정도 큰 재산이 되면 그것이 주는 쾌감이 있습니다. 일종의 정복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산의 정상과 같아서 너무 즐기다보면 위험합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게로 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축해서 모은 몫 돈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쓴다면 그것은 내려옴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려놓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돈을 가르쳤습니다. 말로 가르치지 않고 부족하지만 생활과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돈에는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돈에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제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가 다 제 몫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돈 속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고, 가난한 자의 몫이 있습니다.

그 몫을 떼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저는 그 몫을 떼는 것이 하산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제 생명이 걸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마땅히, 당연히,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돈이 좋다고, 그게 다 내것이라고 주장하고 거기 머물면 사람은 누구나 다 거기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었고 그리고 지금 거기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올라간 정상에서 등산가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하산을 하는 까닭은 시간 때문입니다. 내려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이 무한정이라면 저들은 아마 조금 더, 아니 훨씬 더 많이 정상에서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에도 등산이 있고 하산이 있습니다. 재산과 돈에도 등산이 있고 하산이 있습니다. 등산을 해야하는 때가 있고, 하산을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50이 넘으면서부터 부족하지만 목회의 하산을 생각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하산 중입니다. 하산이 생각 밖에 즐겁습니다. 죽기 살기로 올라간 산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내려오는 하산 길이 등산 못지 않게 의미 있습니다. 아니 훨씬 더 의미있고 재미있습니다.

저는 로밍 잘 못하고, 200원 빵 값 저울 질 하며 모은 돈과 재산에서도 하산을 감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올해로 63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에 10절의 말씀이 참 정확하게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아멘.

요즘 보통 분들은 이 말씀이 그렇게 실감이 나지는 않으실 겁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 수명이 퍽 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의 연수를 칩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팔십을 강건한 자의 장수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자신이 없습니다. 오랜 당뇨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관리를 잘 하여 강건하면 팔십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 조급합니다.

저는 저의 남은 날이 얼마 길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맞추어 잘 하산 하고 싶습니다. 저는 청년 때 내설악에서 길을 잃어 하마트면 죽을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하산에 성공하였습니다. 제가 산을 무사히 내려왔을 때는 이미 어두어졌을 때였습니다. 아마 10분, 20분만 늦었어도 저는 산에서 죽었을 겁니다.

내려오는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시간에 맞추어 내려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하산 하는 김에 시간까지 잘 맞추고 싶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려오고 싶지 않은 인생의 정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재산이든 자리이든. 그리고 아직도 좀 더 머물러도 될 것 같은 생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머물면 죽습니다. 여러분이 머물고 싶은 지금의 그 자리가 여러분의 덫이라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내려가도 시간에 맞추어 성공적인 하산을 하실 수 있을는지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남은 날 계수할 지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위기감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그리고 계속 머물고 싶어하는 그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 오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경기도 등산과 같아서 진정한 승리와 성공은 오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옴에서 이루어진다는것과 완벽한 하산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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