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능한 하나님 (창 17:1-8)

첨부 1


전능한 하나님 (창 17:1-8)


I.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지금의 서울노회 예능교회가 처음 설립될땐 연예인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시작한 고 하용조 목사님이 당시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약엔 할머니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고, 신약엔 처녀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습니다」하고 동정녀 탄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젊은 한 연예인이 그게 말이 되느냐? 그걸 어떻게 믿느냐? 
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때 당시 평신도였던 구봉서 장로님 왈 “야 임마 지서방. 요셉이 믿었다는데 니가 왜 난리야.”그래서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 젊은이는 웃다가 하나님을 믿었더랍니다.

오늘설교 제목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입니다.
서양 속담에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는 언제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엘 샤다이 - 전능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세기 아브라함 기사에서 아브라함의 나이를 알려주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2장 4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자식을 주겠다. 기업을 주겠다” 약속하셨지만 10년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꾀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요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 본문 앞 구절 16장 마지막절에 기록되어져 있고 한 절을 뛰어넘어 본문 17장 1절에서는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고 시작합니다.
16장 16절과 17장 1절 - 한절 사이에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지 24년, 침묵의 세월 13년이 지난 어느날 왜 문득 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까요? 
이 순간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자녀생산에 관한한 그들의 육체는 죽은 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9)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아내 사라는 89세, 경수가 끊어져 아기를 갖기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까지를 기다리신 것이었습니다. 낳을 만해서 이삭이 태어났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들 이삭은 인간이 낳을 수 있어서 낳은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약속의 아들입니다. 기적의 아들입니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은 “하나님” 혹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17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 -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샤다이는 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한 하나님 - 엘 샤다이를 만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이 땅에서 엘 샤다이를 만나야 할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날 나무 그늘아래에서 아브라함은 이런 독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24년전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더니 내 나이 99세 나는 이제 죽은 몸이다. 내 아내 사라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다. 인간적으로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다. 사라와 나 사이에 자식을 얻겠다는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완전 절망이다.” 

바로 이 순간 찾아오신 하나님이 엘 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입니다.
내 인생의 한계 상황에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되십니다. 
내가 낙심하고 절망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리다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내 꿈이 깨어져 갈 때에 다시 한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될 뿐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새로운 문, 새로운 길이 되십니다. 

II. 엘 샤다이

16장에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13년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은 그동안 숨어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꾸준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감찰하고 계셨습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지쳐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여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자신의 꾀로 얻은 아들 사랑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1. 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하갈을 택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을까요?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신 인간적 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 엘 샤다이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3. 왜 우리가 걸핏하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아갈까요?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언약을 지킨다. 나는 언약을 성취한다. 너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전능자 - 엘 샤다이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전능자”라는 말이 개역개정판에 48번쯤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처음 나타나는 이 단어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 책이 뭔지 아십니까?

인생 고통의 책 욥기에 무려 31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할때, 고난의 태산준령을 넘어야 할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불가능을 넘어 기적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때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새로운 기적의 역사가 필요할 때 당신을 찾아가 주시는 분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창세기 17장에서 언약이란 말이 13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잊기도 하고 때론 그 약속을 기억한다 할찌라도 이룰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고 이루십니다. 인간 편에서 더디다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가장 정확할 때에, 가장 적절한 때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할렐루야(민23:19).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했던 미국 칼빈신학원 루이스 벌코프 교수는 말했습니다. “엘 샤다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엘 샤다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 그분의 주권 가운데 있다. 창조와 보존이, 선택 혹은 유기가, 만물의 운행과 통치가 엘 샤다이 그분의 품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엘 샤다이 – 전능한 하나님은 그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말이 헬라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선과 악이 다 가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상에서 이 말은 그분안에서 모든 선한 일들이 이루어 진다는 뜻입니다. 더럽고 악하고 추한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무소부재 – 하나님은 안계신 곳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무소부지 – 머리털까지 세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십니다.
무소불능 –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엘 샤다이를 만난 사람은 항상 내 눈, 내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눈으로 문제를 볼 줄 압니다. 엘 샤다이의 관점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대되는 존재인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립스 부룩스 목사님은 “능력에 맞는 일만 하지 말고 비전과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늘 자기 능력에 맞는 일만 찾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엘 샤다이 - 전능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언제나 내 곁에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14:12)

III. 엘 샤다이 - 그 능력 그 방법으로 산다

이 땅엔 자기 능력, 자기 자원만 보고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 상처를 입고 술집에서 나폴레옹! 꼬냑을 한 병 마시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나폴레옹! 네놈한테 불가능이 없다구. 웃기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게 뭐 있어. 난 매일 나폴레옹을 통째로 마셨다. 그런데 사업도 인생도 다 실패했다.”

술은 취했지만 말인즉 사실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물론 자기 사전에서 불가능이란 단어를 칼로 도려내면 그 단어는 없겠지요. 그러나 인간들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 엘 샤다이의 힘으로, 그분의 방법으로 살아야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있습니다.  내 힘, 내 노력, 내 방법으로 뭔가 하나님의 일을 도와 드려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입니다. 율법입니다.

신앙은 내 재능이나 능력으로 무엇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100% 엘 샤다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방법으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교회요 기독교입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로마의 무서운 핍박 아래 있으면서도 기독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불똥은 튀어서 떨어지는 곳곳마다 또 다른 불을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대제때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습니까? 로마의 황제를 상징하는 은빛 독수리가 가는 곳곳마다 모든 나라들은 정복되어졌습니다. 로마를 등에 업은 기독교는 그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이 없어도 황제의 권능과 권위로 세상에 전파되는 진기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때부터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도 모자랐습니다. 돈도 모자랐습니다. 은도 금도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 황제와 타협하면서부터 은도 많아졌습니다. 금도 많아졌습니다. 돈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는 교회 본질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생명이 종교가 되었습니다. 능력이 방법이 되었습니다. 라이프 스타일이 조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교회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엘 샤다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엘 샤다이란 말을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이 엘 샤다이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만족합니다. 족합니다. 이것이 엘 샤다이의 신앙입니다. 

IV. 엘 샤다이를 만나면 존재가 달라진다

기억하십시오. 
한 인간도, 공동체도, 엘 샤다이를 만나면 존재가 달라집니다. 존재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자신과 만방에 선포하는 사건이 개명사건 - 이름을 바꿔 주시는 사건입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다. 히브리어에서는 “함”자로 끝이 나면 복수가 됩니다.  

단수  아브람은  “나는 큰 자다”라는 뜻이지요. 지금까지는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명성을 쌓기 위해 살았습니다. 이제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비전과 사명이 달라졌습니다.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가는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폭이 달라졌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약속했던 구체적인 역사를 펼쳐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15, 16절에 가서보면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아내 사래도 “사라”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가정이 복의 근원이 되려면 가족이 함께 변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의 근원이 되려면 교회의 모든 멤버들이 함께 변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복의 근원이 되려면 공동체의 모두가 함께 변해야 합니다. 특별히 리더들의 영향력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합니다. 

단수 사래는 공주라는 말입니다. 한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며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복수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바가지나 긁으며 사소한 일에 걱정하고 불평하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고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라고 부르며 사람들은 비웃었겠지요. 이름을 불러놓고는 킥킥대고 웃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자식도 없는 자들이 열국의 아비라고? 열국의 어미라고? 노골적으로 조롱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비웃던 자들은 모두 훗날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엘 샤다이 하나님을 비웃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지구상에 70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 천주교인, 유태인, 이스람교인 35억, 절반 이상이 넘는 인구가 적어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엘 샤다이를 만나 이름과 존재가 바뀐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울은 바울로 바뀌어졌습니다. 시몬은 베드로로 바뀌어졌습니다. 뭇 죄인들이 의인의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마귀의 자식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집사, 장로, 권사, 목사, 세상이 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지요. 직분, 이름을 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직분, 이름의 영광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이름이 달라졌습니까? 존재가 달라졌습니까? 이웃들이 당신을 보고 달라졌다고 간증을 합니까? 아직은 이름만 달라졌기에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비웃던 그들이 결국엔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아직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까? 엘 샤다이를 만나면 존재가 달라집니다. 오늘 아침 엘 샤다이를 만나면 본질이 달라집니다. 오늘 아침 엘 샤다이를 만나면 꿈이 달라집니다. 오늘 아침 엘 샤다이를 만나면 언어가 달라집니다. 오늘 아침 엘 샤다이를 만나면 여러분의 사명과 보는 눈과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를 보는 눈이, 너를 보는 눈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인생을 바라보는 눈들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V. 나는 너의 주인이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만 보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오늘 아침 이곳에 달려올 때에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달려오셨습니까?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서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며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꿈꾸고 꿈꾸었던 그 꿈들이 무너지는 아픔을 갖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커다란 일을 계획했지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어 쩔쩔 매시는 분이 계십니까? 당신의 끝이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임을 이 아침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에 더하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말은 「나는 너의 주인이다」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 왕이요 우리 주인이십니다. 
이 한해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께만 충성을 다하여 사는 것입니다.

시골 어느 교회에 개고기를 몹시도 좋아하는 윤집사가 있습니다.
부인 집사님이 남편을 위해 독구, 메리, 쭁- 보신용 개 세 마리를 키웁니다. 
어느 여름날 그중 한 마리를 끌고 친구들과 함께 냇가로 가마솥을 메고 나갔습니다. 개목에 나이롱 끈을 묶어 냇가 버드나무에 매다는데 개가 눈물을 흘리며 발부둥을 칩니다. 한참이나 씨름을 하다가 개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빈 가마솥을 매고 집에 돌아오는데 목에 나이롱을 매단 쭁이 꼬리를 흔들고 자기를 죽이려던 주인에게 반겨 매달립니다. 

이 윤집사님 쭁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나는 너를 죽이려 했는데 너는 나를 아직도 반겨 맞는 구나. 쭁아! 쫑아!”
이 윤집사님 그 날로 선언했습니다. “내가 개고기를 먹으면 개 XX다.”

유진 피터슨의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당이 그의 신에게 순복하는 것 만큼만 순복한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갱들이 그들 집단에 충성하는 것 만큼만 교회에 충성한다면 교회는 세상을 뒤집었을 것이다.”

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합니다.
「한마리 개가 그 주인에게 충성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주인에게 충성을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