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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 됐는가?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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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 됐는가?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제가 30여 년 전 광주 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인데, 어느 봄날 전 직원이 야외를 가게 되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교회 버스 안에서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며 여흥을 하게 되었는데, 보일러실 기사로 일하는 청년의 차례가 되자, 그는 힘차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름을 채워라 계속 타게, 주 맞을 준비됐느냐. 이 세상 심판 날 가까웠네. 계속 타게 기름 채워라.♪ 그 노래를 듣고 그만 일동이 얼마나 웃었는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보일러 기사가 그 많은 찬송가와 복음송가를 놔두고 하필이면 ‘기름을 채워라 계속 타게’ 라고 큰 소리로 노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등에 기름이 없어서 큰 낭패를 당한 기사가 나옵니다. 바로 유명한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입니다. ‘열 처녀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 나라의 결혼 풍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유대 나라에서의 결혼이란 대단한 경사였습니다. 온 마을이 총출동하여 결혼을 축복하는데,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기 위해서, 신랑의 결혼 행렬은 가장 먼 길을 통해 갔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혼례식은 보통 초저녁별이 나타날 무렵에 베풀어지는데,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신부의 친구인 열 명의 들러리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데, 때로는 어떤 사고로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랑의 행렬이 늦게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쌍의 남여가 결혼을 하면, 그들은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일주일가량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혼인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왕자와 왕후와 같은 예우를 받았는데, 그 때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1. 열 처녀 비유의 상징적인 의미

‘열 처녀 비유’는 이 같은 유대인의 결혼 풍속을 배경으로 하고 주신 것인데,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들러리인 ‘열 처녀’는 성도들을 의미하며,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기름’은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눈 것은, 성도라 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자와, 버림받을 자가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열’ 또는 ‘다섯’이란 숫자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그 준비 상태에 따라 둘로 양분되었다는 것이며, 신랑이 더디 올 때에 신랑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신랑이 더디 올 것을 대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시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되,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교훈인 것입니다. 

2. 더디 오는 신랑

5-6절에 보면 신랑이 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5절을 보면 신랑이 매우 더디게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은 신랑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졸며 잠든 한밤중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깨어 환영할 때에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기다리다 모두 지쳐 잠들었던 바로 그 때에, 돌연히 찾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옛말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길이 멀고 험해야, 타고 가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 온갖 풍상을 겪어 보아야, 사람의 우정이나 사랑이 진실한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시험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으로 더욱 깨어 경성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하산이 늦어지자, 그만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가장 많이 침입할 때는, 사람들이 경계를 늦추는 한낮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밤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 역시 사람들이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을 때, 돌연히 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재림이 지체될수록, 영적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더욱 믿음과 성령의 불을 밝히고 준비함으로써, 언제든지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이들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차이는 그녀들의 지력 혹은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준비성에 있었습니다. 

1)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다.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나, 많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면,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참 신자와 형식적인 신자, 성령을 받은 신자와 받지 못한 신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한 자와 예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준비를 잘하여,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한껏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자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다만 말씀대로의 순종이 뒤따를 때만, 가치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여, 준비된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2)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등에 가장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낮 동안에 기름을 준비할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시덕거리고 놀기만 했는지, 혹은 설마 그토록 밤늦게 올까 하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부주의 하고 방심했던 다섯 처녀들은, 결국 신랑을 영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내어 쫓김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도 주님 맞을 준비, 즉 회개와 믿음, 성령의 열매 맺는 삶 등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 맞을 준비를 미루다, 결국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도 준비해 놓지 않고 졸다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아오라” 할 때에야,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면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름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친구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 다섯 처녀는, 주님의 책망을 듣는 대신, 오히려 지혜롭다는 칭찬과 함께,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구원 역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백이 나를 구원 하고, 나의 회개가 나를 죄에서 건지고, 나의 충성과 봉사와 희생으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구원에 대해,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주거나, 도와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오로지 1:1의 관계입니다. 믿음이나 행함은 남에게 빌릴 수도 없으며, 어디 가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부모님이나 가족의 신앙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신과 주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발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5.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10절을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밤에 결혼이 이루어지던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신랑의 입장과 함께 혼인 잔치가 시작되면, 강도와 도둑을 막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는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뒤늦게 가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 어두운 곳에서 울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에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가 되면, 구원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리고 그 때가 지나면, 아무리 구원의 문을 열어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더 이상 구원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120년의 기회를 주셨지만,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후에는 그 방주 문을 친히 닫으시고, 열어 주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그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항상 열려 있을 것으로 착각하여, 조금 쉬었다 믿겠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함부로 중단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 길로 갑시다.♪

6. 항상 깨어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13절에서 주님은 열 처녀 비유의 최종 결론의 말씀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이 구절 외에도, 종말에 관한 교훈을 하실 때마다, 거듭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까? 

1)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주님, 공의로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주님, 그 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재림 후에 있을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두 번 다시없을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랑이 나아올 때 잠들어 있음으로 해서,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신부는 불행한 신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있을 때, 신앙의 잠을 자다가 그를 맞이하지 못하는 성도는,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자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우리가 낮이나 밤이나 잠자지 말고, 눈을 뜬 상태로 있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열 처녀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외견상으로는 모두 믿음이 있고 깨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중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실상 깨어 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등과 함께 무엇보다도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곧 말씀과 성령으로 속사람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눔으로써, 생명력 있는 신앙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입니까?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기회가 있는 지금 최선을 다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엄정한 선언은, 신랑이 그 처녀들을 혼인 잔치에 들일 마음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실로 종말의 날에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는 긍휼과 사랑만이 충만했으며, 모든 죄인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이 구원과 회개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의 재림은 심판과 멸망의 선언을 위한 것입니다. 마 3:12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재림하시는 주님께는 긍휼이 없고, 오로지 공의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 죄인들은 주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주님은 죄인을 더 이상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한 편의 즐거움과 환희의 찬송,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회한의 눈물과 통곡으로 갈리는 두 종류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열 처녀 비유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믿음 입니다. 오늘의 비유대로라면 50:50입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듯이,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성도를 신부로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성도를 더 사랑하는 분이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주님께 성도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하며,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동거하기 때문입니다.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체되는 주님의 재림을, 회개와 구원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종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가? 이 시간 각자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재림 직전에만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영적으로 깨어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찾아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적으로 잠든 상태에서 맞이하는 부끄러운 신부가 되지 말고, 항상 깨어서 등불 들고 주님 맞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여,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예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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