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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독소를 제거하려면 (왕하 4: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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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독소를 제거하려면 (왕하 4:38-41)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꾀가 많고 욕심이 많아 속이기를 잘 하던 시지푸스(Sisyphus)가 제우스를 속인 죄로 명계(冥界)인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받게 됩니다. 시지푸스가 받은 형벌은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시지푸스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려 놓으면 그 바위는 이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시지푸스는 다시 그 바위를 산 위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산꼭대기에 올려놓기만 하면 바위는 또다시 여지없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하루 이틀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지푸스는 영원토록 그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게 시지푸스가 받은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에 끌어올려야 하는 시지푸스는 그 일을 영원토록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 인간세상의 삶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지푸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이런 시지푸스의 이야기를 인간승리의 모습으로 해석합니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바위를 다시 끌어올리는 모습과 떨어진 바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산아래로 달려오는 모습이 어떤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는 인간승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지푸스의 모습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인생들의 삶의 모습을 대입하곤 합니다. 정상에 오른 것 같으면 어느 순간엔가 깊은 골짜기로 밀려나고 마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정상에 올려진 바위처럼 우리가 성공이라는 정상에 서는 것 같지만, 그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또 다른 위기와 깊은 절망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도 고난이 있고, 때론 슬픔과 절망의 그늘이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그런 삶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감격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신앙으로 사는 우리에게 매일 매 순간 그런 영적인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채워진 그런 삶만 있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신앙으로 살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고, 매일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삶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때로는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장애물이 생기기도 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 믿지 않을 때 겪어야 했던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똑같이 겪어야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길갈을 방문했습니다. 길갈에는 선지학교가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선지학교는 벧엘, 길갈, 여리고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선지학교가 있는 곳을 순회하면서 잠간씩 머물면서 선지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선지학교를 방문할 때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입니다. 연평균 강우량이 매우 적은 곳입니다. 그렇다고 저수지를 만들어서 물을 많이 보관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그것은 곧 흉년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그 땅에 가뭄과 흉년이 들었다고 기록한 말씀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스승인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8:1절에도 보면 그 땅에 7년 동안이나 기근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가뭄이나 기근, 흉년 이런 것은 단순히 비가 오지 않아서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가뭄이나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고, 징벌의 결과였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적인 말이라면, 가뭄이나 기근, 흉년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열왕기하 8: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7년 동안의 기근’ 역시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흉년은 열왕기하 8: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7년 동안의 기근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길갈에 있는 선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스승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선지학교 학생들은 엘리사 앞에 모여 엘리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말씀을 배우고 있는 선지학교 학생들은 이스라엘을 영적인 침체로부터 구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선지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세 시기에 선지학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과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입니다. 그 때는 모두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사무엘 시대는 아직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사사를 중심으로 정치와 신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인 사무엘 선지자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지도자요 영적인 지도자인 사사들조차도 타락한 때였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는 북 이스라엘에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온 나라가 이세벨의 치마폭에 휘둘리던 당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오직 나 홀로 남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7000명을 숨겨놓으셨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그 땅에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어두운 때가 엘리야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은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아합 왕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있고, 전국 곳곳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설치하고 있는 왕비 이세벨 역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겠다고 선지학교에 온 사람들은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언제 불려가 죽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암울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고 싶다는 거룩한 헌신으로 선지학교에 왔습니다. 

엘리사 선지가가 길갈에 있는 선지학교를 방문하자, 그곳에 있던 선지학교 학생들이 엘리사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승으로부터 말씀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본문 38절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앞에 앉았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서 모였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했습니다. 얼마나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선생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식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선지학교에 온 사람들이기에, 그리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우는 시간이기에, 식사를 거른다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흉년 때문에 오랫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스승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긴 하지만, 뱃속에서는 자꾸만 ‘꼬르륵’거립니다. 여기저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자 엘리사 선지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사환을 부르더니 ‘큰 솥을 걸고, 거기 모인 모든 학생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국을 끓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선지학교에는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왕과 왕비의 극심한 박해 때문에 후원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러니 국을 끓이라고 한들 국을 끓일 재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 큰 솥을 걸고 국 끓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한 사람이 들로 나갔습니다. ‘혹 국에 넣고 끓일만한 어떤 채소가 있나’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온 땅에 오랜 기간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어디간들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들을 헤매고 찾아다녀 보아도 먹을 만한 채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힘들게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들포도덩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들포도덩굴의 열매는 먹는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들포도덩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다만 70인역(LXX)과 같은 고대 성경<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에 따르면, ‘콜로신드’(Colocynth)라 불리는 식물이라고 합니다. 이 콜로신드에는 둥글고 황갈색을 띤 오렌지 만한 열매가 열립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들호박’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들호박’이라는 열매는 쓰디 쓸 뿐만 아니라 먹으면 복통과 신경통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구하려 들에 나갔던 그 사람은 그게 먹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고, 배가 고프니까 그것을 보자마자 따 가지고 왔습니다. 옷자락에 가득 담아서, 아마 먹을 것을 구했다는 기쁜 마음에 흥얼거리며 선지학교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솥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과 들호박을 따 가지고 온 사람은 그 열매를 썰어서 펄펄 끓고 있는 솥에 넣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국이 다 끓자 국을 퍼다가 학생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음식 한번 먹어보지 못한 학생들은 맛있게 끓인 국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들은 그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국에서는 굉장한 쓴맛이 났고, 그걸 먹은 학생들은 솥에 독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여러분, 선지학교 학생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여기에 온 사람들입니다. 언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생명을 내놓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을 구해보겠다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 열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위대한 스승 엘리사에게 말씀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주어진 국은 맛있는 국이 아니라, ‘죽음의 독이 들어 있다’고 외칠만큼 너무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국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때로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은 ‘죽음의 독이 들어 있는 국’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의 삶에도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남달랐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의 생애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고난의 때가 있었고, 고통의 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의 삶에 왜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신앙으로 사는 우리가 왜 때로 죽음의 독이 들어있는 국을 마시게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윗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절대 어려움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선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죽음의 독이 들어 있는 국은 절대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자주 우리도 다윗이나 선지학교의 학생들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를 찾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 보십시다.

한 사람이 들에 가서 먹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만한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들포도덩굴이었습니다. 그 들포도덩굴에는 보기에도 탐스러운 황갈색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먹거리를 찾으러 간 사람은 ‘이게 웬 횡재냐’ 그러면서 그 열매들을 주섬주섬 따서 옷자락에 가득 담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먹을 수 없는 열매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을 끓이는 사환 역시 그게 먹을 수 없는 열매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39절 마지막에 기록한 것처럼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잘 썰어서 국을 끓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열매는 먹을 수 없는 열매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열매를 따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열매로 국을 끓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열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걸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습니다. 그 열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지해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죽음의 독과 같은 고통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행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때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판단이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해산하는 고통, 평생 땀 흘리며 일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면 아담과 하와는 결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을 때까지는 몰랐습니다. 그저 뱀이 유혹한 말만을 듣고 선악과를 쳐다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줄 ‘죽음의 독’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며 살다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고해 주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3)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거짓된 우상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가 하나님께 변명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열정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노력도 없이 가만히 있는다고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것 아닙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고,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들이닥친 죽음의 독을 마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나 먹거리를 구하러 나갔다가 들호박을 따가지고 온 사람이나, 그 들호박이 전혀 먹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오기 전에도 그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녀보았을 것이고, 들호박이 그렇게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따지 않고 지금까지 남겨둔 것은 그것은 먹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먹을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일 정도로 배가 고팠을 수도 있습니다. 들호박을 딸 때, 또 그 호박을 썰어 국에 넣을 때 그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열매가 보였다는 것,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습니다. 또 국을 끓일 수 있는 열매를 따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먹지 못하다보니까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우리는 건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의 스포츠용품 회사 가운데 ‘아식스’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아식스(ASICS)라는 말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Anima Sana In Corpore Sano)는 라틴어 격언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참 공감이 되는 격언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영적으로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하고, 건강을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건강하도록 기도해 합니다. 
  
‘솥에 죽음의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고 외치는 학생들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가루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루를 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국을 떠다가 무리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다시 떠온 국을 먹어보니 사망의 독이 없어졌습니다. 맛있는 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망의 독이 침투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독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지로 인해 우리 인생에 고통의 독이 들어왔다면, 그 독을 제거해야만 맛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뿌려져야 합니다. 말씀이 뿌려지는 곳마다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야 우리의 인생에 하늘의 행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드는 가장 큰 사망의 독은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주범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입니다. 로마서 5:12절에서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라는 놈이 우리의 삶에 침투해 들어오면 우리의 삶을 전부 망가뜨립니다. 우리가 누려야할 복을 차단시키는 것 역시 죄입니다. 

예레미야 5:25절에서 그걸 가르쳐줍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축복을 가로막아 물리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가 누려야 할 모든 하늘의 복을 막아버렸습니다. 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을 죄가 다 막아버립니다. 그 죄를 그냥 놔두면 죄가 우리를 사망의 그늘 아래로 끌고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서 죄를 끊어야 합니다. 
  
죄를 끊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뿐입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라는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가로막고 있는 모든 하늘의 복이 우리의 인생에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능력을 의지하여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의 삶에 죽음의 독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영적인 무지로 인해 우리의 삶에 아직도 고통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이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인생에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의 독을 남겨둔 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죽음의 독을 제거해야만 우리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죽음 독을 제거해야만 우리의 삶에 하늘의 평화가 깃들입니다. 그 죽음의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신앙생활하면서도 여전히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고, 특히 죄의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망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드는 삶의 독이 있다면, 빨리 제거하십시다. 그 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사망의 독이 든 솥에 가루를 넣은 것처럼,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 삶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죄가 활동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우리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고통도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기’(시편 30:11)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옵니다.’(시편 30:5) 우리 인생에 들어오는 모든 죽음과 고통의 독이 우리 주님을 모심으로 인해 모두 제거되고, 우리의 앞날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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