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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란 (행 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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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행 2:41-47)
  

들어가는 말

요즘 시중에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화제입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국민작가입니다.
조카를 위해 과자를 움친 죄로 15년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의 삶은 증오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증오로 가득 찬 장발장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은 것은 주교였습니다.
거리에 지쳐 쓰러진 장발장에게 주교는 ‘형제’라고 부르면서 성당 안에 쉴 곳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주교의 친절을 값비싼 성당 기물을 훔치는 것으로 되갚았습니다.
은제품을 한 자루 들고 도망가던 장발장은 경찰에 붙잡혀 다시 성당으로 끌려왔습니다.
장발장을 마주친 주교는 책망하기는커녕 “왜 은촛대를 가지고 가지 않았느냐?”고 은촛대 두 개를 안겨주었습니다.
주교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의 터치가 장발장의 영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랑의 파문은 창녀 팡틴, 그녀의 딸 코제트, 연인 마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게 됩니다.
저가 이 영화에 관심 가졌던 것은 삶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의 삶은 언제, 어떻게 변화되는 걸까?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사람은 사랑함으로 변화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면 삶이 변화되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을 끼고 예배당을 들락날락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이란 ① 전인격적으로 변화된 사람들, ②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전인격적으로 변화된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하면 뭔가 옭아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면,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안 됩니다. 젊었잖아요? 나중에 나이가 든 다음에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마냥 우울하고 답답한 회색지대로 여깁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의무, 금지, 제한, 구속이란 이미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행2:46-47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에 ‘기쁨’ ‘즐거운 교제’ ‘찬미’ ‘칭송’이란 단어가 쏟아지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의 기독교, 원래의 기독교를 근래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전인격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거듭난다.’고 표현했습니다.요3: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바울 사도는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도행전에서는 그것을 ‘구원받다’라고 표현합니다.
본문 행2: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며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2: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구원받는다.’라는 단어는 엄청난 단어입니다.
교인들은 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결국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자들에 속하고, 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집에 불이 났는데 몇 사람이 갇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창문에 사다리가 걸쳐지고 몇 사람은 구조됩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불에 타 죽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구원받는다는 신약성경의 용례에는 바로 이런 이해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구원받다.’라는 단어는 세 시제로 사용됩니다.
‘구원받았다’(과거), ‘구원받고 있다’(현재진행) ‘구원받을 것이다’(미래)

①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과거)

우리는 이것을 ‘의인’ 또는 '칭의(jus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우리를 재판하십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이것입니다.
살후1:9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절)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책임은 없어졌습니다.

그림자를 비유로 ‘칭의’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림자를 볼 수 없지만 뒤를 돌아보면 그림자가 여전히 길게,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뒤에 분명히 죄의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밝다고 보아줍니다.
그러면서 “내 새끼!”하면서 우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이게 바로 칭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우리는 칭의의 감격을 누리고 삽니다.

② 또한 우리는 구원받고 있습니다.(현재 진행)

칭의 후에 우리 내면에는 하나의 놀라운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권세(power of sin)를 극복해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성화는 바로 성령의 도움으로 이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화하는 과정에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다시 그림자를 비유로 성화를 설명하겠습니다.
그림자는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길게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림자의 길이가 짧아집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내면에 있는 죄의 세력은(power of sin) 약화되고, 따라서 죄지을 가능성도 적어집니다. 
우리는 성화의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 된 삶이지만 감히 하늘 냄새를 흩날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취를 드러내게 됩니다. 

③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구원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미래)

이것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하며, 이것은 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이 세상에서 때때로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육의 몸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다시 그림자를 비유로 영화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빛에 가까이 다가가서 빛 바로 아래 있게 되면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그림자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 안에 있으면 죄의 그림자는 사라지게 됩니다.
죄의 세력은 완전히 힘을 잃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영광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삽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의의 감격, 성화의 놀라움, 영화의 기대감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디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교인인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인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사람들과 같습니까?
행2:46-47절을 다시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리스도인이란 전인격적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2.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

사도행전은 진정한 믿음은 ‘분리’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교회로 옮깁니다.
‘세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물리적인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와 달이 있고, 동물과 식물이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세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분리되어 가장 본질적으로 다른 모임인 교회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26: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의 자리로 옮길 것입니다.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로 옮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한 권면을 보십시오.
빌2: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바울의 이미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와 똑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벧전2: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은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가르침에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면 경건치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분리가 일어나야 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 곧 ‘세상 신’(고후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9엡2:2)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엄청난 영적 권세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세상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선포한 대로 이 세상은 ‘패역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행2: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패역한(untoward)'이라는 단어는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비뚤어지고 고집불통이며 통제 불능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구부러지고 꼬였습니다.
세상이 구부러지고 꼬였습니다.
곧은 것, 순수한 것, 깨끗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질상 구부러진 인간과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롬1:29-32절을 읽어보면 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패역한 세대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성령의 역사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사람들은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하며, 자기 속에 악함과 추함과 더러움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이렇게 더러운 사람이라니!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이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나가는 말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전인격적으로 변화되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해답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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