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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면의 빛 (요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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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빛 (요 1:9-14)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 이카로스의 운명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절기상으로 대한大寒입니다. 혹한이 이제는 좀 지나가고 있는 셈인가요? 옛 사람들은 이맘때면 세끼 중 한 끼는 꼭 죽을 먹었다 합니다. 나무나 한 두 짐 하고, 가마니나 몇 장 짜고 나면 힘쓸 일이 별로 없는 터에, 삼시 세 끼 밥 먹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라네요.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교훈 그대로입니다. 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내복, 목도리, 모자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욱 고마운 것은 이 냉랭한 세상에서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마음 따뜻한 사람, 만나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입김을 호호 불어 스러지는 불씨를 되살려내는 것처럼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따뜻함과 희망과 기쁨을 되살려줍니다. 성도는 바로 그런 일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습니다. 감기 기운을 달래 내보내느라 좀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한숨 좀 짓지 말라면서, 며칠 전 전철 안에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자기 기운까지 쪽 빠지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아내는 그 분을 위해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더라고 말하더군요. 둘러보면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전1:8)는 전도서 기자의 말이 실감납니다. 

일상이 분주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작 돌아보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제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삶의 힘겨움이 제일 크겠지만, 삶의 의미 상실, 모욕 받고 상처를 받았던 기억, 경쟁과 실패,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거기에 뿌리박고 있는 분노와 우울함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런 내적인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비틀걸음으로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 빛’이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에 밝혀진 집어등集魚燈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집어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오징어들의 운명은 죽음입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거짓 빛은 ‘돈’과 ‘출세’입니다. 사실은 같은 것이지요. 돈은 마치 이카로스의 날개와 같습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를 아시는지요? 그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라핀과 새의 깃털로 날개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날개가 완성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대로 태양 가까이 날아 올라가면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날아갔다가 파라핀이 녹는 바람에 바다에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옛날이야기이지만 인간의 헛된 욕망과 오만이 빚어내는 비극을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돈을 매개로 하는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빛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고 또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장악하고 있던 세상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휘황한 전깃불을 끄지 않으면 달빛과 별빛을 즐길 수 없는 것처럼, 거짓 빛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 빛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후4:4)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빛을 보고 있습니까? 그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 빛을 맞아들인 사람들

물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둠에서 돌이켜 빛을 향하여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고, 어떤 이는 목 좋은 세관원의 직위를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산을 팔아 예수 운동을 도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고, 어떤 이들은 예수 운동을 위해 자기들의 가진 것을 내놓았습니다. 마음에 깃든 어둠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던 이들도 예수라는 빛과 만나 새로운 삶을 향해 몸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변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예수님을 맞아들였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예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의 길을 자기의 길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경배하는 것만 가지고는 진정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힘겹지만 삶으로 주님과 연대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을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특권’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특권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우월적 지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특권을 말하면서 남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내적 힘을 주셨다’는 뜻으로 새기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투박하게 요약한다면 하나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참 빛 안에서 걸어갈 때 우리는 생명과 평화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런 이들을 일러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우분투가 있는 사람

지난 주일인 1월 13일은 우리가 흔히 ‘퀘이커’(Quaker)라고 일컫는 ‘형제단’(Society of Friends)의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17세기의 영국 사회는 격변 속에 있었습니다. 왕정 체제가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는 등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체제만이 아니라 종교계도 극심한 혼란과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국교도, 그리고 청교도들이 저마다 진리의 담지자임을 주장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제도적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구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폭스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 지방에서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탓에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신실했을 뿐만 아니라, 사려 깊고 침착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8살 되던 해에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마디로 굳건하다고 믿었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쳤습니다. 내적인 메마름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탄식했습니다. 욥을 연상시킵니다. 그 어둠의 시간에 조지 폭스는 성경을 꼭 붙들었습니다. 성령의 깨우치심을 간구하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 줄 수 있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의심의 밤이 물러가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식주는 검소했고,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전쟁을 반대했고, 노예제도도 반대했습니다. 그 때문에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내면에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님과 만난 이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지금도 그의 전통을 잇는 퀘이커교도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평화주의를 실천한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스몬드 투투 등은 모두 조지 폭스의 정신과 잇대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는 인종차별주의의 폐해를 그렇게도 아프게 경험한 흑인들이 어떻게 징벌을 요구하는 대신 용서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 복수를 꾀하기보다 아량을 베풀며 용서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아프리카 응구니족 언어인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우분투가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입니다. 또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데스몬트 투투, <용서없이 미래 없다>, 41쪽)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라는 참 빛과 만난 사람은 우분투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아는 순간 우리 삶은 이웃을 향해 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

요한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관념적인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 뭔가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보았던 영광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영광은 한 존재의 내면에서부터 솟아나오는 빛입니다. 그것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봉준이 관헌에게 붙잡혀서 이송되는 사진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체구가 작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던가요? 그런 기운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물고기 잡이 이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고백했던 것도 어떤 압도적인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란한 도시 한복판에서도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잠시만 함께 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잔잔해지는 사람, 자아를 온전히 여의고 자기를 전폭적으로 내주는 사람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경험을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로 요약한 것이 아닐까요?

요한은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충만함이란 넘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가득 찬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입니다. 불쑥 불쑥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 속에 화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랄랄라 노래가 나오는 것은 속에 기쁨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건건 어깃장 놓는 사람은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심정에 북받친 사람의 입에서는 장미꽃 다발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를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친 것은 은혜와 진리였습니다. 은혜는 대가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놓았으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라는 선물과 만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치유함을 얻었고, 마음의 중심을 잃었던 이들은 삶의 통전성을 되찾았습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던 이들은 분명한 삶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어둠을 폭로하는 진리의 빛이었습니다. 예수 앞에서 귀신은 쫓겨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은혜와 진리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삶은 힘겹지만 우리는 예수라는 참 빛을 모신 사람입니다. 빛을 모신 사람답게 사십시오. 세상에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한에서 입춘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삶으로 역사의 봄을 만드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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