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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영광 하나님께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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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광 하나님께 (벧전 4:7-11)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퇴계원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전도사 시절에 퇴계원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던 때입니다. 고등부에 나오는 여학생 가운데 굉장히 믿음이 좋은 학생이 한명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의 소원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전도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저에게 와서 “전도사님! 나는 소원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전도사님이 직접 우리 아버지 만나서 전도를 하실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러니 제가 전도를 하러 가야지 전도사인데 전도 안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때 나는 20대 중반이었고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40대 후반으로 그 지역에서 제일가는 사업가이며 소문나게 잘 나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여학생 집으로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제가 딸이 나오는 교회 전도사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인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갔다가 얼마나 그 아버지께 혼났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당신 좀 만나려고 했소. 우리 똑똑한 딸 당신 때문에 버리고 있는 거 알지? 왜 교회 나오라고 해서 내 딸 망쳐놓는 거야?” 막 야단을 치고 날 보고도 “당신을 보아하니 똑똑한 사람 같은데 뭐 할 일이 없어서 전도사를 하는 거야?” 혼내시는 겁니다. “교회 때문에 대한민국이 망하는 거야. 일은 안하고 나가서 노래 부르고 뭐하는 거야? 나까지 그런 일을 하라고?” 얼마나 화내시는지 왕창 망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도사님! 아버지가 만나자고 하십니다.” “야! 너희 아버지 만나자고 했다가 나 죽을 뻔 했다. 왜 만나자고 하니?” “아버지가 못사신데요.” “뭐라고?” “지금 병원에 계세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꼭 전도사님을 만나게 해 달래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서 성경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야단 안 맞을 거 같이 예상이 되었습니다.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말이 겸손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지난번에 초면에 내가 실례를 너무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나 죽는다고 진단 나왔습니다. 

나 다 잘한 것 같이 생각되었는데 우리 딸이 왜 나를 그렇게 열심히 교회 나가라고 날마다 기도하고 졸라댔는지 전도사님 같은 사람도 나한테 야단맞고 갔는데 내 마음이 지금 아주 후회가 됩니다. 제가 얼마 못산다고 진단이 나왔는데 그동안 이 성경책 한번 다 읽고 죽으려고 매일 성경을 보고 있는데 전도사님 생각이 나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일주일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저한테 세례 받고 가장 선한 말을 남기고 그의 말대로 얼마 안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고 위기의식 같은 것을 늘 강조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성경말씀에 뭐라고 합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나옵니다. ‘왜 이렇게 위기의식을 만들어서 사람을 조바심 나게 하는가?’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할 때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이런 말로 성경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리입니다. 인간은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존재입니다. 황수관 박사는 우리 갈보리 교회 오셔서 신바람 나게 건강 강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100세까지는 넉넉히 살 테니 두고 보십시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데 70세도 안되어서 별안간 그렇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니까 ‘인간 존재라는 것이 참 허무하구나!’ 또 한 번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은 다 되어 있는데 왜 그런가? 사람이 내일이 보장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뿐이라는 이 개념 때문에 그나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한테 나오지 100세까지 내가 절대 보장된다는 것을 내가 미리 안다면 누가 교회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내일에 대한 보장을 절대 알려주지 아니합니다. “내일 일은 네가 모를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면 그게 복이 됩니다. 아무리 괴롭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오늘은 최선을 다하고 내일은 보장이 없으니 ‘주시면 또 내일 일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풍성함을 우리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생활의 단위를 하루로 정하고 살아가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임박한 하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치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몇 가지 제목을 여기서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뭐라고 했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정신까지 차리고 근신하면서 기도생활을 하라고 했느냐? 우리 인간은 능력이 많은 거 같지만 인간 같이 나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초월자의 힘을 빌려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능력의 내재성이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게 하려면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기도인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기도 안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게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있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시간 노동하시겠습니까, 한 시간 기도하시겠습니까? 한 시간 노동하는 거 삽 들고 왔다 갔다 하면 지나갑니다. 노동자들이 다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하루에 8시간 노동하시겠습니까, 하루에 8시간 기도하시겠습니까? 기도는 앉아서 가만히 하는 건데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루에 8시간 노동하는 거 아침에 출근하고 출근부에 도장 찍고 좀 일하다가 쉬는 시간에 커피 마시고 점심시간 한 시간 라면 끓여먹고 떡국 먹고 재미나게 농담하고 그럭저럭 하다오면 시간 다 갑니다. “당신 그렇게 노동하지 말고 하루에 8시간씩 기도만 해!” 그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못합니다. 

기도하는 게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기도해본 사람은 압니다. 살이 마릅니다. 아주 심하게 할 생각하면 피가 마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오게 하는 힘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10분 동안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10분 동안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더니 사회자는 시계를 그동안에 5번을 봅니다. 노동하면서 10분은 그럭저럭 그냥 지나갑니다.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시간이 안 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철야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금식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면 이 정신력을 동원해서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는 일들이 있어서 우리가 신기하게 봅니다. 김정빈씨가 쓴 “단”이라는 책을 보면 우학도인이 정신력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 초능력 행사를 소개한 것을 볼 수가 있고 우리나라 최면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유한평 씨 책을 보면 이 정신통일이 가져오는 최면의 초강력을 거기서 보여주고 설명합니다.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하는데서 발생하는 초능력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청년 유리겔라라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했었습니다. 스텐 숟가락 하나 놓고 쳐다보니까 구부러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신 집중을 못해서 그렇지 집중하면 됩니다. 사실 그때 유리겔라 그 청년이 그거 하는 바람에 그 후에 대한민국에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고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구부러지나 안 구부러지나 시험해보려고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힘듭니다. “목사님! 이거 기도해주세요.” 그런데 자신은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 기도제목 가지고 새벽마다 나갑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제목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근신하며 정신 차리고 기도해서 얻어야 될 힘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초능력자의 힘을 초능력으로 내게 가지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런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정신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해서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할지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아름다움이 사랑하는 일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랑을 못합니다.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자기한테 좋게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름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초능력을 가져와야 되는 일이지 이게 안 됩니다. 자기한테 유익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하는 힘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이 내게 와야만 되는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기도를 통해서, 초능력을 다해서, 정신을 집중하여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오게 하라. 그 다음에는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지는 크리스찬의 능력을 행사하며 살라.”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자기의 유익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신도 안 차리고 근신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는 사람도 자기한테 잘해주고 유익한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근신해야 합니까? 그러면 그렇게 기도해서 얻는 사랑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덮어줄 수 있는 초능력을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허다한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을 때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결과가 내게서 행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내 마음의 방향이 사랑 쪽에 속해있을 때는 상대방의 실수도 넉넉히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 힘이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로 시집온 색시가 밥을 하다말고 들어와서 신랑한테 말했다고 합니다. “떡 좋아하나요?” “그럼! 떡 좋아하지.” 그랬더니 밥을 떡같이 만들어놓고 한 말이랍니다. 신랑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평생 먹어보지 못한 떡을 오늘 아침에 먹어봤다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제가 지난 주일에 언급한 J. C. 페니가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페니 씨는 교회 봉사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잡화상에 점원으로 취직을 하다가 자기가 아이디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미국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 10명을 선정했을 때 그가 1번으로 뽑힌 적도 있습니다.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점원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점원 생활 하면서, 또 내가 나중에 주인이 되면서 얻은 진리가 있는데 나를 찾아 여기 왔던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도록 인격 대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졌느냐고 물었더니 “성경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에서 내가 얻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집중을 해서 ‘어휴! 여기 다시 오기 싫다.’ 이러면 끝난 거 아닙니까? 왔던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도록 자기가 평생 일했더니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말하는 대접이라는 헬라어 원문은 “펠로세노이”라는 말인데 “나그네를 대접한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서로가 모르는 낯선 자” 처음 만난 사람을 인격 대우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때가 언제입니까? 모두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입니다.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서 방황하는 생활을 할 때이므로 낯설고 모르는 사람을 날마다 만나게 되니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대접하라.” 이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5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치가는 아니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잘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이 한국 땅을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공정한 기회 제공을 하면서 그들을 인격 대우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나그네를 서럽게 하고 학대하지 말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자꾸만 찾아오도록 하라. 찾아오는 나라는 잘될 것이다.” 잘되지 않습니까? 북한은 자국민도 살기 싫다고 자꾸 탈북해 나갑니다. “왔던 사람이 여기가 내 살 곳이라고 생각하게 하라.” 아이다호의 감자밭 주인들은 끝이 없는 농장의 마지막 줄 한 줄을 수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현장에 갔습니다. 나그네들이 그것을 캐서 먹으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다호 감자밭 주인들이 다 부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성경대로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 봉사도 그렇습니다. 초능력이 내게 와야만 남을 위해서 우리가 시간을 내고 헌신을 하지 내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을 빌려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이 네가 하라.” 오늘 말씀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교회에서 집사를 선택합니다. 목적은 교회 봉사하라고 기회를 만들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를 영어로 “Deac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διακονείν(디아코네인)’에서 온 말입니다. “διακονείν(디아코네인)”은 무슨 말입니까? 먼지를 뒤집어썼다는 말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사람이 “Deacon”, “집사”라는 말인데 내게 주어진 이 은사를 위해서 봉사를 하되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과 같이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공급해 주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봉사하게 하시니 한다는 믿음으로 하라.” 오늘 여기 이렇게 열심히 먼지까지 뒤집어쓰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면서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마지막에는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결론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우리 크리크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것을 위해서 정신 차리고 근신해라. 기도하라.” 여기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모든 영광 하나님께!”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고 그 기도한 힘으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봉사하는 모든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 제목 하나에 둘 때에만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고난이 나의 기쁨이 되는 생활이 되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손해난다고 생각합니다. 약삭빨라서 그럽니다. 하지만 손해 안 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내가 이름을 댈 테니 아시는 분은 손들어보십시오. 김범일! 한명도 안계시네요. 그 다음 사람은 아시나요? 임춘애! 아시는 분 계십니까? 많으시네요. 육상선수입니다. 86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 스타가 된 소녀입니다. 임춘애를 스타로 만든 사람이 김범일 코치입니다. 전도사님입니다. 3류급에도 들지 못하는 무명의 육상 코치 전도사입니다. 바로 여기 성남에 사십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을 자기가 육상을 좋아하니까 80명의 육상부원을 만들어서 코치하면서 자기의 소원은 이 사람들 다 예수 믿게 하는 거라고 하고 자기가 전도사니까 교회 하나 개척했는데 10명도 안모입니다. 조그만 교회를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가르치는 거 좋아해서 아이들 모아놓고 육상 가르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일주일씩 금식해 가면서 기도하다 어느 날 임춘애가 거기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드리기 시작했는데 이 전도사 육상 코치의 신앙과 육상 훈련은 오직 목적이 하나였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그렇게 하고 아이들 운동 가르치는 것입니다. 

임춘애의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가 학업도 운동도 다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돈 벌라고 했는데 김 코치가 부모와 싸워가며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성보여상에 진학시키고 육상 계속 하자고 하고 목표는 “아시안 게임에만 나가보자.” 그런데 그해 예선 경기가 4월, 5월 두 번 있었습니다. 
임춘애는 그때마다 몸이 아파서 출전도 못하고 끝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결정되었습니다. 기록경기이니까 허무한 꿈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전도사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금메달을 목표로 했다면 허무하지만 봐라.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우리 삶 자체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노력해 왔으니 실망하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 건강해서 운동할 수 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 아니냐?”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하며 운동시켰는데 그 다음 6월 달에 전국 체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한번 출전하자.” 그런데 임춘애가 1600m, 3000m, 10km 세 종목 모두 한국 신기록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육상계에서 깜짝 놀랄 거 아닙니까? “아니, 이런 선수가 이제 나왔으니 어떡하냐?” 그래서 번복을 해서 임춘애가 아시안 게임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가 태릉선수촌으로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범일 코치는 무명의 코치이기 때문에 국가 선수 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게임이 이제 두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하냐?” “이때 코치를 바꾸면 변화가 심해서 안 됩니다.” 그래서 김범일 씨가 그대로 코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4월과 5월에 임춘애가 출전했다면 김 코치는 아예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선수 임원들이 옷을 다 입을 때도 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공식 명칭이 없는 코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증으로는 그때마다 그는 불암산에 올라가서 목청이 터져라 밤새도록 기도한 거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쨌든 이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침내 임춘애가 아시아 3관왕이 되었을 때 김 코치가 기자들에게 막 질문을 받을 거 아닙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목적은 이루어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저는 전도사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사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임춘애 선수는 영원한 영광도 주어졌고 국가가 베푼 혜택도 무시 못 하게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전도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김범일 아느냐고 했더니 같은 성남에 사시면서 한 분도 손드신 분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때 ‘이제는 내 사명이 끝났다. 육상 코치의 생활을 그만 청산하고 본래 내가 가야할 전도하는 일에 더 열심히 몸을 바치자. 모든 일이 끝난 다음 자기에게 주신 은사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는 달리기 선수와 같이 열심히 전도하면서 살자.’ 모든 일을 끝내고 자기 손에 주어진 열매는 아무 것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간증집 하나를 내면서 자기가 섬기는 개척 교회 그 외로운 10명밖에 모이지 않는 그 강대상 밑에 와서 외롭게 혼자 와서 이 일의 모든 청산을 마지막으로 복음성가 하나를 부르고 끝났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나는 자유해!” 2013년 다른 생각 많이 하실 수 있지만 ‘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사심을 다 버리고 이 손에 아무 열매가 없다 하여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목적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초능력을 네게 오도록 하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같이 하라.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목표를 가지고 일 년 내내 저희들이 사는 축복의 2013년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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