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병이어의 기적 (요 6:1-15)

첨부 1


오병이어의 기적 (요 6:1-15)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살다보면 문제나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다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겪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문제들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두가 한번쯤은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때론 분노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시험 문제야 답이 있지만 인생의 문제는 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런 난관들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곤혹스런 상황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문제인데 답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더 큰 축복의 문이 열리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도 무리들이 어떻게 알고 따라왔습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 보니 날이 저물어갑니다. 사람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여도 인가가 드문 곳이라 가는 길에 시장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제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던집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에 대해서 6절에서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문제들 중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시험일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테스트’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정도나 반응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던진 시험입니다. 물론 시험 당사자야 곤혹스럽고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시험이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답을 알고 계시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가지신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던진 시험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취할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순종을 테스트해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자기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말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그 주변에 숫양 한 마리를 잡아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에서 당하는 문제들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정욕과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테스트일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우리 잘못과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어진 일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나 시험은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좌절해서 포기하거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때는 그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며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디딜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놀라운 승리와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빌립의 답

예수님의 시험 앞에 빌립이 제출한 답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떡을 사서 사람들에게 먹일까 하는 문제 앞에 빌립은 재빨리 계산을 하였습니다. 빌립의 답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 하루 품삯을 대충 2만 원 정도라고 계산해 봅시다. 빌립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먹여도 4백만 원이 들 것이라는 답을 제출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충분히 계산하는 것은 필요하고 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망대를 세우려고 할 때도 자기 가진 비용을 계산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우다 말아 망신만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1만이고 상대방이 2만의 병력이면 계산을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빨리 화해를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런 합리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빌립의 계산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빌립의 계산식에는 예수님이라는 중요한 절대상수가 빠졌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은 약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우리는 더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일에 예수님의 상수라는 것을 집어넣어 허황되게 계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요즘 교회 건축을 하고 부도 위기를 맞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숫자나 능력도 되지 않는데 덜컥 빚을 내어 큰 교회를 짓고는 그것을 갚지 못해서 부도를 내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도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라는 상수를 집어넣고 계산했지만 그 수를 너무 크게 잡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건축에 이제는 큰 힘을 보태주지 않습니다. 

한참 선교의 시기에는 주님께서 교회당 건물을 축복하셨지만, 그 건물이 이제 인간의 탐욕과 과시, 낭비의 산물이 된 시대에는 이 일에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교회당을 짓고 싶다면 합리적인 계산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라는 상수가 작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그 빚 때문에 고생하거나 망신을 당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3-14)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곁길로 갔지만 빌립의 계산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의 계산에는 반대로 예수님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인생의 문제에서 그것이 욕심이 아니라면 주님의 능력을 꼭 계산에 집어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자기 욕심이 아니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절대상수를 결코 빼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드레의 헌신

빌립과 달리 안드레는 다른 답을 내어놓았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양식입니다.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작은 물고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아이의 도시락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분량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내어놓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8-9) 이 작은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는 불신의 말을 달아서 100점 만점은 받지 못했지만 안드레의 답은 80점 정도는 줄 수 있는 답이었습니다.

그것은 적은 것이라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을 받아서 수십 수백 배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너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 작은 헌신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홀로 일하실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조그만 헌신이 있어야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1 X 5,000 = 5,000이지만 ‘1’이 아니고 ‘0’이라면 주님의 능력이 5천배가 아니라 수백만 배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 역사도 모세라는 한 인물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모세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가 자기 가진 지팡이를 내어놓았을 때 주님은 이 지팡이를 통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헌신을 귀하게 보시고 수백 수만 배 축복해주십니다. 올 한해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이 드리는 것이 작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작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지 모릅니다. 주일학교 교사로의 헌신은 작을 수 있고 적은 수의 아이를 섬긴다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안에서라면 다릅니다. 독일의 한 학교 교장 선생님의 일화입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아이들 교실에 들어가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인사를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소년들 중에 장차 어떤 인물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학생 중에 마르틴 루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작은 일은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안드레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 나누어주시니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 먹고도 남아서 12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 기적의 비결은 10절과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여기서 세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앉다’, 축사 곧 ‘감사하다’, ‘나누다’입니다.

기적은 앉아 있을 때 주어집니다. 우리는 서 있는 경우가 많은가요, 아니면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가요? 우리는 서 있기를 원하는가요, 앉아 있기를 원하는가요? 누구나 앉아 있기를 원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앉으라는 말씀은 우리 마음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도무지 앉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은 앉아 있는데 마음은 서 있습니다. 무언가 일을 찾아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제를 만들어내고 상상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미리 앞서가거나 다른 일에 대한 생각으로 그것에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예배들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은 다른 곳을 해매고 있습니다.

마음을 앉혀야 은혜를 받습니다. 불안과 초초함을 앉혀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앉혀야 합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앉혀야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십시오. 그 순간에도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앉아 있어야 일어서서 힘을 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앉으라는 말은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십시오. 내가 일한다고 하여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일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앉아서 기다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감사하기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라는 작은 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1절의 축사했다는 말은 감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 우리 주 하나님, 땅으로부터 음식을 내신 우주의 왕께 감사하나이다. 우리들에게 포도나무의 열매를 제공하신 분께 감사하나이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입니다. 배부름은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감사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감사하는 자는 지옥을 천국으로 만듭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 해군 장교가 고향땅에 돌아와 보니 모든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고 온 동네가 다 폐허가 되었고 자기 옛집도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또 증오심이 생기고,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화병이 나고 급기야 전신마비로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병원 원장이 그 사람의 발병 동기를 보니 불평과 불만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내가 주는 약을 먹기 전에 언제나 하루에 세 번씩 감사를 드리고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병이 낫는 비결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의사처방 대로 감사하기를 몇 개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학교 갔다가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서 오면서 길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풀빵을 사가지고 와서는 “아빠 먹어” 했답니다. 그가 딸이 주는 풀빵을 받을 때 정말 감사한 마음이 솟아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받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전신의 마비가 확 풀렸다고 합니다. 감사할 때 풀린 것입니다. 딸이 준 지극히 작은 풀빵 한 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누라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고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솟아납니다. 모두가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9,20세기에 풍미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며 이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 파울루스의 오병이어에 대한 해석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그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자 한 어린 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이것뿐이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쓰시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몰래 감추고 있던 먹을 것들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누어 먹으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현대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가 쌀이 없어서입니까? 먹을 것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또 예수님의 기적을 행해달라고 하늘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나눔이 부족해서입니다. 소말리아 어린아이들이 죽기도 전에 송장으로 만드는 것은 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눔이 부족해서입니다. 나눈다면 우리는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 재능,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나눌 때 오히려 서로가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산으로 떠나가신 예수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의 다음 반응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에 놀란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관심사가 떡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떡을 마음껏 만들어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자신들의 떡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나중에 다시 무리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 대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하며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그러면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고 교훈하십니다.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여전히 떡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현하자고 다짐하며, 평생 동안 이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표적은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떡이 아니라 영적인 데로 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떡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 며칠은 배부르지만 영원히 배부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삽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것,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감사와 나눔의 기쁨과 능력, 이 모든 것이 영의 양식들입니다. 이 영의 양식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변화되면 그 변화된 사람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늘날 재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기적을, 감사의 기적을, 나눔의 기적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사람이 사람만 된다면 놀라운 기적은 오늘에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떡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가면 또다시 샘이 되어서 솟아나옵니다. 물질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정신이 깨이지 못하니까 못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석유가 없다고, 비싸다고 난리입니다. 석유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정신이 없으니 못 보는 것입니다. 공해를 유발하는 석유보다, 우리는 태양열이라는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상의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 태양열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 깨이면 물질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나눔을 알고 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노자 도덕경의 말씀입니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는다. 저를 이미 남에게 주었는데 오히려 저는 남아 있고 저한테 있는 것을 이미 남에게 주었는데 오히려 더 많이 있다.” 등불 하나가 등불 수백 수천 개에게 불을 옮겨주어도 원래 불꽃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눔의 삶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런 영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배불리 먹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적은 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