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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본받으라 (빌 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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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받으라 (빌 3:7-17)


나를 따르라! 
육군 사관 생도의 옷에서 볼 수 있는 구호이지만, 이 구호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면서 던진 말씀이다. 그 당당한 말씀 앞에 따르는 자가 있고 거절하는 자가 있다. 
바울은 예수를 따른 사람의 대표자이다. 12제자들에게 주신 약속,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를 대면하고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서 예수를 쫓아가는 삶을 일생동안 계속하였다. 

그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증거한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말인가? 그는 예수를 따른 자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또 외친다. 우리는 바울 사도와 비교해 볼 때, 나를 본받으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고 보면 나를 본받지 말라. 나처럼 되서는 안된다. 나를 따르지 말라. 내겐 배워야 할 모범 답안이 없다. 온통 부끄러운 삶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여전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초라함을 느낀다. 본받으라고 하는 바울의 외침 앞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돌아보며 오늘도 예배에 나온 것은 닮아보려는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갈망을 가지고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보여준 나를 본받으라는 삶의 모델을 배우자. 

첫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삶의 본보기이다. (빌3:8)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이 나름대로 있었다. 
빌3: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바울의 가문, 혈통, 그리고 종교적 생활은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랑이 될 만한 것을 해로 여겼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육체의 자랑거리는 모두 분토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땅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다. 우리는 이 포기의 결단을 본받아야 한다. 모여 있으면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분토와 같은 것을 의지하며 만지작거리고 있다. 

양반 가문이다. 조상이 누구다. 엘리트 가문이다. 누구의 아들이다. 상을 받았다. 막말로 안동 권씨 전주 이씨면 무엇이고 모태로부터 믿은 신앙적 형통은 다 무엇인가? 과거적인 것, 전통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붙잡고 그것을 의지하는 이상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어렵다. 포기하고 배설물로 취급하라. 그 결단이 바로 바울을 본받는 삶이다. 세상의 것, 육체의 것을 신뢰하지 않는 삶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가는 삶의 본보기이다. (빌3:10) 

바울은 알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3:10에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한다고 하였다. 부활의 영광은 고난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전제로 한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기 위해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가 전제 되어야 하기에 어찌하든지 죽는 일을 받아드렸다. 우리는 죽으려 하지 않고 살려고만 한다. 나만 생각하고 살고자 발버둥치면 생명의 역사는 없다. 고통의 수용 없이는 살아나는 기적도 없다. 사람들이 희생 없이 영광만 생각하니 잘못되는 것이다. 가정을 살아나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교회를 살아나게 하려면 내가 희생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을 본받아 나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놓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가는 삶을 날마다, 계속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는데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고난과 희생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 영광만 쫓아가려는 마음이 살아나기에 날마다 죽은 것, 날마다 죽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 바울의 삶이었다. 우리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는데 까지 나아가면 살아나는 역사가 열매로 나타난다.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남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은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 가는 바울의 삶을 우리는 철저히 본받아야 한다. 
롬5: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상 문화는 살아남기의 문화이다. 너를 죽이고 너를 짓밟음으로 영광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처럼, 바울처럼 죽어야 한다. 오늘도 살아서 꿈틀대는 혈기와 교만, 이기심과 고집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자신을 희생하는 제물로 내어 던져라. 거기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최대용 감독님은 『죽도록 하면 사는 길이 열린다』는 책을 썼다. 죽는 것도 아니다. 죽을 만큼만 해도 살아난다는 뜻이다. 죽어야 하는 길, 그것이 신앙의 길이요, 바울을 본받는 길이요,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셋째, 푯대를 향하는 달음박질의 삶의 본보기이다. (빌3:14) 

바울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모습은 멈추어 있는 삶, 정지되어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일생은 진행형의 삶이었다. 푯대가 분명하기에 그 푯대를 향해 달음박질을 계속하는 도중에 있는 삶이었다. 바울은 언제나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푯대를 향하여 움직이는 신앙 생활이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데 그것은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한 달음박질이었다. 이것은 바울의 인생관이고 역사관이었다. 돌고 도는 목표 없는 삶이 아니고 골인지점의 푯대를 향해 움직여 가는 삶이었다. 

빌3:14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바울은 상이 있음을 믿었다. 신앙이란 숨이 차도록 뛰고 나면 결승점에서 왜 뛰어왔는지 모르는 허무한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 달음박질하는 신앙의 경주에는 상이 있음을 확신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바울은 상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는 삶을 멈출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약속의 땅에 예배당을 짓는다. "땅을 주셨으니, 교인이 이만큼 모였으니 그만 멈추자"라고 생각하지 말자. 신앙은 멈춤이 없다. 방학도 없고 졸업도 없고 휴학도 없다. 의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썩지 않음의 면류관의 상을 받으려 끝까지 경주하여 가는 것이다. 은퇴도 없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전진한다. 기회가 주어진 날까지 일하는 것이다. 
신앙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계속 패달을 움직이면 자전거는 앞으로 가고 마침내 골인 지점으로 간다. 멈추면 넘어진다. 잠시 쉬겠다는 생각, 그것은 퇴보이다.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실패했다고 짐이 너무 무겁다고 힘들어서 멈추어서면 안된다. 

육군 준장 이영재 장군이 자살을 했다. 부하들에게 따라오라고 해야할 장군이 전선 중에 목을 매어 죽었다. 너무도 힘들어서 삶의 경주를 기권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육사 출신이 그것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진급 선수주자요, 좋은 보직을 받은 자가 나라와 국군의 기세를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에게 별을 달아 준 나라의 소명 앞에 달음박질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그것도 상을 약속하시고 부르셨다. 또한 빌3:20의 말씀처럼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로서, 천국 백성으로서 소명을 주셨다. 신앙의 본받기 삶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닮아가려는 신앙의 갈망은 나의 소속을 확인함으로 생긴다. 내가 눈이 열려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천국을 알고, 내세의 소망을 알고 나의 소속이 땅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철저히 위엣 것을 향하고 땅의 것에 속하지 않는 자였던 것처럼 우리가 하늘에 소속했음을 알자. 나의 소속이 천국임을 알면 목마름의 갈망이 달라진다. 

세상의 문제는 다 탐욕의 문제이다. 먼지처럼 버릴 수 있다. 자신을 부인하고 쳐서 복종시키고 죽은 자가 될 수 있다. 가정과 교회를 천국 지점으로 가꾸기 위해 달음질하는 삶이 시작된다. 바울의 삶이 최고의 모델이 된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바울의 삶의 본을 따르며 나를 본받으라는 삶을 이루어 가자.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흠이 없는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쫓아가려고 한 바울의 열심이 나의 모델이 되고 나의 신앙이 나의 자녀들에게 본받음의 모델이 되는 삶이 시작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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