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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자의 삶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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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삶 (엡 5:15-21)


바울 사도는 새사람이 된 성도의 행위가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육체 그리고 마귀를 따라가서는 안되며 (2:1-3), 이방인처럼 되어서도 안된다(4:17)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입은 성도의 행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해야 하며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져야 한다(4:1, 5:1-2, 5:8)고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인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라" 고 했습니다.    

"지혜없는 자같이 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라"는 말의 뜻은 사는 목적과 살아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주의하며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주의하여" 라는 말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밝은 눈으로 보며 사는 것입니다.  무작정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왜 사는가 목적을 알면서 주의 깊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를 닮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하실까?" 라고 물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까?  바울은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뿐인 삶입니다. 잘못 그린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은 글은 다시 쓸 수 있으나 인생은 두 번 반복하지 못합니다.  연습도 없고 언제나 실전이며 후퇴도 없고 계속 전진뿐입니다.  정지할 수도 없고 휴식도 없으며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뿐인 삶은 훗날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인생을 다 산 후에 계산하자고 하실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칭찬과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본래의 뜻은 "값을 지불하고 세월을 사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관리할 책임도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을 선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악한 데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구절을 "마귀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 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쓸 수도 있고 마귀를 위하여 쓸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시간을 쓰자고 하면 핑계가 많고 이유가 많지만 마귀를 위하여 시간을 쓰는 데는 관대하고 말이 없습니다.   향략을 위해 쓰는 시간은 많지만 하나님을 위해 쓰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바로 그러한 잘못된 시간표를 고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월을 아껴야 될 이유가 단지 시간이 없으니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여건과 주변이 얼마든지 세월을 허송하고 못되게 살고 악한 짓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하게 살지 못하도록 유혹, 시험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며 오직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전 시간에 말씀 나눈 것처럼,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지 못하던 그 때의 삶은 어두움이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으며 감각 없는 자처럼 자신을 방탕에 버려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향락 문화가 도처에 질펀하게 펼쳐져 있는가 하면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오락 시설들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습니다.  놀고 먹고 즐기기로 한다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인 것이 우리 사회 현상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소중한 시간을 죄짓고 즐기는데 허비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당부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지만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일회적 선물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물과 같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을 붙잡지 못하고 이 시간을 아끼지 못하면 지금 이 시간은 나와 영원히 상관없는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회라는 제목으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발에는 날개가 달렸고, 머리 앞쪽에는 많은 털이 있으며 뒤쪽은 대머리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무슨 메시지를 주고자 합입니까?  기회란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며 기회가 왔을 때 앞에서 붙들지 못하면 지나간 뒤 잡으려할 때 이미 늦었고 또 잡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시기를 놓치면 1년 농사를 망치는 것처럼 기회란 주어졌을 때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데 우리의 짧은 생애를 미움과 증오와 시기 질투로 얼룩지게 만들지 맙시다.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므로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놓치고 나면 또 다시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맙니다.   건강할 때 힘써 봉사하고 시력이 좋을 때 부지런히 성경 읽고, 지혜와 총명 주셨을 때 선한 일 많이 하고 물질 주셨을 때 섬기기를 다합시다.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하는 찬송가사처럼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아껴서 주 위해 살아갑시다.

2.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원문의 뜻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가는 것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라' 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이미 오신 진리의 빛 안에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제 더 이상 어두움의 일에 젖어 육신의 정욕과 세상 향락에 취하여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울의 주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 고금을 통하여 공통된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뜻을 헤아려서 악한 데 가까이 가지 않고 부모 말씀을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걸어야 하고 지켜야 할 도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자녀입니까?   주의 자녀는 주의 뜻을 이해합니다.    진실한 자녀는  주의 뜻 아래 내 생각과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주의 뜻이 내 뜻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시대나 우리 세대는 똑같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이 땅위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보다 사람의 힘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결정한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며 사람의 힘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며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본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헤아려서 순종합니다.   내가 주의 마음과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그러한 주의 뜻을 이해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유한한 인생이 감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리의 기준에서, 우리의 좁은 이성세계와 경험 안에서  이해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광대하심을 나의 미천한  이성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에는 경건한 행동이 포함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오만함으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든 일이 나 중심적 사고였으며 내 이성의 판단에 따랐지만, 이제는 예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여 주께서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리석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3.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술 마시는 것이 죄다 아니다를 논하거나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술 마심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함과 성령충만을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라는 도시는 우상숭배가 가득한 도시이며 번화한 도시로서 방탕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방탕과 향락에는 언제나 술이 빠질 수가 없는데 에베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상제사와 함께 빠짐없이 따라오는 것은 술의 축제입니다.  온 시내가 술에 젖어있었으며 술에 취한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한 채 방탕한 삶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런 환경 속에 계속하여 머무르는 것을 경고하며 이제는 성령에 붙들리어 살아가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술 취하다 보면 방탕한 생활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탕이라는 말의 뜻은 저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절제입니다.  방탕 생활을 하게 되면 절제하지 못해 돈이 저축될 리 없고 건강이 저축될 리 없고 양심이 저축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탕은 패가 망신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에겐 3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단계는 여우의 단계라고 합니다. 술 취하면 여우처럼 눈초리가 올라가고 말이 많아지고 간사해지는가 하면, 둘째 단계는 늑대의 단계로 좀더 취하면 늑대처럼 사나와져서 덤비고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째 단계는 돼지의 단계라고 합니다.  더 취하면 돼지처럼 아무데서나 뒹굴고 배설하고 추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에 흠뻑 취한 사람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술에 이끌려 행동합니다.   이성을 잃고 몽롱한 상태에서 방탕하며 무질서하고 무절제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술에 지배받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충만은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충만이란 말은 신약에서 종종 지배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나를 그분께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의 주인이 되셔서 원하시는 대로 나를 만들어 가시도록 준비되어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의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생활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요?   바울은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술 취함과 성령에 취함의 특징을 대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충만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과에서는 상이함을 보게 됩니다.  술(酒)도 사람 속에서 주인 노릇할 수 있고 주님께서도 우리 생명의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십니다. 

첫째로, 성령에 충만한 삶은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로 나타납니다.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라고 했는데 화답한다는 말은 예배 중에 찬미를 통한 성도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찬송을 통해 서로간에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제를 나게 됩니다.   또한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의 노래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술 취한 사람들에게도 노래가 있고 교제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 한 잔하고 기분이 울적하여 한잔하면서 흘러간 옛 노래를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신나게 부릅니다.  흥에 겨우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맛이 간 상태로 흐느적거리거나 지옥불에 데인 사람들처럼 펄쩍펄쩍 뛰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에게도 노래와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술 취한 사람의 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신령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술에 충만하여 밤새 노래부르고 춤추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속이 쓰리고 피곤하며 허무함을 느낍니다.   다시는 술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후회도 합니다.

둘째로,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절)  술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보통 감사보다는 자기 자랑과 허풍이며 불평과 신세타령입니다.  시작은 분위기가 있는데 갈수록 정신이 해이해지고 혀가 꼬이면 엉뚱한 말을 하게되고 맥주와 소주와 양주라는 주(酒)님에게 붙들리면 체면도 교양도 버리고 심하면 음담패설이 주류를 이룹니다.  술의 힘을 빌리면 겁나는 것도 없어지고 용기(?)도 나옵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객기를 부리다가 사고를 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히면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어떤 형편에서라도 자족하는 삶을 누리며 심지어 고난과 시험 속에서도 용기 있는 믿음의 군사로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차 복종하는 삶입니다.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였습니다.  술자리에서 술에 이끌리면 고함과 욕설이 오고가며 폭력이 드러나 싸움판이 되기도 합니다.   술에 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처음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날 때는 말짱한 정신으로 기분 좋게 만나지만 점차 술에 취해갈수록 서로 욕지거리를 하는가 하면 만취되어 헤어질 때쯤이면 멱살잡고 싸우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겸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뿐 아니라 주안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뜻은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말고 나 자신이 솔선해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피차 복종하고 사랑을 나누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과 공경의 섬김이 있고 일터에서는 노사간에 성실한 섬김과 보살핌을 통한 피차 복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를 경외하듯 서로를 높여주고 섬기는 생활이 성령충만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기에 잘 준비된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성령충만한 부부, 가정, 교회와 국가를 높이 들어 사용하십니다.  참 지혜로운 성도로서 세월을 아끼며 날마다 주의 뜻을 이해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감사를 누리며 살아갑시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혜롭게 세상을 살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지혜나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그 힘을 힘입을 때 비로소 우리가 능력 있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어지럽습니다.  마치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와 같습니다.   어떻게 이 무섭고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며 안전한 항구에 도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 인생의 선장되시는 주님께 배의 키를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그 능력으로 무장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경험만을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살이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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