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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직분을 잘 감당하면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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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을 잘 감당하면 (행 6:1-7) 
 

본문은 초대교회가 사도 외에 다른 직분자들을 최초로 세우는 내용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이라함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성장한 유대인이고, 헬라파 유대인이란 각처에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인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2가지 방법의 구제사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정한 구역 내의 거주민들 중 극빈한 사람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열네 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방랑하는 낯선 빈민들에게 사발에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지금과 달라서 상당히 여권이 무시를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여자가 사회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남편 없이 과부로서 세상을 살아가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돌아봐야 할 대표적인 사람들로 고아와 과부를 자주 언급하는데 그런 사회적인 배경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 안에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이단시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 과부들은 유대 사회의 구제에서 소외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는 무척 힘이 듭니다. 사회복지제도의 혜택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교 랍비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기독교인라는 이유 때문에 사인을 해주지 않아서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기독교인 과부들이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니 교회는 교회 내 과부들을 위하여 매일 구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일 구제에 차별이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보니 히브리파 과부들은 매일 구제의 혜택을 누리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빠지는 것입니다. 이 일로 헬라파 사람들이 원망을 하게 됩니다.
사도들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인들의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드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안수하여 세우니 문제가 해결되고 교회가 더욱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설교는 이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직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직분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는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 집사, 구역장, 교사 등 다양한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왜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일까요? 다른 이유 아닙니다. 교회의 일을 하라고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분자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본문은 4가지를 말씀합니다. 
 
1)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1절). 
   
헬라파 유대인들이 보니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잘못 된 것입니다. 이 때 헬라파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찾아가서 상의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반응은 원망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원망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원망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고전 10:10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말하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는 문제와 그로 인한 원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사탄과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전쟁터에는 항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전투하는 교회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직분자들은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나를 왜 세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그 사실을 늘 명심하고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 해결을 위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2) 목회자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2절).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열두 사도가 해야 할 일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리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게 되니 목회자들이 짐을 덜게 되고 짐을 덜게 되니 더욱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크게 부흥을 하였습니다.
   
출 18장에 보면 모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이 일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충고합니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라고 말해줍니다. 모세가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랍니다. 그 일이 무겁기 때문에 필경은 기력이 쇠하게 되는데 모세의 기력만 쇠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모세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목회자인 모세에게도 해가 되고 백성들에게도 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좋은 지혜를 하나 제공합니다.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우고 그 일꾼들에게 모세의 일을 나눠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가 지도자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도 목적지에 평안히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회자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모든 짐을 짊어지면 목회자는 쓰러지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구역장, 교사, 찬양단 등 다양한 일꾼을 세운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목회자의 짐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도 직분을 잘 감당할 것이고 교회도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건물을 바치고 있는 기둥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기둥 하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기둥 열 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가 그 짐을 짊어져야 하고 결국 목회자가 버티지 못하면 교회가 부실해져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3) 교회 살림을 돌아봐야 한다(2,3절). 
   
2절에 보면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접대는 성경 각주에 보면 ‘재정 출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사는 교회의 살림살이를 돌아보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바로 믿는 우리들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의 살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직분자들은 더욱 교회 살림살이를 귀하게 여기고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물건은 성물입니다. 강대상과 예배당 의자 그리고 강단의 마이크와 악기들이 성물이듯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 심지어 종이 한 장도 성물입니다. 그래서 귀하게 여기고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살림을 돌보라고 직분을 맡긴 줄 아시고 교회의 재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교회의 물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부족하면 보충하고, 고장 났으면 고쳐놓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채워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교회에 도둑이 들어서 키보드 하나를 들고 가벼렸습니다.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도둑은 사람의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함부로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큰 물건만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물건 하나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의 전기를 아끼는 것은 하나님의 살림을 아끼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면서 사용하는 고춧가루도 소금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함부로 막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집사님 중에 한분이 교회에서 김치를 담는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고춧가루와 교회 소금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입니다. 집이 좁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교회에서 김치를 담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고춧가루와 교회 소금을 자기 김치를 담는데 쓰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 되겠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자동차도 성물입니다.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게 되면 기름도 채워두어야 하고 감사헌금도 좀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남의 자동차를 쓰면 기름을 채우고 사례를 하지 않습니까? 교회 자동차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무슨 일을 할 때 가능하면 교회 재정을 쓰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서 회식을 한다면 회원들끼리 십시일반으로 처리하든지 부서장이 짐을 지어야 합니다. 전에 우리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강도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다녔던 교회 장로님이 성가대 회식 시켜준다고 1인분에 몇 만원 하는 비싼 식당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먹게 하고 식대를 교회 재정에서 처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 살림은 하나님의 집 살림입니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없지만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 다른 일을 하면서라도 교회의 재정을 소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교회 살림을 돌아봐야 합니다. 
 
4) 교회부흥을 힘써야 한다(7절). 

사도행전을 보면 좋은 직분자가 세워진 후에는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 1장에 보면 맛디아가 사도의 수에 들어가고 난 후에 행 2장에서 성령께서 임하시고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부흥이 일어납니다. 본문에서는 일곱집사가 세워진 후에 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행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세워지면서 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부흥은 결국 전도운동입니다. 행 2장의 부흥은 베드로의 전도를 통해서 일어났고, 본문의 부흥은 스데반과 빌립의 전도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본문 바로 뒷부분인 8절 이하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전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9장의 부흥 역시 변화된 사울의 전도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9:20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교회의 직분자들이 힘써야 할 것은 전도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박재열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은혜롭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은혜 많이 받으셨지요? 그러셨을 겁니다.
   
박목사님께서 우리는 일꾼인데 무슨 일꾼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일꾼, 교회의 일꾼, 복음의 일꾼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왼만하면 복주신다”고 했고, 특별히 전도 작정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성도를 일으켜서 추수감사절 까지 2명이상 전도하거나 전도를 못하면 100만 원 이상 헌금할 사람만 앉으라고 했는데 제가 보니 모든 성도들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모두가 다 전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줄로 믿습니다. 박목사님이 새로운 인사를 하나 가르쳐주었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그 인사를 예배시간마다 하라고 하시더군요. 순종해서 한번 해 봅시다. 제가 “할렐루야, 전도합시다”라고 하면 여러분은 손가락 2개를 펴고 “할렐루야, 2명 이상”이라고 인사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전도합시다”, “할렐루야, 2명 이상” 교회의 직분자는 전도를 통해서 교회 부흥에 힘을 써야 합니다. 모두가 금년에는 2명 이상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2. 직분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직분자라고 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목표는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의 조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어떤 직분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성령충만한 사람이다(3절). 
   
3절에 보니 직분자의 첫 번째 조건이 성령충만입니다. 직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역사 없이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슥 4:6에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문자적인 뜻은 성령이 어떤 사람 속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충만의 비결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 없이 성령충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공기가 내 안에 가득하려면 숨을 들어 마셔야 하듯이 성령충만하려면 성령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마시는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교회에 공식적으로 성령께서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는데 그 때 120문도가 성령이 역사하시기 까지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잖아요. 행 1:14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가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성령충만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해야 변화되고, 성령충만해야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충만해야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데 그 성령충만의 비결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직분자는 성령충만해야 하고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3절). 
   
3절에서 직분자의 두 번째 조건이 나오는데 지혜충만입니다. 성경적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잠 9:10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화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가 충만한 것인데 그럼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경외는 히브리어로 ‘이르아’라는 말인데 그 뜻은 ‘두려움’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마치 아버지를 두려워하면 아버지 앞에서 언행심사를 주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느 정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포에 질려서 덜덜 떨어서는 안 되지만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 앞에서는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엄마 앞에서는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하다가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장수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식해서 사울에게 칼을 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지혜가 충만한 직분자는 언행심사를 조심합니다. 사람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해서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활이 경건해지고 대인관계에서 무리하지 않는 것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경건한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은 너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생각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임재의식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3) 칭찬 듣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3절). 
   
3절에 보니 직분자의 세 번째 조건은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칭찬 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문맥적으로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면 칭찬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직분자가 칭찬 듣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살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가 잘못 살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하는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인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그렇습니다. 한번은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간디가 유색인종이라고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또 간디가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인데 부끄럽게 살았던가봅니다. 간디가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가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간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칭찬 듣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5절). 
   
5절에 보니 사도들이 제시한 조건 말고 성도들이 안수 집사를 세우면서 어떤 사람을 세웠는가를 말해줍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직분자가 믿음이 있어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드리죠. 하나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일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제나 상식적인 일만을 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상식 밖의 일을 명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없다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날은 저물어가고 사람들은 배가 고픈 상태입니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 좋은 제자가 계산을 해보니 200 데나리온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2천만 원 정도입니다. 계산으로는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믿음으로 도시락을 내놓은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아이가 내놓은 도시락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떼어주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5천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계산이 안 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서 먼저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계산이 나오면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라고 하면 건너는 것입니다. 요단 물이 넘쳐도 믿음으로 밟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 없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광야 신앙과 가나안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광야 신앙은 먼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들에게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홍해를 갈라놓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신앙은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밟으니 후에 하나님께서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여리고를 도니 하나님께서 그후에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광야의 신앙체험은 믿음이 부족해도 가능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신앙체험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요? 우리가 먼저 순종해야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순종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 3:13에 보면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지위는 명예입니다.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의 길이 활짝 열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면 사장님 앞에 서는 게 자신감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데 담대해 질 것입니다. 사장님도 그 사람이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여 회사에 이익을 끼치니 그가 구하는 것을 풍성하게 공급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면 믿음의 큰 담력을 얻게 되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게 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 4:16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여 믿음의 큰 담력을 얻으시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누려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겁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서...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이 귀한 것입니다.
  
부산에 사는 교인이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매우 괴로워서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갔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오죽 괴로우면 자살까지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그 바위가 얼마나 우악스럽게 크던지 뛰어내리면 너무 아프겠더랍니다. 그래서 감히 자살을 못하고 밑에만 계속 내려다보고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 해가 지는 겁니다. 석양이 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랍니다. “너는 왜 사니? 돈 때문에 사니? 돈이 네 인생의 목적이니?” 그가 대답합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제가 그래도 믿음은 적으나 그리스도인인데 어떻게 제가 돈을 목적으로 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네가 왜 죽으려고 하니? 지금 돈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것 아니니?” 그 때 이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삶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돈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구나! 그까짓 사업 망해서 아파트 다 처분하고 사글세방으로 들어가면 어떤가! 하나님이 건강 주시니 감사하고, 살아있는 것 감사한 것이지...’ 그는 완전히 거듭나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본질을 깨닫고 나니 ‘아! 그렇지, 내가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이것 하나를 깨달으니까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민하고 상처 받고 좌절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돈 때문입니까? 자존심 때문입니까? 명예 때문입니까? 그 외에 어떤 문제 때문에 시험이 되고 낙심을 해도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시간도, 건강도, 재능도, 직분도 주신 것입니다.
2013년도에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맡겨진 것에 충성하시는 해가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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