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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좋은 일을 한 여인 (잠 14:1-2, 막 14:3-6) - 여전도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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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좋은 일을 한 여인 (잠 14:1-2, 막 14:3-6)
  
유대인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룩함을 열망하는 한 젊은이가 랍비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신성함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젊은이는 선행과 절제, 금욕생활을 하며, 음식도 물도 먹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육체적 유혹을 극복하기 위하여 눈밭 위나 가시덩굴 위를 구르는 고행을 통하여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랍비는 잠시 침묵을 하더니 창문 쪽을 바라보며 주인에게 끌려가는 늙은 말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식과 물을 먹지 못했네. 사람들을 위해 일만 죽으라고 하지만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있네. 종종 눈밭 위을 걷고 덩굴 위를 딩굴고, 자주 채찍에 맞고 있네. 그러니 자네는 말이지 성자가 아니네”. 

성스러움을 금욕과 동일시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선행과 미덕을 고행과 동일시하는 무식함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좋은 일, 선행, 미덕이 무엇이냐 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 예수님과 관련되는 주님을 위한 일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사람은 누구나 선을 찾는데 최고의 선은 행복, 헬라말로 ‘유데모니아’라 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을 도(道)라 하였습니다. 성경 헬라어에서 착하다 혹은 선하는 말을 가리키는 ‘아가도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종교적, 윤리적 의미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또 다른 단어는 ‘칼로스’라는 단어인데 인간관계 속의 선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 혹은 좋은 일이란 생명이나 진리와 연관된 것들입니다. 
  
C. S. 루이스는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최고로 좋은 대상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일은 주님과 관계되는 일입니다. 생명의 주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대한 우리의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일은 온전한 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온전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이 착한 일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삼서 1:11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좋은 일은 하나님께 대한 일입니다. 
  
베다니 한센병자 시몬의 집에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이전에 한센병에 걸렸다가 낳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라고 요한복음에서는 말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옥합을 가져와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왕이 즉위할 때에 기름을 붓는데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대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목격하고 분을 내었습니다.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책망하였고, 오히려 이 여인이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하여 좋은 일을 한 여인에게서 배우는 여전도회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께 드리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4:4에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한 어떤 사람은 여인의 낭비적 행위에 분노를 표시하였습니다. 이 돈 같으면 1년분의 품삯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그 돈을 나눠 줄 수 있었을 것이며 허비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8에는 “제자들이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라고 적고 있고, 요한복음 12:4에는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유다가 말하되”라고 적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기름을 붓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화를 낸 것은 가룟유다가 시작하여 제자들이 합세하였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분노하는 것은 금방 전염이 됩니다. 좋지 않은 말과 유언비어는 좋은 말보다 훨씬 빨리 전달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제자들의 합당한 관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무감각 속에는 가룟유다의 탐욕이 숨겨져 있습니다. 무감각과 탐욕이 오해를 부르고, 분노를 일으킨 것입니다. 세상에는 동정심을 빙자한 탐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빙자한 거짓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동정하는 척, 사랑이 많은 척하는 위선적 그리스도인은 늘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드린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께 드려봤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에 비해볼 때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섯 달란트는 엄청난 돈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남겨 열 달란트를 가지고와도 하나님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하시는 일에 비해보면 지극히 적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소리치는 사람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 소리가 허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입성하시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계시는 주님께 향유를 가지고 새벽에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새벽 수고는 허비가 아닙니다. 
  
교회에 드리는 헌금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우리가 진 죄의 빚을 다 갚으셨다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는데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엄청난 구원을 얻고도 주님께 드리는 것을 허비라고 생각하고 아까워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대가를 치루기 위한 어떤 일도 허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봉헌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은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힘도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반드시 해야 할 구원의 결과이며, 하늘나라에 가서 자랑거리이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6:20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부요한 자가 허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마음대로 쓰는 것은 허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이 부자는 재물도, 생명도, 시간도 다 허비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랑만 하다가 삶을 끝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허비한 삶입니까? 
  
전기나 물을 예사로 허비하기고 합니다. 금쪽같은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 허비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에너지는 지구촌 모두를 위하여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것인 교회에 나오는 시간, 예배하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은 결코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이 나라를 위해 군대 복무하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있어야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군 생활이 유익한 시간, 얻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합니다.  
  
베네치아의 어느 귀족이 자신이 주문한 조각을 완성한 조각가에게 “그대는 열흘 만에 만든 조그마한 흉상 하나를 50제키노(베네치아의 금화 단위)나 내라고 요구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조각가는 대답하기를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흉상을 열흘 만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술의 가치를 알면 그 돈을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아까울리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치를 알면 그 이상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허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풍성하고, 펑펑 마음대로 쓰면서 남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인색한 것이야말로 허비하는 삶입니다. 
  
볼프 로터의 ‘아낌없이 쓰기’라는 글에는 ‘아낌없이 쓰는 것’과 ‘낭비하는 것’을 구분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창출함이 없이 뭔가를 소비하는 것을 그는 낭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위한 목적 없이 쓰는 것은 낭비라고 저는 규정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낌없이 쓰셨습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네”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쓰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낌없이 드리기를 기대하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라고 찬송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5에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한 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탐욕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사람은 중요한 것과 위급한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그녀의 행동의 뜻을 알면 삼백 데나리온이 아까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알지 못하고 준비조차 하지 않는 제자들에 비해보면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가치도, 장례의 의미도 전혀 알지 못하기에 이런 비난과 책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돼지 2천 마리에 들어가게 하셔서 돼지가 언덕 아래로 떨어져 몰사했습니다. 돼지 한 마리의 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으로 돼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편하게 돼지 한 마리의 값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친다면 돼지 2,000마리는 2,000데나리온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사람의 값이 2,000데나리온인데 예수님의 값이 300데나리온도 안 되겠습니까? 그 돈 300데나리온이 그렇게 아깝고 낭비하는 돈입니까? 이런 비난은 믿음의 분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면 300데나리온은 조금도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림은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덜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쓸 데 없는  논쟁이고, 싸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 아니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보다 우선적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최우선입니다. 
  
화재가 난 집에 돈이나 귀한 물건을 가지러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목숨을 잃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보면 공통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인류의 유물을 돈으로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물을 탐욕으로 가지려다 가지지도 못하고 죽는 것을 봅니다. 돈 때문에 생명을 허비한 것입니다. 
  
잠언 22:1에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가룟유다와 제자들은 돈으로 가치를 따졌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돈이 아니라 영혼으로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바라바를 놓아준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생명과 사망을 바꾼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어리석음은 아담의 어리석은 선택을 대물림한 것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의 어리석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박게 하면서 “피 값을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피 값을 받았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에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1,900년 동안 나라 없이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에 다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팔레스타인, 아랍국들과 끊임없이 전쟁과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죽인 피의 값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설교하면서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합니다. 메시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죽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님의 구원을 얻기를 간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말을 가슴에 새겨들은 사람이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소중한 3,000명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보와 전쟁’이란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가보니 다 이아몬드를 가지고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다이아몬드를 가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후에 아프리카사람들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치를 알고 난 후에는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쟁을 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사람들이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많은 아프리카사람이 죽었습니다. 가치를 지키려면 비난도 받고 때로는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가치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2012년 말 현재 세계 각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인터브랜드’라는 데서 발표하였습니다. 브랜드 가치 1위는 코카콜라, 2위는 애플, 3위는 IBM, 4위는 구글, 5위는 마이크로소프트, 6위는 GE, 7위는 맥도날드, 8위는 인텔이고, 9위가 삼성입니다. 현대자동차는 53위이고, 기아자동차는 87위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100위 안에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돈이 가치가 아니라 가치가 돈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돈을 가치로 아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서 개신교인의 가치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개신교인의 가치관의 순위가 건강, 돈, 믿음의 순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관 같으면 한국교회 개신교인들이 가룟유다를 비난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건강이 제일 가치이고, 돈이 믿음보다 앞서는 가치입니까? 건강을 지키려고 예배 대신 골프나 등산을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는 찬송이 입의 노래가 아니라 마음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300데나리온과 예수님을 바꾸지 마십시오! 생명을 돈으로 사지 마십시오. 
  
2세기의 ‘디오그네터스 서신’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에 풍성했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행악자로 처벌받았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 좋은 일에는 비난이 따릅니다. 좋은 일에는 처벌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일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하지만 좋은 일이 무슨 일인가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이제 제가 해답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좋은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주님께 좋은 일하는 자는 이런 좋은 일들이 매일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인정이 많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선한 일을 베푸는 것에 자신의 행복의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크리스천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 좋은 행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한 것을 알고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전도회 주일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여성들이 여전도회를 통하여 전도하고, 봉사하고, 교제하는 충성스런 여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전도회 모든 회원들이 주님을 위한 좋은 일을 도모하는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가장 값진 옥합을 깨트릴 줄 아는 사랑이 풍성한 여성이 됩시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림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구원의 가치를 전파하는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의 가치를 기억하고, 생명을 얻은 것을 감사하며 예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사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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