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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사명에 충실하기 (요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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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명에 충실하기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7절]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현장에서 다시 부르시는 장면,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기 전에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다는 것이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관계를 확인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사역의 짐, 아니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왜일까요? 베드로가 그 일을 감당할 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사명에 충실함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최고의 사명은 나의 부르심의 귀함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부르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한번 깨물어 봅시다. 어는 손가락이 가장 안 아픈가요? 어느 손가락이 가장 소중한가요?
지혜 있는 사람은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장 벤그리온도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유를 묻습니다. 그는 “키브츠 농장에서 일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상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땅콩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명이 무엇인가요?
사명을 찾아가는 것도 참 중요한데, 지금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지는 않나요?
베드로를 보세요.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이 새로운 것인가요? 아니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이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이미 그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 말씀하시며,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다시 손가락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대로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은 견고함과 인내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곳에서 충성스럽게 맡겨진 역할을 해낼 때입니다.


관계에서…

오늘 또 하나의 관점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두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베드로가 왜 세 번째는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대답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상상력을 가지고 말씀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베드로와의 사이에서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는 사명을 주실 수 없었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세 번씩이나 물은 것은 사랑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너무 쉬운 사랑의 고백은 감정적일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나 사랑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의지적은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뼈아픈 질문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 소모하거라.”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고백하지 말고 얼마나 많은 놀라운 계시를 받았는지도 말하지 말고, 그저 나의 양을 먹이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 중에서는 지독하게 웃긴 양도 있고 질기도록 말 안 듣는 양도 있고 더러운 양, 이상한 양, 대항하며 들이받는 양, 그리고 다른 길로 헤매는 양들이 있는데, 이들을 다 사랑하며 자신을 다 소모하기까지 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 소모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왜 사랑의 관계가 중요한가요?
이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나의 자연적인 기질이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나의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사명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사명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랑에 충성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그 일이, 사랑하기 때문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제 사명이 무엇인가요?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제가 충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아시겠지요?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충성을 다하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사랑에 헌신하면 되는 것이죠. 우리가 만일 오늘도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면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늘 고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올바른 충성인지 모호한 것이죠. 그 방향을 가장 명확히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제가 인도네시아 선교사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신 아내가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합니다. 제 것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스튜어디스를 5번이나 불렀습니다. 어떻게 쓰느냐고 묻고, 제가 가르쳐줘도 의심이 가는 모양입니다. 틀렸다고 다시 달라고 부르고, 볼펜이 떨어졌다고 부르고, 바꿔 준 서류에 고추장이 묻었다고 부르고…. 옆에 있는데 확 빼앗아 제가 쓰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아내를 무시하거나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스튜어디스는 한번 보고 말 사람이지만 아내는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감정에 의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방향이 정해지면 인내와 충성 행동이 결정됩니다.

이해가 되나요?
주님께서 사명을 주시기 전에 관계를 묻고 확인하시는 이유는 앞으로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는데 올바를 방향을 묻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명에 충실한가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면 모든 정성과 사랑이 빗나가는 것이죠.
수년 전 기둥교회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강아지 두 마리가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관리를 맡은 분에게 물었답니다. 누구 개인지? 그랬더니 그 관리 집사님이 데려다 키우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게 키우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런데 그 개의 이름이 “수육과 전골”입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날 무렵 그렇게 사랑하던 개가 사라져 버린 것이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아무리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도 그 목적이 무엇이냐의 문제 아닌가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그렇게 사랑하고 정성을 다하는 삶의 목적, 최고의 사명이 무엇인가요?
존 맥스웰은 그의 리더십 책에서 진정한 영향력에 대하여 이렇게 구별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이란 그 사람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power)의, 어떤 직위(position), 전문성(professional), 혹은 경험(practice)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미국에서 현역시절 가장 인기가 없었던 사람이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지금, 그는 가장 활발하게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George Bush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휘둘렀지만, 가장 인기 없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죠.
우리는 때때로 사명자가 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경험과 전문성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문성(professional)과 경험(practice)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명을 좌우하지는 못합니다.


사명의 장애물!

리사 비비어의 책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라는 책에 아주 인상적인 글귀가 있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
우리가 최고의 사명자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있다면 바로 과거의 기억입니다. 아무리 좋은 과거의 기억도 미래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됩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좋지 않은 기억이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이죠.

요즘은 페이스북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습니다. 꾸준히 생각을 나누다 보니, 더 좋은 생각을 제가 배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분이 참 좋은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예전에 이어령 씨가 “백미러는 전진하기 위해 가끔 보는 거울”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이문열 씨의 [요서기]라는 책에서는 “과거는 이제가 아니니 따지지 말고 지금은 원인이 과거에 있었기에 탓하지 말라!”라고 했던 것도 기억나고요.

그렇다면 미래는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꼭 바라보아야 할 것이겠지요.
어리석은 소견 몇 자 적어봤습니다^^

미국에서 '토크 쇼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2004년 9월 13일 ‘꿈은 이루어진다(Wildest Dreams)’라는 주제로 깜짝 쇼를 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고물차를 바꾸지 못하는 사람에게 새 차를 선물하기로 하고 미국 전역에서 ‘새 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연을 가진 276명의 사람이 방청객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방청객 중 11명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무대로 불러올려 새 차를 선물했습니다. 윈프리는 이어 나머지 방청객 265명에게 작은 상자를 나눠주고 “그중 하나에는 마지막으로 드리는 12번째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청객들이 오프라의 신호에 따라 뚜껑을 열자 모든 상자 안에 새 자동차 열쇠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윈프리는 펄쩍펄쩍 뛰며 “모두 차를 받았어요!”라고 외쳤고, 방청석에서는 “오, 맙소사!” “고맙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등 감탄사가 연발됐습니다. 방청객 276명 전원이 3,000만 원 대의 제너럴모터스(GM)의 스포츠 세단인 폰티악 G6를 한 대씩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녀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였고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습니다. 아이는 몇 개월 만에 죽었고 그녀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비만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중 1위로 선정되기도 했고 '하포 엔터테이먼트 그룹'의 대표, 6억 달러(한화 8,775억)의 갑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그녀의 힘의 원동력은 가난과 아픔을 자신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성경을 읽으며 모세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익이나 의무 책임을 뛰어넘는 사명은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서 부활하신 후에도 옛 삶으로 돌아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버렸을까요? 그들이 수없이 많은 기적을 보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도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사명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헌신과 열심히 정말 ‘사명’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주님이 하신 대로 따르려는 것보다 이렇게 하면 주님이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내 생각이 아니라 그 일을 명하시는 분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래디컬 투게더]라는 책 첫 chapter에 이런 글귀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를 위해 ‘우리의 최선’을 포기하라!
교회에서 하는 ‘좋은’ 일이 바른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명이라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충성이 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고, 내가 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백성을 인도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경험이나 재주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주님은 확실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최고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과 진리에 내재된 권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난해 가을 멋진 영화가 하나 있었죠. “광해, 왕이 된 남자”
제 페북에 어떤 분이 참 멋진 대사를 남겨주었습니다. 추석 때 광해를 보고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기며 보았습니다.

마지막 장면
배를 타고 떠날 때 
가짜 왕은 정중하게 인사한 도승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 흐르는 눈물 끝에
환하게 웃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 했소?

왕이 되고 싶소.
그러나
나를 위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만 두겠소

이 영화가 참 멋졌던 것은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참다운 지도자를 갈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참 목말라하는 것이 있다면 진정한 사명자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봐도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사명보다는 욕망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늘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념이 이 나라를 앞서는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지요.

“정치”하면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뭔가 튀어보려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나와야 주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세요, 누군가를 칭찬하고, 누군가를 위해 대신 비난을 감수하고 돌을 맞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너무 쉽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비난에 대하여 너무 쉽게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자의 모습보다는 욕망의 찌꺼기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왕이 된 남자 광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원치 않는 이유로 보름 동안 왕 노릇을 하며 그는 정말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되고 싶어도 누군가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포기하는 모습에서 정말 생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참 쉽게 대의를 위해 대가를 치르고 희생해야 한다고 하지만, 작은 생명 하나를 아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큰 생명을 아끼겠습니까? 단지 욕망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위선에 지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욕망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종종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제 큰일을 하셔야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에게 목회보다 더 큰 일을 없습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해야 이 세상이 바뀝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제 생각에는, 자신의 사명과 본분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최고의 사명자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일, 지금 우리가 속한 곳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시고 “양을 먹이라!”라고 맡겨 주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 놀라운 일은 최고이신 그분을 사랑하면 최고의 사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상 속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찬양하다가도 또 우리의 일상에 파묻혀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분명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사명이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찮은 일들이 거룩하게 변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거룩함이 이 세상을 바꾸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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