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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 나그네임을 아십니까? (벧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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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나그네임을 아십니까? (벧전 1:1-2)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뉘엿뉘엿 해가 지기에 쉬어 가기 위해서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궁궐 같은 큰 집이 있어 나그네는 큰 소리로 주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저는 길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만 묵고 갔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곳은 여관이 아니요. 저 건너편으로 가면 여관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시오.” 라며 거절을 했습니다. 

그때 나그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주인장 하나 물어봅시다. 이 큰집에 언제부터 살으셨소?” “예, 나로부터 16대 할아버지 때부터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집에서 16대가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면 그 16대가 다 지금 생존해 계신가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신거요. 우리 조상들은 다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러자 나그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집도 여관집과 뭐가 다르단 말이오?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 16대가 그렇게 했지 않았소? 그러니 나도 하룻밤 묵고 간들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이 재치 있는 나그네를 하룻밤을 묵게 하고 잘 대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잠시 살다가 떠나야 하는 여인숙과 같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6-70년대 유행했던 ‘하숙생’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최희준 씨가 불렀는데,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제가 유행가는 잘 모릅니다만 이 노래는 잘 압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제가 다니던 철학과 주제가였기 때문입니다. 철학과 학생들이 술을 참 자주 잘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면 꼭 마지막은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야 그 술자리가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사입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이 표현은 어쩌면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이 만들어낸 가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인생이 나그네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에게 이 편지을 쓴다’고 말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를 성경언어로는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대인들은 흩어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후 그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세기 12:1)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나그네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고 말씀하신 가나안에 와서 살면서도 그는 그 땅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흉년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을 다녀와야 했고, 그랄 땅에 머물며 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나그네’였다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137세 때 일입니다. 아내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가 필요했습니다. 그 때까지 아브라함은 내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헷 사람에게서 돈을 주고 매장지를 사게 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입니다.”(창세기 23: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산 지도 60년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나그네였습니다.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흩어진 나그네인 디아스포라가 된 것은 주전 8세기부터입니다. 주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그 지역이 앗수르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앗수르는 정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 이방나라 사람들을 그 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물을 머금고 고향 땅을 떠나 ‘흩어진 나그네 - 디아스포라’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135년 후인 주전 586년에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에도 그 땅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할 때 바벨론의 침공을 두려워한 수많은 사람들은 애굽으로 피신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다.’(열왕기하 24:14)고 표현될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 땅을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고향 땅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애굽 등지에 머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전 4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헬라제국을 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보다 더욱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와 학문, 그리고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세계는 급속도로 헬라화 되어갔고, 헬라제국이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면서 유대인들이 역시 자연스럽게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제국이 망하고 로마 제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주전 1세기 말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등 세계 수많은 곳들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생겨났습니다. 로마제국의 3대 도시라고 알려진 곳이 로마와 안디옥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인데, 그 중에서 안디옥은 유대인들이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그 곳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디아스포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후 1세기 예수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잘 보여주듯이, 초대교회에 심한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스데반이 죽임 당한 이후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 세계 각지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사도행전 8: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되어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에도 낯선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아무리 헬라화된 문화가 세계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로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삶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상당 기간 고향을 떠날 준비를 한 후에 기회가 되었을 때 떠난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불기 시작한 박해의 바람에 그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정처 없이 고향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신앙 때문입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나 바벨론에 의해서 남 유다가 멸망당할 때에는 침략자들에 의해서 강제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가야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고향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족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삶의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하는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선택해서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그 고생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던 것처럼, 그들 역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흩어진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고향에 머물며 좀 더 편안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향을 포기하고 고생스러운 나그네의 삶을 선택할 것이냐?’하는 선택의 순간에 그들은 평안한 삶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나그네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나그네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인다운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결코 많은 것을 가지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삽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은 오히려 불편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온 한 여행자가 유명한 랍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가 랍비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유명한 랍비의 집에는 책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 그리고 간단한 침대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여행자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랍이여, 당신의 가구는 어디에 있나요?” 그러자 랍비는 대답 대신에 오히려 여행자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가구는 어디 있나요? 당신은 왜 가구를 가지고 오지 않았나요?” 랍비의 반문에 여행자는 당황해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가구라니요? 저는 미국에서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일 뿐입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나도 그렇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모두 여행자입니다. 나그네입니다. 여행자나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사 모으지도 않습니다. 많은 것을 사 모아봐야 그것은 곧 짐이 될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보다도 나그네의 삶을 사는 현재에 더 미련을 두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말씀하실 때 우리가 많은 것 움켜쥐고 갈 수 없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그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흩어진 나그네가 되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신앙을 위해서 선택한 그 길에 가지고 갈 것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많이 가져갈 것도 없겠거니와, 많이 가져간다 한들 그게 그들에게 오히려 무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여 갔을 뿐입니다. 

그랬기에 4절에 보면 그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나그네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그렇게 순종하여 기꺼이 나그네가 된 그들의 믿음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기꺼이 흩어진 나그네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하신 것을 꼭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며 산다면,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이 많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한 기업을 손에 얻기 위해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움켜쥐고 있는 세상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은 더 많이 움켜쥐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2: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 - 육체의 욕심에 끌려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육체의 욕심에 끌려 살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의 뜻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 흩어진 사람’입니다. 그들이 쫓겨나듯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간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손에, 그들의 심장에, 그들의 영혼 속에 하늘의 씨앗을 품고 가서 그 씨앗을 세계 곳곳에 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수많은 신앙인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나그네인 그들은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8:4절에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그렇습니다. 흩어진 그들의 심장에는 복음이 들어 있습니다.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 복음의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가는 곳마다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그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흩어진 나그네로 사는 그 삶이 결코 평탄하지는 않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고향에서 살던 삶도 결코 풍족한 삶은 아닐진대, 고향을 떠나 흩어진 나그네로 사는 삶인들 어찌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분명 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도 겪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 고난을 겪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흩어진 나그네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고속도로와 같이 만들어주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신앙인이라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나그네로 사는 그 땅에서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을 환대해 줄리 만무합니다. 멸시당하고 미움 받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12절 이하의 말씀에서 그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신앙인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치욕을 당한다면 그것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은 영광의 영입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영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 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흩어져야 합니다. 그 때부터는 우리가 디아스포라가 됩니다. 흩어진 나그네가 됩니다. 신앙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가 되어 많은 고난을 당했던 초대교회 성도들 같지는 않겠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 흩어진 나그네로 산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해야 하기도 하고, 치욕을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흩어지라고 하십니다. 복음의 씨앗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흩어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에 가서 복음의 마음으로 살고, 우리의 직장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도록 말입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서 복음의 씨앗을 세상에 뿌리도록 말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도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12절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흩어진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정말로 힘듭니다. 신앙인이라는 것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신앙인이라는 것 때문에 치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는 결코 우리 신앙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손에 많은 움켜쥐려 해서는 선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려 해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나그네는 나그네다워야 합니다. 나그네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기 위해서는 나그네다워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정한 ‘해외 한인교회를 위한 기도주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주민은 2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간 이주민은 약 740만 명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떠나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오늘의 디아스포라가 약 740만 명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174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한인교회는 약 5천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한 나라입니다. 더울 때에는 무지 덥고, 추울 때에는 무지 춥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 가든 적응을 잘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들의 심장에 복음의 씨앗을 품고 신앙인답게 산다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전령사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지만, 삶을 위해서 흩어진 그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흩어진 나그네가 된 선교사님들과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자신이 원해서 갔든지 원치 않는 일로 인해서 갔든지 이국땅에 정착하며 살고 있는 우리나라 디아스포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있는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그네임을 잊지 마십시다. 신앙인은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이어야만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영원히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나그네임을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곤 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 아래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 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노인의 마음에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돈을 받고 그늘과 샘물을 제공했습니다. 점점 돈이 쌓여가자 노인의 마음에 더욱 큰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더 큰 샘을 파서 더 많은 물이 나오게 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어찌된 일인지 샘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노인은 샘물 주변에 있는 야자수 나무가 물을 다 빨아먹기 때문에 물이 줄어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주변의 야자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렸습니다. 이제 야자수 그늘도 없어졌고, 찾아오는 나그네들도 적어졌습니다. 샘물이 말라버린 것은 당연했습니다. 결국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그네에게 욕심은 자신을 망하게 만드는 거짓된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임을 잊고 살 때 더욱 큰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욕심에 빠져들수록 우리가 나그네임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그곳은 내가 나그네로 사는 곳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곳에 안주하려 하지 말고, 그곳에서 영원한 곳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십시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며 우리 주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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