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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이들에 대한 배려 (레 23:21-22, 마 5: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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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들에 대한 배려 (레 23:21-22, 마 5:40-42)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인심입니다. 정승이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문상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면 쉽게 손을 내밀고 풍성하게 주지만, 유익이 없는 작은이에게는 작은 배려도 없습니다. 
  
성경은 있는 자에게 주라고 하지 않고, 없는 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은 있는 자는 더 많이 주게 되고, 없는 자는 더 안 주게 됩니다. 흔히 이 시대를 양극화 시대라고 합니다만 배려의 양극화 현상도 뚜렷합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니 없는 자는 더 없어지고 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굶주린 자가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 내 것 아니라 상당히 많은 남의 것을 내가 보관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것이 내 것이다” 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남의 것을 내가 가지고 있고, 나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10:8에는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삼으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우선 우리가 거저 받았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가장 소중한 햇볕의 값을 안 내고 우리는 쓰고 있고, 공기도 돈을 지불하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저 받은 사람은 거저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나는 거저 받아놓고 남에게 값을 지불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 형 인간’에 보면 건강하고 장수하는 노인들은 우선 심리적으로 거의 다툼이 없고 낙천적이고 희로애락의 감정기복이 적다고 합니다. 늘 평상심을 유지하고 삽니다. 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고 욕심이 적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한 번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기차 승강장에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에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한 짝도 떨어진 신발이 있는 곳에 던졌습니다. “왜 그렇게 버립니까?” 수행하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는 “누군가 가난한 사람이 저걸 줍는다면 짝이 맞아야 신을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이나 작은이를 위한 마음이 있어야 배려의 순발력도 순간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긍휼이란 말은 동정과 마찬가지로 상대방 옆에서 같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넓게는 친절, 배려, 관용의 뜻도 들어있습니다. 작은이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는 것은 작은이만큼 작아지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작은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친절, 배려, 관용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20:35에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율법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 배운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이 말씀을 잘 배워 작은이에게 우리가 작아져 먼저 손을 내밀고 나의 것을 주므로 주의 말씀처럼 복이 있는 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하는 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2 상반절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라고 합니다. 왜 주라고 하십니까? 내가 가진 것이 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흔쾌하게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과 병행귀인 누가복음 6:30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내 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달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작은이에 대한 풍성한 베풂이 더 나은 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구하는 대로 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대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내게 구하지 말라”, “구해도 안 주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기도할 때마다 “주시옵소서”를 연발하면서 다른 사람이 내게 “주세요” 하는 말을 외면하면 하나님도 나의 말을 외면하시고 내게 안 주신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15:10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고 합니다. 왜 아끼지 말라고 합니까?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은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장 없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고, 보장 없는 요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면 하나님은 내게 주시고, 나는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아는 어느 권사님은 가구를 만드는 분에게 옷장을 주문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옷장을 아무대서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문해서 제작했습니다.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와서 계약금을 주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여 영수증도 없이 계약금을 주었습니다. 권사님의 말을 들은 자녀들은 속은 것이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가구를 만드는 분은 돈이 더 들게 되었다고 하여 권사님은 묻지도 않고 돈을 더 줬습니다. 자녀들은 한 번 속지 두 번이나 속았다고 어머니께 성화였습니다. 그런데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사실은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구 만드는 사람은 소식이 없고 자녀들은 돈만 떼였다고 잊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한참 지나서 옷장을 잘 만들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가구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에는 옷장을 만들지 않고 돈만 떼먹을 생각을 했는데 권사님이 자기를 너무 믿어주니 마음을 바꾸어 만들어 가지고 왔노라고 했습니다. 가구를 만든 그분은 자기 평생에 최고로 정성껏 옷장을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얘기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가구 만드는 분이 권사님을 따라 교회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속더라도 끝까지 믿고 돈을 준 결과가 그 사람을 예수를 믿게까지 한 것입니다. 
  
한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8:22에는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내 것을 나 혼자서 가지고 있으면 하늘에서 벌이 있습니다. 내 것을 작은이들의 것으로 만들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하십니다. 싼 속옷을 달라고 하면 비싼 겉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다닐 때에 겉옷을 한 벌밖에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이상 옷이 없어도 달라면 주어라고 하십니다. 두 벌이 있다면 한 벌을 주고나면 한 벌은 남아 있지만 한 벌밖에 없는데 한 벌을 주고나면 더 이상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라는 명령은 주고나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주고 나면 내게 남은 생명이 없게 되는데 이것이 곧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밤길을 가던 한 중년 남자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난 강도다. 돈 내놔!” 이 남자는 무서웠지만 강도에게 “돈 안 돼, 줄 수 없어.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무서운데. 내가 집 근처에서 강도를 만나 돈을 뺏겼다고 하면 우리 마누라가 믿을 것 같아? 우리 마누라한테 혼나. 안 돼”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강도는 “그래서 못 준다 이거지?”라고 하면서 그 남자의 멱살을 쥐고 한 마디 했습니다. “야! 이놈아, 그럼 내가 오늘 한건도 못하고 집에 가면 우리 마누라가 믿을 것 같아? 나도 집에 가면 마누라한테 쫓겨난다 말야”. 이런 때도 주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주는 자에게 하나님은 넘치게 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특별히 작은이에게 많이 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42 하반절에는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절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왠지 아십니까? 문자적으로 꾸어달라는 대로 다 꾸어주게 되면 누구나 망합니다. 
  
이 말씀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꾸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에는 “남의 빚에 보증서지 말라”, “보증서는 자는 지혜 없는 자이다” 등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 다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입니까? 정말 필요해서 꾸고자하는데 내가 인색하고, 동정심이 결여되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거절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던 로마 수비대는 길 안내자로 혹은 짐 운반자로 민간인을 징발하여 억지로 가게 하였습니다. ‘억지로 가게하다’란 말인 헬라어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있는 ‘징발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기쁘게 해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에 로마 병사에게 붙잡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던 것이 이런 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하물며 작은이에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명기 15:6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라고 합니다. 남에게 꾸지 않고 남을 꾸어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명기 15:8에는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합니다. 꾸지는 말고, 꾸어주라고 성경이 가르침입니다. 
  
칼뱅은 제네바 교회에서 엄격하게 고리대금업자를 배격하였습니다. 사치한 자나, 자유주의자를 철저하게 배격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제네바 사회에도 이런 영향이 넓게 미쳤습니다. 돈을 필요에 따라 꾸어주되 절대 무리한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기독교은행을 설립한다고 교인들을 모아 수십억 원을 가로챈 목사가 구속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소액신용대출을 할 수 있는 은행을 만들겠다고 호언하였습니다. 내용은 좋지만 의도는 사기였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불임설’(Money does not breed)을 주장했습니다. 돈이 돈을 낳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인 주후 325년의 니케아회의에서도 교회나 성직자가 이자를 받은 것을 절대 금지하였습니다. 이런 교회의 관습은 8세기까지 엄격한 로마교회의 법이었습니다. 금리를 부과하는 금융거래를 금지하였습니다. 
  
시편 37:26에는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합니다. 꾸어주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니 그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될 수 있으면 꾸어주세요! 그러나 절대로 높은 이자를 받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영국의 작가 조셉 애디슨은 함께 대화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주 좋은 대화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가 돈을 빌려갔습니다. 돈을 빌려간 다음 친구에게 이상한 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조건 자기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다른 의견을 말하기도 했는데 그 후로는 계속 동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돈을 빌려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친구, 돈을 빨리 갚든지 아니면 제발 내 의견에 반대를 하게”.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꾸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해줘야 합니다. 돈을 꾸어주고 돈을 꾼 것이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주라, 꾸어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내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받은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받은 사람이 편안하게 받을 수 있고, 꾼 사람이 편안하게 꿀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23:22에는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합니다. 항상 가난한 사람,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작은이에게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지킬 법입니다. 
  
아마 누구나 돈을 꾸어달라고 하면 주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내 달라고 하면 쾌히 승낙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돈보다 시간 빌려주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시간을 꾸어주듯 돈을 꾸어주면 분명히 관용하는 성경적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꾸는 사람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것을 꾸어야 하고, 꾼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또한 성경적입니다.  

  
결론 

스톡홀름 올림픽이 1912년에 열렸습니다. 세실 힐리는 호주 최초의 위대한 수영선수입니다. 강력한 라이벌인 미국 팀이 결승전에 지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팀이 지각을 하여 실격을 하면 자기가 자유형 100미터 경기의 사실상 우승후보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팀이 경기시간을 잘 못 통보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후승 후보이지만 힐리는 미국 팀이 경기할 기회를 달라고 심사위원회에 요청하였습니다. 힐리는 자기 팀 대표로 심사위원회에 들어가서 참가하는 미국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사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미국 선수들은 준결승전부터 참가하여 하와이의 수영선수인 듀크 카하나모쿠가 결승전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카하나모쿠는 결승전에서 2미터 차이로 힐리를 제치고 우승하였습니다. 힐리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관중들은 힐리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힐리의 선수생활은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찍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군에 입대하여 1918년에 전사하였던 것입니다. 
  
작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꾸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덕한 마음의 배려입니다. 작은 배려가 가장 따듯한 손길일 수가 있고, 가장 많은 돈일 수도 있습니다. 배려는 그 사람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천천히 걸어주어 내 작은 시간을 주는 것이 배려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내가 돈이 적지만 함께 나누고 작은 음식을 함께 먹어주는 것이 배려입니다. 작은이의 벗은 작은이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이의 편이 되어 그들을 배려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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