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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겠습니다 (시 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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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겠습니다 (시 27:1-6)
    
오늘의 말씀 본문 27: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 우리의 소원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꼭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시27편을 쓰신 다윗왕은 “주님, 저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면서 예배하는 그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는 거하는 그것이었습니다. “내 평생에”라는 말은 예전 성경에는 “내 생전에”라는 말입니다. “내 생명의 모든 날들에”, “한 평생”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왕의 소망은 한 평생 여호와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시11:4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던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합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출25:21-22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주시는데, 지성소의 법궤 뚜껑, 속죄소에서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백성의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를 드립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막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은 사무엘은 부르셨는데, 성막에서 부르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던 중에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성전에 나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가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 때 나이 많은 시므온이란 랍비가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므온이란 분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만났습니까?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성전에서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선지자도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혼하여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었고 팔십사세가 되었습니다. 그 분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 마침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의미 있게, 보람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남편이나 아내조차도 여러분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이다,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찾아야 하지, 남이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내려놓고, 내어버려야 하는 것들은 정리하시고, 오로지 믿음 생활에만 정진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다 버리고 갈 것들인데, 변치않고 닳아없어지지 않는 영원을 붙잡아야 하고, 영원한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결코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이 아닙니다. 인간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3:11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연구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는 사귐으로의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활력의 중심에 계십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사귐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러 앉아 말씀을 받고 있던 시간, 젖 먹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우린 모든 소욕을 내려놓고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여 그냥 기뻐서 주님을 부르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살고 죽는 이유가 되십니다. 그렇게 기도는 사귐의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새벽은 참으로 기도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매일의 시간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벽 시간은 가장 집중력이 높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이소 히로시’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처음 그 책을 보고는 “아침을 다스려라, 아침을 다스리는 자는 인생을 다스린다. 인생을 스스로 리드하고 싶다면 아침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이소 히로시는 그 책에서 사람의 맥박이라는 것이 오전 5시에 가장 빨라지는데, 사람의 맥박이 가장 빨라지는 아침 5시 경은 깊은 잠을 자기에는 적합한 시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잠이 깨는 5시에서 1시간 정도 지난 오전 6시부터 8시까지는 두뇌가 가장 명석해지는 시간인데, 이때의 집중력이나 판단력은 낮 시간의 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침 시간은 하루의 할 일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아침형 정도가 아니라, 새벽형의 사람들입니다. 

막1:35에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정리하면서 기도로 마치셨습니다.

시46:5에는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57:8에서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18:6절에서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여야 하고,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생명의 양식, 빛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의 말씀묵상수련회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요1:35-42 말씀을 가지고 훈련하였습니다. 내용은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 중의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는 한 사람은 안드레라는 제자였으며, 요한복음에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례로 보면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보시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루 전 날에는 예수님이 세례요한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돌이켜 두 사람이 자기를 좇아오는 것을 보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와 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그 날 함께 거하였는데, 오후 4시 경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의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이고, 헬라어-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안드레가 형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 시몬을 보시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이고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베드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훈련을 하는데, 아주 간단하게 간증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 같이 은혜가 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같은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았는데, 다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이 하루 종일 아침부터 오후 4시 경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직장 일에, 세상적인 친구들과, 업무에 매이고 인간관계에 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이 말씀은 그 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있으라”는 말씀은 그 분을 변화시키고, 성숙한 신앙으로 이끌어주고, 놀라운 은혜에 거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12살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예루살렘을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어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아들을 찾았습니다. 

어린 예수님은 여러 선생님들 중에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듣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서 놀랍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보고 놀라며 어머니가 한 말씀하였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스펄젼목사님은 “내가 참석하지 않은 집회에 성령이 임하시면 나만 손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시5:7에 보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집, 성전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면 주의 풍성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전, 성전으로 불러주시는데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힙 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인자라고 하는데, 히브리어의 ‘헤세드’라고 하여 ‘언약적인 사랑’, ‘불변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고, 거룩한 장소, 하나님이 이 지상에 발을 내리시는 장소입니다. 

지성소안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법궤 뚜껑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는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성소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하신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경외하는 것은 예배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건전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은총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린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와서 인사하고 신나게 놀고,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가 용돈을 쥐어줍니다. 손자들이 4명이 명절에 다녀가면 돈 10,000원을 주는데, 4만원이 나갑니다. 할아버지가 용돈 주면서 억지로 주고 아까워하는 할아버지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잠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식과 지혜를 주십니다.

잠19:2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잘 믿으면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십니다. 만족하게 합니다.

시128:1-4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기뻐서 찬송하였습니다. 시120편부터 134편까지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입니다. 그들은 감격 속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찬송은 그 어떤 제사보다 귀한 제사입니다.

히13:15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셨습니다. 

시69:30-31에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것은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적인 암전문의사가 있습니다. 김의신박사입니다. 경건한 크리스천입니다. 텍사스대학교 MD 앤더슨 암센터 종신교수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요, 텍사스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교수요, 경의대학교 의학 전문대학원 석학교수로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의대를 나오고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대학원 박사이십니다. 

우리 몸에는 암세포를 잡아먹는 대표적인 면역세표가 있는데 자연살해세포(NK, Natural Killer Cell)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많으면 암 치료가 되고 암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이 세포의 수치를 조사하였는데, 항상 웃고 즐겁게 사는 사람에게서는 수치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교회 성가대 찬양대원들은 일반인보다 그 수치가 1000배가 높게 나와 김박사도 놀랐다고 합니다. 기쁨 속에서 노래하고, 감사기도하고, 인생을 밝게 사는 사람들은 암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고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내가 먼저 기쁘지 않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찬양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찬송 크게 하다가 목을 버렸다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크게 부르지 않는데, 감격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감격속에 찬송이 살아넘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시23:6에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헨리 나우엔박사가 공동체란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않고 함께 살자고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표리부동하고 배운망덕하고 형편없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않고, 불러주시고 함께 살아가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시84:10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나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여수에서 열린 장신대총동문회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첫날 총회장의 설교도 좋았고, 주제 특강도 좋았고, 장신대 임성빈교수의 강의로 정말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도 좋았습니다. 히든베이 호텔, 바닷가에 지었는데, 10층의 객실에서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다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 잡았고, 잔잔한 바다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방이 넓고 모든 시설이 잘 갖춰진 특급호텔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밤 자고 나올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곳은 내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입니다. 이 땅의 수고를 그치고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우리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 성에 다 들어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 예배당을 들어올 때면 감사와 감격으로 지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지만, 영원한 하늘나라, 내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5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특권을 상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생명의 양식, 빛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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