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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리떡 운동 (삿 7:9-14, 막 6:35-44)

첨부 1


보리떡 운동 (삿 7:9-14, 막 6:35-44)


다이너마이트는 오늘날 온갖 무기의 탄약과 폭탄 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토목공사의 발파 작업 등에 이르기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화약입니다. 
그 다이너마이트는 잘 알려진 대로 노벨이 제일 처음으로 발명했습니다. 
당시 흑색화약보다 더 강력한 폭발물질로서 니트로글리세린이 발견되었지만 이것은 너무나 불안정한 액체 물질이어서 취급 도중에 불의의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노벨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연구와 실험을 하다가 그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놓으면 폭발력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외부적인 충격에 훨씬 더 안전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새로운 화약은 '다이너마이트'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의 어원이 바로 헬라어의 '두나미스'(힘, 권능)입니다. 
  
하여튼 다이너마이트는 그처럼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액체를 규조토라는 흙과 섞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보는 길쭉한 원통 모양의 장약통에 넣기 전에는 그냥 떡처럼 진득진득한 물질입니다. 
실제로 터널 공사 따위를 할 때에도, 발파시킬 암벽에 드릴로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넣은 후에 그 떡처럼 생긴 다이너마이트를 한 움큼씩 손으로 뜯어내어서 그 구멍들 속에 쑤셔 넣은 후에 뇌관을 연결하여 폭파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란 이처럼 겉모습은 '떡'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엄청난 '폭발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냥 '떡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떡'에 불과한데도 그 폭발력은 오히려 다이너마이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보여 주신 보리떡'과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바친 보리떡'이었습니다. 
보리떡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난한 평민들이 먹던 가장 값싼 음식이었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 보리떡 속에 엄청난 '두나미스' 즉 문자 그대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엄청난 파워가 들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청지기 기도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보리떡 운동' 역시 바로 그런 능력을 믿고 또한 체험하고자 시작된 운동입니다. 
이제 교육관 헌관을 내년 3월까지 종결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의 당회는 이 '보리떡 운동'을 이제 전 교우들이 함께 참예하는 '보리떡 헌금'으로 확대하여 시행할 것을 결의하고 지난 주일에 교회 앞에 광고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이 '보리떡 헌금'을 작정하는 주일에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과연 '보리떡 운동'이란 어떠한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드온의 보리떡'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교회가 발휘하게 되는 '필승의 능력'을 확신시켜 줍니다. 

사사기 7장 9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9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10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11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 가에 내려간즉 12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13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14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사기 7장의 내용은 '기드온의 삼백 용사'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십 수만 명의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을 맞이하게 된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소집공고를 내렸을 때에 처음에는 3만 2천 명이 모여들었지만 그것도 물론 미디안 군에 비하면 턱도 없이 모자라는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제1차 '용기 테스트' 및 제2차 '군기 테스트'까지 실시하고 나니 끝까지 남은 군사는 겨우 3백 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은 당연히 걱정이 태산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정예용사들이라 해도 겨우 3백 명밖에 안 되는 전력으로 "메뚜기의 중다함"과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 미디안 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기드온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잘 아시고 친히 그를 격려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9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그날 밤에 미디안 군의 진지를 향하여 야간기습공격을 가하라는 작전 명령을 하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곧 이어서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이라고 하시면서, 그 공격을 실시하기 전에 먼저 기드온으로 하여금 부하 한 명만 데리고 적진으로 몰래 침투해 가도록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통상 그런 침투는 지휘관이 적군의 상황을 직접 정찰함으로써 적절한 작전을 짜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경우는 그런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단신으로 일부러 적진까지 보내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들의 하는 말" 즉 미디안 군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시고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3백 명의 군사를 이끌어야 할 지휘관인 기드온 자신이 불안 초조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우선 그에게 용기와 필승의 확신부터 불어 넣어 주시기 위하여 그런 특별지령을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미디안 군대의 "진 가"에까지 몰래 접근했던 기드온은 그 적군들 중에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는" 것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자기네 진지의 "한 장막"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는" 꿈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꿈 이야기를 들은 다른 미디안 군사가 그 보리떡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기드온의 칼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편의 군대를 몽땅 다 "그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라고 즉시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로 보리떡같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을 완전히 궤멸시켜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적군이 꾼 꿈을 통해 기드온에게 확신시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보리떡의 꿈'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있던 '두려운' 마음은 깨끗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용기백배 사기충천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나서 즉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올리고서는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와서 그 3백 용사들에게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적군이 꾼 '보리떡의 꿈'으로써 기드온과 그의 군대에게 필승의 확신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즉 '아무리 너희들이 겨우 3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너희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오히려 너희들이 두려워하는 적군이야말로 진짜로 너희들을 인하여 벌벌 떨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였기 때문이다.'라고 크게 사기 진작을 시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경향교회 역시 지금까지 40년을 지내오는 동안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어 보이는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즉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가 곧 망하게 될 것'처럼 보이는 일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러다가는 경향교회가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던 일들을 여러 차례 겪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창고 하나를 빌리는 월세조차 감당하기에 벅찼던 을지로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소위 '서울의 맨해튼'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싼 동네였던 여의도로 교회를 옮길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런 위기는 자체 예배당도 없는 판에 고려신학교를 복교하면서 그 대부분의 지원을 우리 경향교회가 다 감당해야 했을 때라든지, 상도동의 관악산 기슭에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다가 주민들의 방해로 인하여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을 때에도 있었습니다. 

이십 몇 년 전에 바오로 2세가 역대 교황 중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에 오로지 우리 경향교회가 선두에 나서서 천주교의 이단성을 공포하는 선언문을 신문 광고에 내었을 때에도 실로 '메뚜기의 중다함' 같은 미디안 군을 '기드온과 3백 용사'가 맞서야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우리 교회가 '단군상 건립 반대 성명'이나 'WCC 한국 총회 개최 반대 운동'을 주창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상 우리 교단보다 훨씬 더 큰 보수 교단들이 당연히 앞장섰어야 했던 일을 이 '보리떡' 같이 미미한 우리 교단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경향학원을 인수하고 강서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에는 정말 누가 보아도 '절대로 안 될 일'일 뿐이었습니다. 
수백억 원이 드는 공사였지만 우리의 현실은 단 돈 1억 원의 현금도 없는, 그야말로 '보리떡'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때마침 'IMF'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왔으니, '이러다가는 경향교회도 끝나고 만다.'는 소리가 우리 교회 안에서조차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향교회는 그 모든 절대 중과부적의 싸움을 놀랍게도 다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우리 손에 붙여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자신은 타 교단이나 다른 대형교회에 비하면 여전히 '보리떡'에 불과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나 종북좌파 무리 등의 '현대판 미디안 군대'를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무너지게' 만드는 선봉대로 사용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경향교회가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보다는 다른 교회와 다른 교단이 우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적군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경향교회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교육관 헌관'은 경향교회가 치러왔던 과거의 전투에 비하면 오히려 '약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마지막 한 바퀴'라서 힘이 좀 더 들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보리떡 꿈'을 통하여 이것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우리에게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받은 이 '평화시대의 순교적 전투'에서 꼭 함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린아이의 보리떡'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성도에게 따라오게 되는 '폭발적인 역사'를 약속해 줍니다. 

마가복음 6장 35절 이하 44절에 "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우리가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모여든 무리들이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았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곳은 빈들이요"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그 주변에는 식품점이나 식당은 고사하고 어떻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인가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의 판단으로는 가장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법을 예수님께 건의하기를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천만뜻밖에도 "사람들을 마을로 보낼 필요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디베랴 언덕에서 당면하게 된 문제에 대하여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자기네들 자신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만약에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단체로 음식을 산다면 '이백 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7개월 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 필요했는데, 물론 그들 수중에 그런 거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아니 혹시 그럴 능력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렇게 해주어야 할 필요나 의무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생각에는 오로지 '무리를 보내어 직접 사 먹게 하는' '더치페이'(dutch pay)만이 가장 합리적이고도 최선의 해결책으로만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지시를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무리를 다 먹이기 위해서는 '2백 데나리온'이 있어야 한다고 정확하게 계산을 해 놓고, 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판단까지 이미 다 내려 놓고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지금 현재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알아보라'고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단 "가서 알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요 6:9상). 말하자면 오늘날의 '보리밥과 김치' 정도의 가장 값싸고 간단한 도시락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남자 오천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 수천 명은 되었을 많은 사람들에게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습니다. 
즉 '막대한 양의 필요'에 비하여 '지극히 적은 양의 자원'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찾아낸 제자가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9하)라고 말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당신께로 가져오게 하신 후에 즉시 식사할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셨는데,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게" 한 것은 배식을 질서 있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앉다'라고 번역된 말은 '기대어 비스듬히 앉다'(recline)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당시의 관습은 제자가 스승에게 배울 때에는 '서서' 그 가르침을 들어야 했고, 식사할 때에는 '비스듬히 누워서'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지금까지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서' 있던 무리를 이제 잔디 위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야말로 '피크닉 잔칫상'을 차려 주시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축사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는 '축복하다'이지만, 그 음식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give thanks)는 뜻도 포함됩니다. 
만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밥상에 올랐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그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될 정도로 풍성한 잔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보리떡'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실로 명백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저 '보리떡' 몇 개만 가지고서도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친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저 '문제 인식'만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아무 시도조차 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지금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부터 알아보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나?'라고 '자원의 부족'한 것만 계산하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그것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명하신 후에 바로 그 오병이어를 두고 '축사'하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지기 기도회'에서 시작한 '보리떡 운동' 역시 바로 이런 주님의 명령에 따르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교육관 헌관은 해야 하는데 우리의 힘으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라고 무력하게 앉아만 있지 않고 '그래도 우리 경향교회 안에 보리떡이나마 몇 개가 있는지를 알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헌당헌금을 바치느라고 이제 우리 교회에서 헌금할 만한 교인들은 다들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다.'라는 자포자기 대신에 '지금 우리 손에 있는 보리떡만이라도 전부 다 바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운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지기 기도회원'들은 이미 각자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을 기꺼이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보리떡'은 자신의 통장에 남은 마지막 현금이기도 했고 결혼반지이기도 했으며 자신이 쓰던 승용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보리떡'은 매달 나가야 하는 은행 차입금 반환의 액수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지만, 우리 쪽에서 그런 '계산'은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리떡'이 내 수중에 남아 있을 때에는 그냥 '보리떡 한 개'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위해 '축사'하실 때에는 수천수만 배의 '폭발적인 역사'를 나타낼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바로 그 '보리떡 운동'에 우리 경향의 모든 성도들도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이 '보리떡 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 손 안에 있는 '보리떡'을 그냥 끝까지 쥐고만 있으면 그것은 나 혼자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내 입에 풀칠하고 내 가족 겨우 먹이고 입히면서 근근이 한 세상 사는 인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지금 자기에게 있는 '보리떡 다섯 개'를 알아보고 그것을 바치면, 우리 경향인 모두가 힘을 합하여 이 '보리떡 3천 6백 개'를 모아 주님의 손에 갖다 드리면 그 '오병이어' 역시 실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을 발휘하면서 주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기적을 이루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만약 예수님께서 몸소 내게 찾아오셔서 "지금 네가 가진 것 중에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좀 줄 수 없겠느냐?" 하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고,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야 당장 드리고말고요."라고 누구나 다 황공무지한 마음으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 각자를 향하여 '네게 있는 보리떡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명하고 계시는 줄을 깨닫고 이 '보리떡 헌금'에 정성을 다하여 참여함으로써 이 경향제단을 통하여 '30만의 큰 무리가 떼를 지어' 천국의 잔칫상에서 '다 배불리 먹는' 축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언젠가 어떤 사석에서 우리 교회의 선배 장로님 한 분께서 제게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당회장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 안에서 다른 교회였다면 벌써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고도 남을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우리 경향교회는 참 신기할 정도로 든든히 서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하, 하나님께서 우리 경향교회를 정말이지 지극히 사랑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 역시 경향교회에 부임한 이후에도 그런 체험을 여러 번 했었고,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또 어떻게 역사해 주시는가 보자.'라는 믿음만으로써 새 힘을 얻게 되곤 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지치고 약해질 때마다 '기드온의 보리떡'을 통하여 우리 경향교회는 그 어떤 환난이나 난관을 당해도 반드시 필승하고야 말 것을 확신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백전백승의 역사는 경향의 성도들이 늘 그래 왔듯이 '어린아이의 보리떡'을 생애 최고와 생애 전부를 바치는 마음으로 주님의 손에 갖다 드림으로써 실제로 목도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보리떡의 격려와 축복'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깨닫는 가운데 앞으로 경향의 미래를 통하여서도 바로 이 '보리떡 운동'의 폭발적인 능력과 기적적인 승리를 더 많이, 더 크게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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