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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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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11)

(마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니라.”(마1:18-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법과 그 목적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게 된 것은 B.C. 734년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입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렇게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마3:11-12)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태어나시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받으시고, 또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손에 든 키에 의해 분리된 가라지,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남김없이 태우시는 심판을 통해 악한 자들이 철저하고 완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비유로 경고한 것입니다. 


2.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께서 이제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와 이렇게 시험합니다.

(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모든 인류의 원수입니다. 인류에게 불행과 사망을 안겨주는 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때문에 마귀는 가장 먼저 예수로 하여금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도록 시험에 빠지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40일 밤낮을 금식하신 후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취약한 때를 노려 시험한 것입니다. 

(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귀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려고 대드는 수작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세상에 오셨고 어떠한 목적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한 번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 지방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자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를 묶어 둘 수가 없고 쇠사슬마저 소용이 없을 정도로 흉악하게 귀신들렸습니다. 그는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에 묶였지만 그것들을 끊고 부수어 아무도 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밤낮 공동묘지와 산 속을 돌아다니며 소리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곤 했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뛰어와 절하며 큰 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이 이렇게 절망적으로 부르짖은 것은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이 한 사람에게 들어가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파괴하여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을 격리시켜 파멸로 몰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심으로 그 사람의 본래적 품성과 인격으로 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지만 사탄의 권세로 그 형상이 손상입은 영혼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키고자 귀신에게 명령하여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 사탄의 졸개에 지나지 않는 귀신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귀신들의 두목인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며 시험한 것은 세상을 구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요구나 먼저 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고도 그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로 인생의 경제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요6:1-15) 때문에 광야의 돌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떡덩이가 되게 하셔서 자신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었습니다. 광야 황막한 곳,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그런 곳에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들에게 물질적인 욕망,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여 구세주가 되라는 시험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많이 듣게 되는 경제민주화가 무엇을 의미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정의, 분배 정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잠21: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약5:1-6)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난 5일 KBS방송에서 세계 5인의 석학들을 상대로 대담을 나눈 가운데, 세계적인 사회학자(UN인권 위원회 자문위원, 저서-탐욕의 시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이며 UN 식량 특별 조사관을 역임했던 장 지글러가 밝힌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계 인구의 몇 퍼센트가 굶주리고 있나요?’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5초마다 10세 이하 아동이 한명씩 굶어죽는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전 세계에서 매일 57,000명이 아사하고, 세계 70억 인구 중 10억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로 신체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매년 인류의 1%를 잃고 있는데 이 말은 매년 세계 인구 7천만 명이 굶주림 관련 원인으로 죽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작년에 총 7천만 명이 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중 1천8백2십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오늘날 굶주림은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중요한 사망 원인입니다. (세계 식량 농업 기구의) 12월 보고에 따르면, 세계의 발달한 농업 기술로 120억 명에게 하루 2200칼로리를 음식을 제공 할 수 있다고 하니 실제 지구인구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사람에게 식량공급이 가능한 셈입니다. 

과거에는 달랐겠지만 현재로서는 세계 인구가 다 먹고도 남을 정도로 식량이 충분하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가 다 먹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있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실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모든 인류는 식량 부족에 시달려왔지만 현재는 산업, 전기 기술 혁명으로 인류의 힘이 굉장히 발전했기에, 우리가 사는 지구엔 식량이 넘쳐 나고 있어 (세계 가난한 지역)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은 살인으로 이는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선 세계에서 굉장히 강력하고 거대한 10대 곡물회사가 세계 식량의 85%를 거래합니다. (세계 메이저 곡물회사들은)미국 등 세계강대국들 보다 더 큰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제노바에 본사가 있는 카길 사는 작년 세계 밀의 31.8%의 거래했습니다. 역시 제노바에 본사가 있는 드레퓌스 푸드도 작년 세계 쌀의 28.2%를 거래했습니다. 생산한 게 아니라 거래만 했습니다. 이들 회사들은 이윤 극대화라는 한 가지 기능은 잘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니제르, 볼리비아 등에 있는 기아와 싸우지 않고 이윤만 추구를 합니다. 이런 다국적 곡물기업들이 기업 윤리에 따라 기능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완전하게 기근을 피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국제적 금융재벌 기업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금융재벌들은 기업윤리가 없고 이윤추구가 목적입니다. 기아의 비극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곡물시장 투기세력입니다. 2007년, 2008년 거대 금융기업들이 세계 금융 위기를 만들었고, 세계 금융위기 이후엔 곡물시장에 대한 투기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 돌아가 엄청난 기근과 아사를 불러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들의 곡물시장 투기로 세계 주요 식량 가격이 폭발했습니다. 2012년 1월에서 12월 사이에 국제 옥수수 가격이 63%나 증가했습니다. 톤당 밀 가격도 두 배나 상승했습니다. 필리핀산 쌀 가격이 톤당 110달러에서 2100달러까지 상승했을 정도니 투기꾼들이 정말 엄청난 이익을 낸 것입니다. 

(파키스탄)카라치, (브라질)상파울로의 파벨라 같은 세계적인 슬럼가에서는 12억 명이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럼가의 엄마들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6명에서 7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데, 쌀 가격이 세배씩 상승하게 되면 엄마들은 쌀을 사지 못하고 결국 그 자녀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 년에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어가는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은, 2달러밖에 안하는 항생제를 투약하지 못해 입에서 발생하는 병 때문이기도 하나, 이런 비극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투기세력의 주식 식량 투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곡물가격의 폭등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곡물을 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세계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면서 바이오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이오 에너지’란 바이오 에탄올과 디젤을 생산하기 위해 수백만 톤의 옥수수와 밀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바이오 에너지 생산국입니다. 5초 마다 아동이 한명이 아사하는데 수백만 톤의 식량을 태우는 것은 인류에 대한범죄입니다. 반드시 중단되어야 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를 구조적으로 완전히 개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근 피해자를 돕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수많은 식량 자원을 태워서 만드는 바이오 에탄올이나, 바이오 디젤 생산을 폐지시켜야 합니다. 모든 나라에서 법적으로 식량 시장 주식 투기를 금지시키고, 유럽연합의 곡물 덤핑도 금지시켜야 합니다....

북한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정권입니다. 2천4백만 북한 인구 중 6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 식량 계획(WFP)에서 그들을 돕겠다고 했지만 테러단체 같은 정권이 주민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대부분의 구호 식량을 비밀경찰이나 공산당, 군대가 빼돌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정권이 자국민을 착취하고 있는 끔찍한 북한은 백만이 굶어죽던 3백만 명이 굶어죽던 신경 쓰지 않고 핵무기를 만들어서 핵 강대국이 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경제 민주화>를 외치는 이유는 더 이상 경제를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120억 명에게 하루 2200칼로리를 음식을 제공할 수 있을만큼 세계 식량은 넘쳐나는데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경제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탐욕은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탐욕의 심볼들이 일부 대기업 총수들이라는 사실도 다 알려진 비밀입니다. 자기들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청업체들의 피땀을 제 것으로 챙기는 경제적 불평등의 주범들입니다. 그들이 이 나라 경제를 양극화, 빈익빈 부익부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땀 흘리는 사람들에게 제몫이 돌아가게 하는 경제 정의와 분배 정의 실현을 위한 경제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기업들의 이윤 포탈과 하청업체들에 대한 쥐어짜기 횡포를 법대로 처리해 나가는 경제 정의가 먼저 실천되어야 합니다. 경제 정의, 분배 정의의 실천을 위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경제 성장이나 뛰어난 경제 이론과 사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관심은 정의롭고 공평한 경제생활, 그리고 주어진 것을 함께 나누는 생활에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에 대해 신명기 8:3을 인용하시어 “(마4:4)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아라. 그러면 살 것이니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같이 휩쓸어 소멸할 것이니라. 그 불을 끌 자가 없을 것이니라. 공법을 쑥처럼 만들고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어두움을 아침이 되게 하시며 낮을 밤이 되게 하시고 바닷물을 불러모아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아라. 그 이름은 여호와이시니라.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강한 자를 패망케 하고 그 요새를 부수시는 분이시니라. 

너희는 법정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고 사실대로 말하는 자를 멸시하고 있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부당하게 곡식을 거둬들였으므로 너희가 훌륭한 석조 건물을 지어도 거기서 살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니라. 너희는 의로운 자를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있도다. 너희가 살려고 하면 악이 아닌 선을 추구하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법정에서 공정을 기하라. 어쩌면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남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지도 모르느니라....너희는 공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이것은 전능한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암5장) 

한 개인이나 기업,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때 ‘떡’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3. 마귀가 자신의 첫 번째 시험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거룩한 예루살렘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4:6)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는 말로 시험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말씀으로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자 마귀가 교활하게도 하나님 말씀, 시편91:11-12을 인용해서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께 십자가 희생의 길을 가기 보다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를 세상적인 영웅으로 추대하여 세상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새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 오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따르겠느냐, 그런데 굳이 그 험한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제물로 희생시키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할 때,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대신하여 죄의 삯을 치루는 것만이 인류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의 삯을 예수께서 대신하여 치루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제물,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 최후의 전략은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희생하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며 그 증거입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나 능력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명성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보여주고 증거하고 살아야 할 것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을 낮추어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배운 자가 배우지 못한 자를 사랑을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가진 자들이 천한 자와 미천한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이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를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도가 소위 배웠다하는 자들과 가졌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8-29) 

자기를 낮추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겸손이 없는 사랑과 능력은 축복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는 부귀는 축복이 아니라 불행과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을 헛되이 시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거나 사람들을 끌어 모아 집단 세력화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은 이름도 빛도 없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예수께서 이번에는 신명기 6:16을 인용해서 “(마4:7)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호렙 산 근처 르비딤에 이르게 되었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너희는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렇게 목말라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데려왔느냐, 우리와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면서 죽일 듯이 대들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가지고 저 호렙 산 바위를 치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자 그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와 모두가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를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출17:1-7)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시험했던 자들은 그 누구라도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은사나 능력 등으로 영광을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의 삶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시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두 번째 시험까지 실패하자 마귀는 세 번째로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마4:9)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며 시험합니다. 마귀는 예수에게 천하만국을 호령하는 최고의 권력을 보장함으로 자신과 야합할 것을 시험한 것입니다.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한다면’이라는 최고의 범죄를 유혹하면서 최고의 미끼를 던져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자기의 정체를 숨긴 채로 시험한 것입니다. 

마귀는 경배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 자신이 조만간 멸망할 존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남에게 축복을 약속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저주하고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경배 대상인 것처럼, 남에게 최고의 부귀영화를 보장하며 축복하는 자인 것처럼 위장하며 시험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B.C.539년경 바벨론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메대 왕 다리오에 의해 포위되어 경제적, 정치적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왕의 비참한 최후를 알리는 서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벨사살 왕은 그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 과거 자기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취해서 가져온 성전 기구들, 다시 말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기구들을 가져오게 해서 귀족들의 술잔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성전 기구들을 술잔 삼아 술을 마셨을 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의 맞은 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잔치를 즐기던 왕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서, 넓적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습니다. 

왕은 덜덜 떨며 큰소리로 외쳐서, 주술가들과 점성술가들과 점성가들을 불러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서, 그 뜻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자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자를 읽는 사람이 없었고, 그 뜻을 왕에게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크게 낙심하여 얼굴빛이 변하였고, 손님들도 당황했습니다. 소란과 혼란에 빠져 요란한 소리를 듣고 왕의 어머니가 연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 느부갓네살 왕 통치 시대에 탁월한 정신과 지식과 꿈을 해몽하는 총명이 있어서, 수수께끼도 풀었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했던 다니엘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다니엘이 그 벽에 쓰인 글자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왕이여,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께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이 그 앞에서 떨면서 무서워하였으며, 부친께서는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낮추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친께서 마음이 높아지고 생각이 거만해지셔서, 교만하게 행동을 하시다가, 왕위에서 쫓겨나셔서, 명예를 잃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시더니, 그의 마음은 들짐승처럼 되셨고, 들나귀와 함께 사셨으며, 소처럼 풀을 뜯으셨고,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젖으셨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부친께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신 벨사살 왕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하늘의 왕이시요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셔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왕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왕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그 석회벽에 쓰인 글자를 해석한 그 날 밤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나라는 두 쪽으로 분단되었습니다.(단5장, 단4:34-37)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나라 백성의 흥망성쇠를 주재하시는 분은 마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4:10)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교회의 사명은 천하만국을 호령하는 권세와 영광이 그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자리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입니다. 교회가 권력을 추구하게 될 때 교회는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택한 길은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였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길은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권력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을 집단 세력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그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시다.’ 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6:1-15)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입니다. 권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극소수의 제자들마저 이름도 빛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처음부터 부귀영화, 권세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한 어린양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과 불의에 대한 삯으로 그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의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가신 길은 권세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제물이 되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계적인 부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천하를 호령하려는 것도 아니며, 또는 세계 최고의 유명 인사나, 주인공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이윤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 되거나, 집단의 세력화를 형성한다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야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신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가 부귀 영광과 권세, 출세의 길을 물리치시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시험들로 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는 신앙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8:1-16)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어떠한 시험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으로 승리하여 마침내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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