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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풍랑가운데 계시는 주님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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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랑가운데 계시는 주님 (막 4:35-41) 

1. 오늘날 사람들은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에는 겨울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요트를 타고 바다는 신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고대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바다는 혼돈의 세계였고, 예고없이 사람을 죽이는 힘을 가진 곳입니다. 바다는 이렇게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2. 이 바다가 가진 두 얼굴은 바로 우리 삶의 두 모습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사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파도를 타는 것처럼 도전이 있고, 성취가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연인들이 데이트하듯이, 꿈과 행복과 낭만이 있는, 한편으로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은 거친 파도와 풍랑을 헤치며 항해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무나 자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두 모습, 두 얼굴입니다. 우리 두 모습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풍랑 가운데 계시는 주님 > 

I. 오늘 본문의 말씀 안에도, 이런 삶의 두 가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1. 먼저, 본문의 배경이 바로 이 두 얼굴의 바다입니다. 

1)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막 4:1-34),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배 위에 올라타시고 바닷가에 모여든 무리들을 향하여 은혜로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했다는 소식은, 들을 귀만 있다면 정말 복된 말씀,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날 낮에,, 바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2) 그러나 그날 밤의 상황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납니다. 캄캄한 밤에, 배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배에는 공포와 불안이 가득 했습니다. 

3) 이것이 우리 삶의 두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은 말하기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했다는데요, 이렇게 희극과 비극이 함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인생을 보면 희극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싶지만, 그것은 남을 멀리서 보기 때문이고, 나 자신은 가까이서 보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그 삶에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전도서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생에 형통함과 곤고함을 병행하게 하셨다’ (전도서 7:14) 했습니다. 그래서 장래 일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풍랑, 희극과 비극, 형통함과 곤고함이 우리 인생에 항상 함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잘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늘 겸손함으로 서야 할 줄 압니다.
 

II. 풍랑이 일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대조되는 두 얼굴(두 삶의 자세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제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1)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자,, 제자들은 정신을 잃고 혼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입니다. 

2) 반면에,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제자들의 아우성속에서, 예수님은 깊이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환란과 시련이 닥쳐 왔는데,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요동하지 않고 침착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미 그 문제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이 때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드디어 일어나셔서, 풍랑을 향하여 외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1) 그 말씀 한마디에 그렇게 요동치던 바람과 파도가 금새 잔잔해졌습니다. 이 때 배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하는고? 

2) 여러분, 이 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합니까? 바람과 파도를 말씀 한마디로 다스리시는 그분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흔들리는 배위에 서서 "바람과 파도야 잔잔하라. 고요하라"…외치고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혼비백산하여 불안과 두려움에 질려 울부짖을 때에 배안에서 주무시던 그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3) 이 말씀은 원래 마가복음을 읽던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위기에 있었을 때에, 이 본문의 말씀을 읽던 교회와 성도들은 이 말씀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핍박을 당하여 마치 파도에 휩쓸리는 배와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께서 교회를 그 오른손에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이 풍랑으로 인해서 무너지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3.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삶의 문제를 당했을 때에,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1) 삶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위기는 밖에서 일어나기 보다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특히 우리가 문제에 집중하면, 그 문제가 더 크게 과장됩니다.  

2) 옛날에 시골에 도깨비불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무덤이나 저수지 같은 곳이나, 사람이 죽은 곳에서 많이 보인다고 하는데요, 허공을 떠다니면서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막 그런다고 합니다. 동물이나 사람의 뼈가 노출되면,, 뼈에 있는 인 성분이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공포심을 느끼면, 그 공포때문에 작은불꽃이 점점 크게 보이는 그런 착각증세가 나타나는가 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도깨비불에, 사람이 그냥 혼비백산이 되고 말듯이,, 

3) 우리 삶의 풍랑도 어떻게 보면 도깨비 불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작은 문제인데, 우리가 그 문제에 집중하면, 그 문제가 점점 크게 여겨지고, 그래서 그 문제에 짓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집중되어 있는 눈을 들어서, 이웃을 바라보고, 할 일 많은 세계열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풍랑속에서도, 주님처럼 잠을 주무실 수 있는, 그런 승리자의 여유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III.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던 예수님은,,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하여 꾸짖으십니다. 

1. 40절에,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했는데요, 

1) 성경에 보시면, 40절에 관주를 달아놓고, "어떤 사본에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되어 있다" 했는데요, 영어성경에도, "아직도"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믿음이 있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날 낮에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좀 달라져야 되지 않느냐는 책망입니다.  

2)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는 것의 문제였고, 낮에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한 영적인 둔감함의 문제였습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은 은혜를 체험했지만, 삶의 문제가 닥치면,, 또다시 제자들처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지 않으십니까? 

1) 주님께서 우리 삶의 배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풍랑조차도 잠잠케 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문제로 아픔이 있지만, 삶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픔이 있기에 더욱 바르게 살고, 삶의 걸음을 더욱 진지하게 내어 딛는 그 삶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삶의 문제가 닥쳐 오더라도,  그 문제와 함께 더불어 살 용기만 있다 해도, 이미 그 문제를 이긴 것입니다. 유능한 항해사는 바람과 파도를 이용한다고 하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의 바다를 멋지게 항해하는 일등 항해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 맺는 말씀 > 

1. ‘토니 에반스’ 라는 사람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조금 고쳐서 말씀을 드리면요, 한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갔습니다.  사자 굴을 지나갈 때, 사자가 포효를 지르며 으르렁거리며 다가오자, 아이는 겁에 질려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이가 "아빠는 저 사자가 보이지 않으세요.. 저 사자가 무섭지 않으세요?" 그러자 아빠가 하는 말이, "음, 물론 사자가 보이지.. 그런데, 아빠는 사자를 가두고 잇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자만 보면, 무섭지만, 철장을 함께 보면 무섭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의 문제만 보면 무섭지만, 주님이 우리 삶의 풍랑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문제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우리가 삶의 문제로 방황할 때에, 그 한 시점에서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우리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면, 거기에는 큰 하나님의 동행의 발자국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인도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고통으로 힘들어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지구가 너무 커서 돌고 있는지를 우리가 모르듯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은 너무나 커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는 달라서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들에 우리는 고통으로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완고한 우리 죄인을 기가 막히게 다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그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혹시 그들은 잊을찌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낳았고, 손바닥에 새겼나니.(사 49:15-16)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 배에 함께 하셔서,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삶의 문제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주님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풍랑을 통해 주님을 만난다면, 풍랑 주심을 감사하는 믿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승리하는 믿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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