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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라! (시 8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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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라! (시 84:1-12)


새로운 1년이 벌써 넷째 주가 지나가는 데 작심 3일이라고 다시 옛날로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작년에 후회했던 그 삶의 모습으로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실패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그것을 포착하기 어렵게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잘못했을 때 금방 문제가 온다거나,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금방 하늘의 징벌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아주 포착하기 어렵게 서서히 진행되는 일들에 대해서 점점 미련해지고 어리석어집니다.  그러나 즉시 나타나지는 않지만 잘못된 길을 계속 가면 최종적으로 책임져야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엄청납니다.  목숨입니다.  죽음입니다.  망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망의 해를 주신 것이 아니라 희망의 새해를 주셨습니다.  다시 일어서라고 기회의 새해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일어나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 하나님의 자녀됨을 시위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진 것은 한나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남편 엘가나로부터 사랑 받는 아내였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나는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 당시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이 강한 이방나라에 멸시와 천대를 당해야만 하는 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에게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직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의미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무엘상 17장에 가면 다시 불리워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지 못하여 원수 블레셋에게 짓눌려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울왕을 비롯해서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위세 앞에 눌려서 40일 동안이나 벌벌 떨며 갖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군대의 힘으로는 감히 대적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와 싸워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이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뿐이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렇습니다.  수많은 적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괴로움을 당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오직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3년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을 믿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기억하십시오.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일반적으로 번역하자면 하나님 그분은 군대들의 주인이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군대로 부리시는 분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와 다윗,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을 멸시하고 짓밟고 괴롭히는 원수들 앞에서 오직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감으로써 힘든 인생 여정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84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시편 기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이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군대를 거느리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방패가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요청할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심리적인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예들 들자면, 염치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내 삶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할 때 내가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가?  우리가 이럴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보호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또 하나 부르고 있는 명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니 야곱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들을 말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조상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가장 질이 낮은 조상님이 계시다면 그가 바로 야곱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야곱은 가장 욕심이 많았고, 가장 교활했고,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기도도 들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군대를 보내서 야곱을 보호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셨을까요?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을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사기도 좀 치고 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외삼촌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외삼촌이 없는 때를 골라서 그곳을 떠나갑니다.  한편으로는 외삼촌 라반이 복수의 칼을 들고 종들과 함께 자신의 뒤를 추격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고향에 있는 형님 에서가 자기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쩌면 그 옛날 장자권을 빼앗긴 분풀이로 자신을 추격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앞 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야곱, 그는 지금 심각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한 부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야곱을 호위해서 앞으로 인도해 갑니다.  창세기 32장 1절과 2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기도한 후에 등장한 일련의 군대 호위를 받으면서 그는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군대라, 하나님이 보내셨구나.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캠프, 혹은 하나님의 진지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의 호위가 시작되자마자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든든한 진지로 구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제 무엇을, 그리고 그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격이 없었던 야곱을 보호하시고 도우신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야곱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본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천군 천사를 통한 군대를 보내어 에워싸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불러보십시오.  우리 한 번 다같이 그분의 이름을 불러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다가 우리의 부르심과 동시에 그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께 도우심과 보호를 요청하는 일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금 자신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할 준비를 마치시고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사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천사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아십니까?  히브리서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천사들은 여러분과 저를 돕고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영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 우리를 섬길 하나의 목적으로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군대의 사령관이 되시는 그분에게 속히 SOS를 타전하십시오.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그분은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확실하다면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다음의 결론일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오늘 시편의 기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장막 안에 거하는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주를 예배하는 장막, 주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예배를 상실한 채 살아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치 집을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처럼 그의 영혼은 집을 떠나 방황하던 한 마리의 참새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102편 7절에서 그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옛날 한국식 기와집을 연상해 보십시오.  겨울철 처마 밑에 둥지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런 둥지를 만들지 못하고 겨울철에 파르르 떨며 지붕 위를 배회하고 있는 불쌍한 참새들의 이미지를 한 번 그려보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받아줄 곳이 없었던, 둥지를 만들 곳이 없었던 이런 참새 같은 영혼들을 주님의 성전이 받아 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많은 새들이 깃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의 성전이 이런 새들을 받아 주었고,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이 새들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던 자신의 영혼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성전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4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가 새롭게 얻은 이 참된 행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지금 시편의 기자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이 이제는 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가 구 성전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현호와 아이들이 제게 "목사님은 이제 부자시네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현호가 하는 말이 "이 교회가 목사님 것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현호야, 이 교회는 목사님의 교회가 아니고 너와 우리들 모두의 교회다.  하나님의 교회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아직도 영혼의 집을 갖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교회에 나오지만 뭔가 이 교회가 내 집이 아니고 남의 집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영혼의 모태와 같은 곳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종종 이런 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

다시 3절에서 묘사된 주의 성전에서 집을 얻은 행복한 참새, 행복한 제비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행복한 참새입니까? 아니면 외로운 참새입니까?  제가 제비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참새입니까, 외로운 참새입니까?"

아마도 우리 한국 유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머가 있다면 참새 시리즈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참새의 연약한 이미지가 이 땅을 살아왔던 슬픈 민초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수의 한 방의 총에 전기 줄에서 맞을 것을 두려워하고 떨던 참새의 이미지 속에서 불행하고 안전함이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이 유머 속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새 시리즈의 시대적 변화 그 자체가 우리의 사회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새 시리즈가 처음 탄생한 것은 60년대 였다고 합니다.  6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태어난 최초의 참새 시리즈는 전기 줄에 나란히 앉은 부부 참새 중 하나가 포수의 총을 맞고 떨어지면서 한 말입니다.  "여보, 내 몫까지 살아주오."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던 그 시대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90년대에 와서는 아주 바뀝니다.  포수가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쏘아서 떨어뜨리자 추락하는 새가 하는 말이 "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훨씬 더 살벌해집니다.  총 맞은 참새가 "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라고 하자, 총을 맞지 않은 참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재 아직도 안 죽었어요.  한방 더 쏴요."

민심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머입니다.  관용을 상실하고 이웃을 상실한 이 시대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함은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화가 없이 우리의 영혼이 방황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실로 믿으시면 영혼의 기나긴 방황은 끝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 만군의 여호와의 보금자리에서 이제는 제발 쉬십시오.  그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의 권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졌던 때를 말씀하면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은 소년 목동 다윗이 거인 장군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면서 외쳤던 말씀입니다.  앞에 화면으로 띄웠습니다.  우리 다같이 힘차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에서 다윗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그는 만군의 여호와를 신뢰함으로 이 전쟁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수동적 은총들을 약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보호의 약속이 그렇고, 안식의 약속이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를 두려움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고, 방황하던 우리를 안식의 자리에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수동적인 은총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 가운데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힘입어 구체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 보여도 그는 보이는 상황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군대를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순간, 참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믿음은 권능의 통로로 역사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십이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이년 동안 병치레하느라 모든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그래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지만 그 많은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쳤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당신의 옷자락을 스치고 있는 손길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여인은 "예, 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누가는 누가복음 8장 4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앎이로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손을 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바로 순간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흘러갔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권능의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믿는 자를 찾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지금도 그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던 치킨 숲(Chicken Soup)이라는 아름다운 실화집에 실렸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고든과 신디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주 어린 딸 타냐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 타냐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부엌 오븐 옆에서 놀다가 마침 오븐 위에 올려놓았던 펄펄 끓는 물 냄비를 건드려서 그 물이 얼굴 위로 쏟아져 중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딸 타냐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수술을 받습니다.  대 수술이었습니다.  긴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이 부부에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큰 화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뉴스뿐이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엄마 신디는 소파에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직접 들어가 주세요.  예수님이 만져 주셔요.  예수님이 고쳐주세요.  예수님이 직접요."

한 참 기도를 하는데 누가 와서 툭툭 건드립니다.  보니까 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이 교인 두 사람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저희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하러 왔습니다."  이들 두 부부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목사님이 "제가 들어가 보지요."  목사의 신분을 밝히고 잠시 수술실의 허락을 받고, 목사님과 교인 두 분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나와서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기다려 보십시다."  그리고 목사님 일행은 떠나갔습니다.  하루 밤을 지샌 다음 그 이튿날 아침 이들 부부는 허락을 받고 타냐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보니까 타냐는 잠들어 있었는데 딸의 얼굴을 보고 부부가 깜짝 놀랍니다.  화상이 씻은 듯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아주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오셔서 기도해 주신 두 분이 누군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아주 의아해 하며 이렇게 말하시더랍니다.
"저는 집사님 한 분하고 찾아갔었는데요."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과 두 분이 함께 오셨잖아요.  여보, 그렇잖아요?"
남편도 확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니라고, 자신은 집사님 한 분하고 둘이서 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냐, 세 사람이냐를 놓고 한참을 논쟁하다가 목사님이 갑자기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또 한 분은 예수님이 직접 오셨거나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일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신디는 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참, 맞아요, 목사님.  저도 깜빡 잊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셔 달라고 기도했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이 힘들고, 아프고, 어려워하는 삶의 자리마다 부르면 천사를 대동하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금년 한 해, 아니 우리의 일평생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리석은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의 아버지와 든든한 관계를 맺듯이 내 생명의 아버지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은 모든 축복의 첫걸음입니다.  결단 없이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자리에 앉았다가 그냥 가지 마시고 결단하십시오.  결단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제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리라!"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인간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기 이곳에 왔습니다.  종교적인 장난을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면 무슨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연약하여 왔습니다.  넘어져서 왔습니다.  실망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보호해주시고 안식을 주시며 권능을 주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계십니다.  그분이 보내시는 천군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곤고하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너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할렐루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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