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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성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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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 1:1-6)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행복을 여러분이 누리시는 2013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 어떤 집회에서 적나라한(?) 표현을 들었습니다. 말씀인즉 “낙하산과 낯짝은 펴져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공수부대대원에게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그야말로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져야 산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구겨져 있으면 본인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도 죽을 맛일 수 있습니다.

“낙하산과 낯짝은 펴져야 산다!”

펴져야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얼굴은 웃음이라는 다리미로 펴야 합니다. 그런데 억지웃음과 꾸며낸 웃음으로는 얼굴을 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교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제하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성있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영성이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악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한 마디로 ‘영성’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I. 영성  

우리가 가져야 할 영성, 영적 성품이란 무엇입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공동]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꾀[hx;[e/에짜]’는 ‘충고’를 가리킵니다. 악한 사람이 하는 충고는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사람에게서 조언을 받는 사람은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충고는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길[&r,D,/데레크]’은 사람이 밟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면 그 사람의 끝은 반드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bv;/m/모솨브]’는 어떤 사람이 앉아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입을 삐쭉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 역시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들의 꾀는 따라가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죄인들의 길은 함께 하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듣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우리가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람이 머물러 있는 자리는 바로 그 사람의 영성입니다.

1. 영성은 머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간 노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영성은 노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자리에 나가 있다면 그 사람의 영성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장소, 우리는 따르는 행동, 우리는 하고 있는 몸짓이 바로 우리의 영성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스승의 행실을 보고 배움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승을 닮게 됩니다. 반대로 나쁜 무리와 어울리다보면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그릇된 것뿐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서진(西晉)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부현(傅玄)의 ‘태자소부잠(太子少傅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릇 쇠와 나무는 일정한 형상이 없어 겉틀에 따라 모나게도 되고 둥글게도 된다. 또 틀을 잡아 주는 도지개가 있어 도지개에 따라 습관과 성질이 길러진다. 이런 까닭으로 주사(朱砂)를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故近朱者赤 近墨者黑). 소리가 조화로우면 울림이 맑고, 형태가 곧으면 그림자 역시 곧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 무엇과 어울리느냐는 것이 그 사람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하여 예수님을 닮으면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머물러 있는 세상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도 더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살다보면 세상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지 않고 세상을 닮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곳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세상에 머물면서도 세상을 닮지 않고 예수님을 닮는 방법은 없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늘 말씀에서 ‘묵상하다[hg:h/하가]’는 말은 젊잖게 표현하면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중얼거리다’는 말입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게 흥얼거리고, 숨을 쉬듯이, 신음소리를 내듯이 자신의 생각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잡아 두는 것입니다. 영성은 그 사람이 머무는 자리를 넘어서, 그 사람의 행동이 시작되는 생각의 자리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닮지 않는 길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것이 우리나라 옛사람들의 영성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따라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2. 영성은 생각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자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곧 ‘나 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됨’은 바로 나의 생각에서 나는 것입니다. 머무는 자리가 형식이라면 생각의 자리는 내용입니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락실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이라면 반쪽짜리 학생입니다. 교인이라면 예배당에 있어야 할 시간에 예배당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몸은 예배당에 있는데 그 생각이 논매러 나가있으면 반쪽짜리 교인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온전한 교인입니다.

돼지 한 마리가 우리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열심히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곁에 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잘 익은 홍시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홍시를 본 돼지는 얼른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달착지근한 것이 입에 착 달라붙어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꿀~ 어매! 이거 꿀보다 더 맛있네! 꿀~ 꿀!”

돼지는 홍시를 또 먹고 싶었습니다. 우리 안을 다 뒤졌지만 감은 또 없었습니다. 돼지는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땅 속에서 나온 것일 거야! 꿀!”

돼지의 뾰쪽한 주둥이로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둥이가 헤어지는 것도 모르고 땅을 헤집었습니다. 주둥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땅을 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진맥진하여 뒤집어졌습니다.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쁜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그토록 파고 뒤집었던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감이 달려있었습니다. 하지만 돼지는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감은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파고 있는 그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머물고, 이를 위하여 그 분의 마음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머물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행복이 있습니까?
  

II. 행복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머물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머무는 자리가 반듯하고, 생각의 자리에 말씀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 여기에서 ‘형통[jl'x/짜라흐]’은 ‘앞으로 돌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길이 열리고, 앞으로 쭉쭉 뻗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약삭빠르게 행동하고 눈치 살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뻗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우직하게 찾고,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형통합니다.

1. 형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인 성경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스리랑카에서 첫째 날은 지역 주민에게 의료봉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낮에 대부분 차를 따러가기 때문에 몇 사람만 현지 의사와 간호사를 도와주면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아담스 피크라는 산을 등산하였습니다. 아담스 피크는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 높은 산으로 해발 2,243m나 됩니다. 4,8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산입니다. 이곳은 불교와 힌두교와 이슬람교에서 성지로 여기는 곳입니다.

힘들게 올라갔지만 내려다보는 경치와 산허리에 흐르는 구름이 장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요삼경’을 외웠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힌두교도가 ‘과일 한 접시’를 가져다주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과일은 먼저 올라간 일행이 돈을 주고 사먹으려고 했는데 팔지 않았던 것을 요삼경을 외웠더니 그냥 가져다주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일생들이 제게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삼경이 무엇이냐? 요한복음 삼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가 이것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십니까? 저의 어머님께서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에서 배웠습니다. 타령도 아니고 창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경을 외는 것도 아닌 나직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입니다.

저의 어머님께서 처음 예수님을 믿으셨을 때, 어머님을 전도하신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태우(=형님 이름) 엄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지만,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읽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 쫄쫄 굶게 되니 세상에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해요.”

좀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어머님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답니다. 세상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한데 천국에 가서 영원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으면 안 되겠다 싶더랍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읽으셨답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가서 글도 제대로 모르는 분이 열심히 성경을 읽으셨답니다. 밭을 메러갈 때도 성경을 지고 가서 쉴 참에 읽고, 방아를 찧다가도 쉴 때는 성경을 펼쳐서 읽으셨답니다. 

어머님이 제게 하셨던 말씀은 ‘그렇게 성경을 열심히 읽었더니 논도 사고 밭고 사고 세상에서도 먹을 것이 많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하는데 어머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니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사람을 형통하게 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올해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여 읽고,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어, 형통하게 되는 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형통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영성의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또 무엇입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을 형통하게 하시는데 악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의 반대말을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악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악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배당에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악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것과 같은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을 형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하십니다.


2. 견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고 싶으신데 우리에게 말씀이 없어서 그 분의 마음을 모르면 복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을 부어 주시면 그 복이 도리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어쩔 수 없는 견고한 사람들이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가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견고하게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품고 사는 영성의 사람에게 또 어떤 행복이 있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왕겨처럼 가벼운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됩니다. 결코 의인들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견디다[!Wq/쿰]’는 말은 ‘일어나다’, ‘솟아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견디지 못한다면 일어날 수 없고, 솟아오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형통과는 반대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심판을 통과합니다. 


3. 통과하게 하십니다.

오해가 없으셔야 합니다. 천국에서 들어 갈 때 천국 문 앞에서 베드로가 성경 시험을 보아서 합격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불합격하면 지옥에 던진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 문을 통과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확신하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죽은 후의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려야 할 사람입니다. 행복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영성의 사람들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 세상의 시험과 환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영성의 사람에게 어떤 행복이 있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여기에서 ‘인정하다[[d'y/야다]’는 말은 ‘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하나님이 알아주시지 않는 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인정하여 주십니다.

4. 인정받게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식욕이나 성욕만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행복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아 존재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지나치면 인격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 분의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그대로 여러분이 바로 행복한 사람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EQ라는 말이 시대의 유행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IQ와 비교가 되는 개념이었습니다. IQ(Intelligence Quality) 지성적인 특성인데, EQ(Emotional Quality)는 감성적인 특성입니다. 지식보다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SQ시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SQ(Social Quality)는 사회적인 특성입니다. 타인의 감정과 의도를 잘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협력하여 공동의 목표 달성에 기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실제로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IQ와 EQ와 같은 개인적 능력보다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며, 그러기 위해서 공감을 쉽게 만들어낼 줄 아는 능력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SQ, 즉 영적 특성(Spiritual Quality)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삼 1:2). 이것은 또한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6:33). 우리가 어디에 머무느냐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것은 지성과 감성과 사회성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상인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이 곧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모든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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