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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과 결단이 삶을 바꾼다 (수 2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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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단이 삶을 바꾼다 (수 24:14-18)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는 선두에 섰던 백전노장의 여호수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가기 직전, 고별 설교를 하는 대목입니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과거와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여호수아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감지했습니다. 다가온 축복 속에서 마냥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떤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를 섬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교의 문화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가의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 차를 타고 갈 것인지 걸어갈 것인지, 어떤 옷을 입고 갈 것인지,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인지 등.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은 좋은 인생을 만듭니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선택도 있지만 어떤 선택은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예수를 죽인 사람, 악인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한순간이었지만, 어려운 선택을 함으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절대진리를 붙들어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의 선택은 인류 전체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바른 선택을 할 때 축복이 됩니다. 신앙생활 역시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삶도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그 선택의 자유를 잘 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고별설교를 통해서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합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오늘날과 흡사합니다. 폭력적이고 음란하고 농경문화에서의 풍요의 신, 다양한 신을 섬겼습니다. 특히 물질주의로 가득한 그 땅에 맘몬의 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지배하게 하셨지만, 그 문화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빼앗길 것인지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비기독교적인 환경입니다. 반 하나님적인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실제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는 긴장과 대립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순순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분명한 선택과 결단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명목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땅은 정복했는데 영혼은 정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로 가득 찬 그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의 문화에 흡수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선택과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14절부터 24절까지를 보면, ‘섬기다’라는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 섬김의 대상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운명을 가르는 문제입니다. 대충 생각하고 넘어갈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이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선택과 결단이 돋보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은혜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할 때, 그 위에 부으시는 은혜가 큽니다. 이것이 분명할수록 은혜의 강도는 깊고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선택과 결정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선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타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신앙이고 절대순종입니다. 다른 길,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택에 따라 다른 모든 선택이 따라옵니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나오는 확고한 기준점입니다. 여기에는 YES 또는 NO밖에 없습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신들과 철저히 구분되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결단이 없다면 타협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의 너무 빠른 변질이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늘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너무 빨리 세상의 영향을 받고 변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결단하게 하십니다. 

선택과 결단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선택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입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더 그렇습니다. 결혼과 같은 중대한 선택을 너무 쉽게 하면 두고두고 고통이 됩니다. 조금 미루더라도 시간을 두고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와 확신입니다. 잘 모르면서 몇 번 만나보고 결혼한다면 일종의 도박입니다. 내가 믿는 대상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는 두고두고 후회를 남길 수 있습니다. 비싼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꼼꼼하게 살펴보고 고릅니다. 그래서 선택을 할 때는 집중력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다른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선택에 앞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이미 이방 신들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의 촉구에 대한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6)」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굳은 결단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여호수아 24장에서 한 장을 넘기면 사사기가 도래하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아주 빠르게 영적 어두움의 시대로 진입하고 맙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했던 그들의 결단의 흔적은 너무 빨리 지워져 버렸습니다. 영적 혼란기의 사사 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각오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순수한 마음만으로 결단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확신의 근거는 감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면 하나님을 등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나안이라는 기름진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희미해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에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더 마음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는 참여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면 배교의 위험성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선택과 결단은 확고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새해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결단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강력한 이교도적 문화가 너무나 많고, 그것이 우리를 삼키면 타협해버리고 변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쌓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입으로만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도 나의 내적 동기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할 때도 받은 선물 때문에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정작 주신 분은 쳐다보지도 않고 받은 것 자체만 기뻐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인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사귈 수 있게 되어 고마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많은 행태가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 일상의 것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문화에 익숙해지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믿고 섣부른 신앙고백으로는 신앙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내 마음에 드는 신을 찾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반 하나님적 문화가 아주 강해지고 빨리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력하게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신들이 널려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말한 대로 돈, 권력, 성이라는 신이 버젓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화를 경험하며 신앙이 깊어가는 신자들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깊이 경험하면서,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여러분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택은 뚜렷한 행동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선택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포기를 가져옵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 안으로 밀고 들어온 배교적 문화가 중요한 쟁점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기 시작한다면 그동안의 다른 이성적 관계는 끊어야 합니다. 양다리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모든 관계를 깨는 요인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한 결별을 해야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의 일부도 가나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과거전력이 무서운 것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어서 과거에 나를 붙잡고 있는 족쇄를 분명히 끊지 못했다면 캘린더만 바뀐 것일 뿐 변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우상이 생깁니다. 매일, 순간순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에 대한 신실함을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틈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하면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이방의 신들을 내버려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변질되고 충성은 희미해집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은 공존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일편단심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을 원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만’ 입니다. 여럿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선택과 결단은 우리가 계속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세상에 등을 돌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도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선명한 기준이 정해져야 합니다. 기준은 선명할수록 좋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피곤한 삶은 애매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신앙이면 신앙, 세상이면 세상이어야 합니다. 느슨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색깔이 회색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정확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변질하게 됩니다. 신앙적 선택과 결단을 할 때는 매섭게 해야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정확하게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신앙에서 올곧은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 해를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선택은 시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택하라”입니다. 선택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으니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급하게 촉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스며드는 악한 문화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이 왔을 때 특별한 선택을 한다면 전혀 다른 인생이 되고, 인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실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구원의 사건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역사의 어느 시간을 자르면서 일어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단의 때를 미루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때를 감지합니다. 영적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타이밍을 알고 만사를 제치고 행동합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때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미루면 위험합니다. 마귀가 가장 잘 쓰는 전략이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 교묘한 심리전입니다. 미루다 보면 결국엔 못하게 됩니다. 미루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사람이 내일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오늘, 지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를 믿게 된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시점이 되었을 때 그 때 반응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13년이 밝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결단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결단하십시오. 머뭇거리는 삶은 인생을 낭비합니다. 특히 영적 결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놓치면 모든 악한 것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게 됩니다. 가나안의 악습과 문화들, 이방신들, 애굽에서 섬겼던 신들도 따라왔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선택을 미루고 머뭇거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전망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이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단단히 영적 결단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세상과 얽히게 됩니다. 세상에 한번 얽혀 빠져들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의 세속화 현상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차이가 모호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축복을 받은 이후에 축복 자체에 빠져들 때 세속화되고, 그 세속화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나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던 여호수아는 정확한 판단으로 여호와의 신앙이 온전히 심겨지기를 갈망했습니다. 선택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앙의 위협을 받게 하고 타협하게 하는 것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관심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정조준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최고의 선물은 사랑하는 사람 자체입니다. 그런데 선물에 따라 마음이 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사준다고 마음이 바뀌는 것, 자꾸 마음을 바꾸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단단한 결단을 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십시오. 타협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을 유지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넘어지고 타협하고 흔들리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한 분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최고의 선택입니다. 하나님도 좋고 돈도 좋은 것이 아니고, 여러 순종 중의 하나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결단으로 내 마음에 파고드는 마음의 변절을 경계하면서 단호한 태도로 유일 신앙을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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