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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성령으로 기뻐하신 분 (눅 1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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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령으로 기뻐하신 분 (눅 10:21-24)
 
내가 먼저 즐겁지 않으면 즐거움을 줄 수 없습니다. 

결혼을 주선하는 한 회사가 3천명이 넘는 20세 이상의 미혼 남녀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같은 외모, 같은 조건이라면 어떤 이성에게 제일 호감을 느낄 것인가?” 

미혼 남자들의 응답은, 첫 번째가 잘 웃는 여자(35.8%), 두 번째가 애교 많은 여자(29.6%)였습니다. 이 둘을 합하면 전체의 약 2/3, 65%가 넘는 수치입니다. 미혼 여자들은,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25%), 연락을 자주 하는 남자(24%), 잘 웃는 남자(15.6%) 순으로 대답했습니다.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와 잘 웃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대답이 응답자의 약 40%입니다. 결국 남녀 모두 스스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 남도 행복하게 해줄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오늘 아침 거울을 볼 때, 내 모습이 밝았습니까? 따뜻했습니까? 아니면 내 모습에서 찬바람이 불거나, 내 눈 속에 미움이 박혀있지는 않았습니까? 

옛말에 ‘일소일소일로일로(一笑一少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웃으면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늙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웃을 때, 당신이 미소 지을 때, 당신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주는 권면일 것입니다. 

가끔 가수들의 등용문인 ‘K-POP STAR’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10대 아이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지, 그것도 춤까지 추면서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몰두할 수 있는지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평가입니다. 그들이 참가한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이야기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가 먼저 즐기면서 노래를 불러라. 스스로 즐거워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즐거움을 선물해 줄 것인가?” 한 마디로, 스스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신앙의 참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내게 기쁨이 됩니까?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드립니까? 내가 찬양 부를 때,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기쁨이 내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내 신앙의 고백이 됩니까? 

우리가 이웃을 가장 잘 전도할 수 있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즐겁고 기쁠 때입니다. 내 모습에 감사와 즐거움이 넘칠 때, “야, 네가 믿는 예수는 도대체 누구냐?”라며 주변 사람들이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내 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고, 우울해 하고 답답해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야, 네가 믿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냐? 너를 그렇게 참담하게 한다면 나는 그런 예수 안 믿겠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의 소요리 문답 제1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인가?”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즐기는 것,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내 인생의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다시 힘과 용기를 얻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 것, 그래서 세상을 향해서 새롭게 나아가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쁨의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기쁨으로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하신 말씀일까요?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여섯째 날에는, “보기에 참으로 좋구나”하시며 만족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감성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자족감과 자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첫째 날은 작은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은 입가에 가득한 웃음으로,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함박웃음으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크게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제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그 기쁨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활짝 웃으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둘씩 짝을 지어 각 동네로 파송하시며 명령하셨습니다. “동네에 들어가라. 각 곳에 흩어져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라.” 

제자들은 동네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의 가슴은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동네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하였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누가복음 10:17) 

여러분, 전도의 기쁨만큼 큰 기쁨이 없습니다. 물론 전도하기 전에는 두렵습니다. ‘과연 내가 전하는 이 말씀을 상대방이 받을까? 내가 전도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저런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해 본 사람들마다 똑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가 주는 기쁨입니다. 전도가 이렇게 좋은지, 이렇게 기쁜지, 내 가슴이 이렇게 벅찰지 그동안 몰랐다는 것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에 초청하고, 교회에 초청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칠십 명 제자들의 기쁨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충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20) 

예수님은 한 영혼이 구원 받는 것, 한 영혼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 구원의 기쁨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제자들인 너희도 기뻐할 일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누가복음 10:21) 

그런데 여기, ‘그 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기뻐하실 수 없었다는 뜻일까요? 아마 그전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던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까요? 

하나님은 낮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매일 읽고, 율법의 내용을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이 곧 지혜이니, 율법을 연구하는 자기 스스로를 지혜자라고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당대 지도자였던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을 때, 그들은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마음의 문도 닫았습니다.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율법을 잘 알고 있던 당대의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버려진 사람들,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꾸중 받은 사람들, 보통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병든 자들, 여자들,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을 환호하면서 기쁨으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지켜보시면서 생각하셨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셨구나.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구나.’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누가복음 10:21) 

슬기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이것을 받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버려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잊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조롱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누가복음 7장은 이야기합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누가복음 7:34)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 곁에 세리들과 죄인들, 버려진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과 병자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참된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새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이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낮아지셨을 때, 죄인 되셨을 때,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기뻐하셨습니다. 그럼, 오늘 예수님이 기뻐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와 같이 바닥을 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다는 말은, ‘만족하다’는 뜻입니다. ‘좋아하다’는 뜻입니다. 자부심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의도한다고 억지로 기뻐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기대했던 일들이 성취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될까?’ 생각하셨는데, 어린 아이들이 말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기대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열려졌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구나. 새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생기고 있구나.’ 그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에게 자존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존감을 얻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 영혼의 깊은 속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쁨이란, 본질적으로 나 자신을 개방하는 태도이고 나 자신을 내어주는 몸짓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쁨 속에, 하나님의 즐거움 속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분의 은혜의 바다, 기쁨의 바다 속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기쁨에 충만할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은 얼마나 찰나적입니까? 내 기쁨은 얼마나 조건적입니까? 내 기쁨은 얼마나 많은 제약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령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받으려 한다면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내 인생 전체를 맡기고, 내 몸을 주님께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바다 속을 헤엄쳐야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기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시작했는데 기쁨이 점점 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위기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비슷합니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그것이 한국 교회의 위기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영적인 기쁨에 충만하지 않고 세상의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폼 잡고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 세상에서 이만큼 괜찮은 사람인데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지식을 쌓았는데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요.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요.”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얘야, 네가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느냐? 네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냐? 네 인생을 네가 책임질 수 있느냐? 네 인생이 영원한 것이냐? 언젠가는 사라질 네 인생을 내 앞에서까지 폼 잡고 자랑하려고 하느냐?” 하나님은 이어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나와라. 네 모습 그대로 나와라. 부족한 모습 그대로, 연약한 모습 그대로, 실존에 고민하는 모습 그대로 내게 나와라. 네가 지고 있는 무거운 것들을 모두 내게 맡기면, 내가 대신 지고 네게 생명의 충만한 기쁨을 주겠다.”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예배는 기쁨의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쁜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내 기쁨이 충만하게 만나는 자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 2장 46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46) 

기쁨이 있는 공동체, 순전한 마음이 있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그 기쁨, 내 기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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