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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그분께 모든 짐을 (고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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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그분께 모든 짐을 (고후 4:7)

네 짐을 맡기라!

우리 인생과 신앙의 문제는 짐이 아닙니다. 단지 그 짐을 나 혼자 지려는 것이 문제인 거죠.
오늘은 함께 찬양하며 시작해 볼까요?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이 찬송가는 엘리사 호프먼 목사가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아주 큰 시련을 당한 성도가 호프먼 목사를 찾아와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심에 싸인 저는 무엇을 해야죠?”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호프먼 목사는 한참 동안 그 성도의 하소연을 다 들어준 다음 간절한 마음으로 위로의 주님이 역사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그 성도는 밝은 얼굴을 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겨야 하겠어요.” 
성도가 나간 후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호프먼 목사는 펜을 들어 찬송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37장이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쓰러지는 것은 짐 때문이 아니라 그 짐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똑같은 사람인데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고가 비껴가는 것도 아니고, 병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자녀가 잘 알아서 크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사업이 갑자기 잘되고 남편과 아내가 갑자기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며 무거운 짐을 질 때 그것을 맡길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을 잘 보호하고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질그릇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지키시는 이유는 “거룩한 주의 보혈과 소중한 주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지혜가 좀 필요한데요.
우리에게는 져야 할 짐과 맡겨야 할 짐을 구별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은혜를 유지하는 짐이 우리를 붙잡아 줄 때, 무거운 짐을 맡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옳은 짐과 그렇지 않은 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의심이나 죄의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지게 하시는 짐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은 그 짐을 옮길 의도가 없으십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가 그 짐을 다시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면 그 책임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짐을 다시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주님의 역사를 드러내시면서 우리의 책임감을 제거해 주십니다.

많은 사역자가 높은 의욕과 건전한 열정을 가지고 주를 위해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포기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지워진 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피곤함에 빠집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멋지게 시작하더니 저 꼴이 뭐람!”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은 너무나 많은 짐을 혼자 다 지고 왔습니다. 이제 뜻을 다해 하나님의 어깨에 그 짐을 지우십시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 우리가 기꺼이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친밀감”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 관계를 소홀히 하면, 어느 순간 내 속에 계신 분이 이제는 우리 인생의 보배가 아닐 때, 우리는 맡겨야 할 것을 맡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우리에게 짐이 있다면 무거운 짐을 맡기기 위해 져야 하는 짐이다!”
신앙과 믿음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지만, 그 은혜가 나의 은혜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관계 정립이 필요한 것이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들어가면, 짙은 안개 속에서 불안을 느끼던 우리에게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눈으로 보이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죠.
생각해 보세요. 아는 길과 모르고 가는 길이 얼마나 다른지 말입니다. 

몇 년 전 미국 버지니아 만나 교회를 방문하고 설교하던 중 낮에 시간이 있어 공원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들어갈 때 지도를 가지고 걷기 시작했는데 호수를 하나 건너고 분명히 길을 만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공원을 지키는 경찰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정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두려움은 길을 모르기 때문이죠. 알면 바로 거긴데 말입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갈 때도 처음 가는 산이 참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려올 때면 가볍습니다. 걸어온 길을 알기 때문에 갈 수 있죠. 
“불확실성”만큼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늘 살아가던 방식이 그런 것 아니었나요? 계산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혹은 예측 가능한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만큼 무거운 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은 다르죠. 
“불확실 속에서 확신을 누리는 것”
확실성이 상식적인 삶의 지표라면, 불확실성은 은혜로운 영적 삶이 지표입니다. 
참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면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함의 무거운 짐이, 하나님에게로 넘겨지는 순간입니다. 
불확실성의 무거운 짐이 이 순간에 벅찬 기대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음 단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주께 자신을 내려놓고 주께서 맡기신 가장 가까운 의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 그분은 언제나 깜짝 놀랄 일들로 우리의 삶을 채우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지 “나에 관한 너의 신념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이 어떻게 오실지 알 수 없는 것이 영광스러운 불확실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사람들이 마땅히 져야 할 짐을 기쁨으로 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또한, 사역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는 순간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숫자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얻은 성과에 대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위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우리가 충분히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얻은 성과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과가 우리에게 때로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평안 가운데 사역을 할 수 있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거대한 성과를 가져와도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근본적인 관계의 문제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예배합니다. 사역자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들의 사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에 묻혀 허덕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위해 했던 일이 무거운 짐이 되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탈진하고, 자유를 상실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무거운 짐에 눌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전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큰 부담은 오직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자유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면 네 영혼이 안식 얻으리라.”

이것이 짐을 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짐을 주님께 맡기고 동행하는 삶의 원칙입니다.

어떻게 맡길까요?

중국 내지에서 평생을 살았던 전설적인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손자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3세가 소년이었을 때입니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부모가 중국의 변방에서 사역하는 동안 말레이시아에 있는 기숙학교에 있었습니다. 그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어린 제임스와 그의 형제들을 비롯해 수백 명의 학생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선교사 부부는 자녀와 연락하지 못한 채 지내야 했고 마침내 그 가족이 아무런 사고 없이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테일러 여사는 아들에게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메시지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돌보고 있으니, 나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겠다.” 
그녀는 이 확신 때문에 그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중의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에 부닥칠 사람이 얼마나 되고, 그런 상황에 부닥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삶을 굳건히 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사단이 우리를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그 공격과 계략을 이길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 연약한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이죠.

[주님은 최고봉]에 나오는 글을 조금 더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엄청난 위기를 지났는데 어찌 세상적인 것에 빠지겠는가.” 유혹이 어디에서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마십시오. 위험은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 있습니다. 
커다란 영적인 사건을 치른 후에는 ‘방치된 사소한 유혹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눈에 크게 띄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경계하지 않는다면 그 작은 것들이 당신을 넘어뜨릴 것입니다. 당신은 크고 강한 시련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해 왔습니다. 이제 그 밑의 암류에 신경 쓰기 바랍니다. 두려움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샅샅이 살피라는 의미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계속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경계하지 않는 장점들은 두 배로 약한 약점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방치된 사소한 유혹들’이 경계하지 않은 장점들을 통해 침입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장점 때문에 무너졌지 그들의 약점 때문에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방법만이 유일한 안전을 보장합니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방식의 차이입니다. 

벌써 오래전이죠. 박찬호 선수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할 때 경기 중 싸움을 해서 징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단 옆차기로 상대방 선수를 찼습니다. 그 당시 기자들이 그의 행동에 대하여 이유를 물었을 때,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약하게 보이면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함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도 우리 안에 보배가 들어 있음을 알고, 그 보배 때문에 심히 큰 능력이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각성]이라는 책에 보면 찰스 스윈돌의 젊은 시절 멘토에게 한 질문이 있습니다. 
“짐, 어떻게 사역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보살피는 비결을 좀 말씀해 주세요.”

나는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며 “항상 선두를 달리세요.”라든가 “어떤 일이 있어도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또는 “진리의 본을 보이고 강풍이 몰아닥칠 때 맞서서 저항하세요.” 같은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기대한 대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짐은 그만의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척, 사람들이 당신의 삶 속에서 연약한 부분들을 보게 하세요. 그러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다였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해준 모든 말이었다. 그날 그들과 헤어지면서 나는 왠지 예수님께 영생 얻는 법을 물어봤다가 기가 꺾여 돌아간 부자 청년이 된 기분이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던 것처럼, 짐의 대답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대답은 나의 죄를 깨우쳐 주었다. 나의 가슴에서 ‘S'자를 떼어 내고 망토의 끈을 잘라내게 했다. 나는 나의 힘으로 사역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짐은 나에게 약한 모습으로 섬기라고 도전했다. 그가 나에게 그 말을 해준 지가 50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것은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오?’ 분명히 아무도 감당할 자가 없다! 이 질문을 함으로써 바울은 그의 연약한 부분을 드러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을 끌어내려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저도 목회를 하면서 많은 짐을 졌던 사람입니다. 내 속에 있는 보배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릇을 잘 보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 열심히 달렸습니다. 물론 열심히 살고 사역하고 헌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보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인생이 늦어지고 더디 가는 것 같아도, 그것을 짐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같이 묵상해 볼까요?
왜 사도 바울이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고린도는 타락했던 도시였던 것만큼이나 복음이 들어간 후에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이유는 그들에게 나타난 은사로 말미암아 서로 자랑하고, 헌신하고, 믿음을 자랑했지만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복음의 진리를 잃어버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적들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바,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아무리 강력한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고, 행해도 그것은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 속에 보배 같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큰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랑할 것이 없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약함도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많으신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그릇을 돋보이려고 할 때, 우리는 도우심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이뤄놓은 능력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연과 잘 어우러진 ‘낙수장’이라는 건물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축 설계한 사람이죠.
2000년대 미국 건축가 협회에서 20세기 10대 건축물을 선정했는데 그중에서 4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느 날 삼촌과 함께 눈 덮인 벌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프랭크는 동물들을 보려고 옆길로 빠져 헛간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다음에는 연못 쪽으로 달려가 한참 머물렀고 저 멀리 요새가 보이자 다시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그가 이것저것 둘러본 다음 삼촌이 있는 벌판으로 돌아오자 삼촌이 말했습니다. 

“프랭크 너에게 가르쳐줄 게 있다. 벌판에 난 네 발자국을 돌아보렴. 내 발자국은 여기까지 곧게 뻗어 있다. 나는 길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여기까지 너보다 빨리 왔지. 그런데 네 발자국은 어떠니? 갈지자로 사방에 흩어진 게 난리도 아니구나. 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프랭크 로이드는 그날의 교훈이 이제껏 배운 것 중 최고의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날의 교훈을 삼촌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든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고도 똑같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짐을 맡긴다는 것은 우리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의 연약한 질그릇으로는 짐을 감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짐을 믿음의 눈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의 행동으로 맡겨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우리가 일궈 놓은 성취감에서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점점 짐은 무거워질 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높은 기둥에 올라갈 때는 조심해라. 높이 올라갈수록 네 엉덩이를 더 많이 보이게 될 테니까”

높이 올라갈수록 얼마나 부담스런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강연회에서 만난 CEO의 말입니다. 
연봉이 높을수록 수명이 짧아진다는 것을 아시나요? 제가 건강검진을 받을 때 의사가 하는 말이 “전형적인 CEO들이 가진 병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십니까?

[행복의 힘]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마대를 두 개씩 옮기는 세 남자 이야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떤 건지 잘 보여준다. 지나가는 사람이 첫 번째 남자에게 마대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물었다.
“제가 등에 진 마대에는 제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제 앞에 있는 마대에는 온갖 나쁜 일들이 가득 들어 있고요.”

첫 번째 남자는 자기 앞에 있는 나쁜 것에만 신경 쓰느라 뒤에 있는 좋은 것은 보지도 못했다. 행인이 두 번째 남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이번에는 정반대의 답이 돌아왔다. 
“제가 등에 진 마대에는 제게 일어난 나쁜 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마대에는 좋은 일이 가득 들어 있지요.”

그는 최소한 좋은 것을 보면서 나쁜 것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득 찬 두 마대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인생이 너무나 버거웠다. 
마지막으로 행인은 세 번째 남자에게 같을 질문을 했다. 
“제 어깨에 멘 마대에는 그동안 제가 이룬 성과와 승리가 들어 있습니다. 등에 진 마대는 비어 있고요.”
“왜 비어 있죠?”
“제가 저지른 실수와 실패, 죄책감, 수치심을 모두 그 마대에 넣었어요. 그리고 자루 밑에 구멍을 뚫었지요. 저는 등에 진 마대보다 어깨에 멘 마대에 더 마음을 쏟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실은 등에 진 마대가 바람에 나부끼는 돛과 같아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답니다.”

잘못한 일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에 지금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죄책감이 느껴질 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을 후회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어제를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이신 그분이 함께하시는 오늘을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인지 아시나요?
저를 깨뜨리는 것은 수백 명의 칭찬이 아니라 늘 한 사람의 비난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많은 격려와 찬사에도, 그 작은 일에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태생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지 못한 깨지기 쉬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속에 있는 그 보배가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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