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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은 마치(5) (마 13: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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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5) (마 13:47-5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 안에서 심심치 않게 천국을 가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놓고 신앙생활의 유불리有不利를 논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받은 주관적인 은혜로 결론을 지어야 합니다. 

여기 기독교 원론주의자인 "빌리 선데이" 목사는 천국을 보고 돌아와서 [즐거운 천사]라는 책을 써서 그가 본 천국을 공개했습니다. 

천당에서 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 상대가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였고 고대 희랍의 여류시인 사포도 가까이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금의 각국 원수들은 독재자건 아니건 천국에서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원리적 강경노선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와보고 실망해 등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곧 신성 천국에 대한 인식의 타락을 지탄하기 위해 그렇게 천국을 속세화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불가불 갈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믿고 의롭고 선하게 산 사람들이 천국에 가야 하는데 이미 지옥이 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옥에 갈 사람이 밀려서 천국에 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앞에서 말한 볼테르였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기 잡는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그물이 가득할 때 그물을 물가로 끌어내어 그물 속에 있는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에 대하여 천당이나 영광스러운 내세를 의미하기 이전에 이 땅에 있는 가견적인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현세에 있는 가견적 교회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통계에 의하면 자신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87%나 된다고 하니 이래저래 천국은 만원입니다. 

Ⅰ. 역사 속에 경험적 교회운동을 말합니다. 

본문 13장 47절에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바다 전체를 대상으로 던지는 그물은 교회운동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파에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물로 말하면 바다 밑에까지 싹쓸어 담는 저인망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전도 대상은 무차별적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도 갔습니다(요 4:5). 세리의 집에도 갔습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에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고 했습니다.
죄 있는 여자에게도 갔습니다(눅 7:36-50).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 가에 무능한 자에게도 갔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찾아갔습니다(요 9:5-8). 그는 이방인의 집에도 갔습니다(마 15:21-28). 그는 혼인집에도 갔습니다(요 2:1-11).

바다를 향해 저인망을 던지는 어부처럼 지역을 초월하고 남녀노유를 초월하고 부와 지위를 초월하고 지적수준을 초월하여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당연히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불평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잃은 양(눅 15:3-7)과 잃은 드라크마(눅 15:8-10)와 탕자의 비유(눅 15:11-32)로 예수 자신의 정당성을 천명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복음전파의 대상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Ⅱ. 가견적인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말합니다. 

본문 13장 47절에 『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가라지 비유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그물 속에는 좋은 고기와 함께 좋지 못한 고기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물밖에 여러 고기가 있듯이 이 지상교회는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도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의 본문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펄죤 목사를 찾아와서 순결한 교회를 지시하여 주면 거기에 속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스펄죤은 대답하기를 자기는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도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곧 그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거룩한 자들과 참된 기독신자들이 있는 반면에 혹시 그 가운데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도 지금 찾아 온 형제의 요구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짓기를 그 찾아 온 형제가 만일 완전히 순결한 교회를 찾아 만난다 할지라도 거기에 그 형제가 참가하면 그 교회도 더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그 찾아 온 형제도 사람이기 때문에 죄가 있고 그런 죄인으로서 만일 순결한 교회에 참가한다면 그 교회도 어지러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물론 풍자적諷刺的 어법語法입니다. 

스펄죤의 이 말은 교회의 지도 원리와 신앙표준 문제에 있어서 절대로 참된 것을 파수把守해야 된다는 역사적 진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교회에 참석하는 개인들 중에서는 절대적 순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일뿐입니다.

스펄죤은 교회가 그 지도 원리와 신앙표준을 보수保守하려다가 불행하게도 강한 반대운동 때문에 갈라지는 일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성역의 초기에 있어서는 교회가 바른 표준을 지키기 위하여 모체 교회에서 분리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년에 생각을 고치고 도리어 그런 좋은 목적을 위한 파수운동으로 인하여 모체 교회에서 갈라지는 일을 더욱 좋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순결한 신앙표준을 위하여 처음부터 모체교회에서 무법無法하게 분열分裂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일을 위하여 합법적으로 그 모체 교회에서 증거하다가 불법한 추방을 당하는 것은 영광입니다(요 9:30-34; 16:2). 스펄죤의 이 말은 이 지상교회의 불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성경적 명분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리와 비진리의 분리는 예수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정관에도 교단이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일 때는 당회가 심의하고 공동의회 결의에 따라 교단을 탈퇴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교회정관 제6장 부칙 제21조).

어느 날 저는 초교파적으로 목사님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에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건물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목사가 "천국은 믿는다고 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천국은 믿음으로 가지 않고 무엇으로 가는가 또 이상한 목사가 한 사람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의 다음 말은 "천국은 가봐야 누가 가는지 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모두가 잘 믿는다고 하고 모든 교파가 자기 교파가 제일이라고 하니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물에 가득하게 고기를 잡아 올릴 때 쓸 만한 고기가 한 마리밖에 없더라도 계속해서 실망하지 말고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잃은 양 한 마리의 소중함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에 『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빈 그물일지라도 계속해서 던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했습니다.

그물에 고기가 들든지 들지 않든지 수지타산이 맞든 지 맞지 않든지 계속해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물 속에는 원치 않은 고기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생명체가 아닌 쓰레기도 담겨져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 교회운동에 게으르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Ⅲ. 교회운동의 궁극적 양면성(심판, 승리)을 말합니다.

본문 13장 48절에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때는 최후심판 때입니다. 성도들은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가라지 비유에서는 추수 때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물을 끌어 수면에 나타난 때라고 했습니다. 분리할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선택과 유기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합니다. 
택자와 불택자가 서로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서로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과 영벌로 서로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15장 49-50절에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악인들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한 교훈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옥 불을 육체적으로 체험해야만 지옥의 실존을 믿을 수 있다면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인식은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삶의 체험에서 얻는 인식은 아닙니다. 삶이 전제가 되지 않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존 번연이 지옥의 불신자와의 대화에서 번연이 묻기를 "불에 타는데 불빛은 왜 없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지옥 불은 세상 불과 다르니 그것은 뜨겁기만 하고 빛은 없으며 붙기만 하고 사위지는 않으며 영혼까지도 태우는 불이다. 이것은 세상의 불이 가지지 못하는 성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얼마 동안 말을 계속하다가 번연은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이러한 주관적인 계시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독단적인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관적 은혜가 객관적인 계시(성경)와 동일시되거나 우선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체험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러한 체험을 해야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철학도, 과학도 수시로 변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진리 밖에서는 비록 1+1=2라고 할지라도 지식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체험의 진의를 성경을 가지고 비판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해 여러 곳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천국과 지옥을 친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체험도, 역사도 아니지만 믿음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2차 세계대전 말 수용소 살이를 하던 안네 프랑크 자매는 크리스마스까지는 종전이 되고 석방될 것이라는 풍문에 들떠 있었습니다. 감방 바닥에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날수만큼 금을 그어놓고 날이 세면 하나씩 지워나갔습니다. 그가 그어놓은 금은 다 사라졌지만 희소식은 무소식이었습니다. 프랑크 자매는 그 길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카운트다운은 이렇게 사람을 옥죄고 있습니다.

한때는 우리의 여생을 하루하루 지워나가는 역산생명표라는 카렌다가 유행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TV로 노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 아내에게 우리 어머니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습니다. 올해 84세라고 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나이 한 살 더해 가면 내 나이 한 살 더해간다. 우리 어머니 떠나신 해가 더해 가면 내 떠날 해가 다가온다."고 혼자 읊었습니다.

우리의 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생의 마지막을 타인의 죽음에서 인식의 한계를 가집니다. 막연한 내세론자들은 내세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감도 갖지 않고 살다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 최선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음적 삶, 곧 교회 중심적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산생명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의 일들을 표시하며 살아갑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국부적인 심판을 계속해 가고 계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국부적인 즉결심판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최후의 심판의 본보기로 보여주는 심판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합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시다. 역산생명표 대신에 남은 생애 동안에 사람을 예수께로 데려올 역산전도표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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