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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먼저인지 아십니까? (학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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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먼저인지 아십니까? (학 1:1-11)

어렸을 때 저희 동네에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쓰곤 했는데, 저도 종종 심부름으로 그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물에서 물을 길 때에는 양동이에 가득 담아 가지고 집으로 가는데, 양동이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길에 물이 다 흘러버리고 집에 도착해 보면 한 절반밖에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일 동네 공동우물이 집에서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아마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양동이에 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희 집은 공동우물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절반이라도 물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라는 말이 있지요. 물을 담아두어야 할 독에 밑이 빠져 있거나 구멍이 뚫려 있으면 아무리 물을 많이 갖다 붓는다 하더라도 결국 물은 다 새버리고 독에는 물이 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도 밑 빠진 독과 같이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아주 뜨겁게 신앙생활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모습으로 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독에 구멍이 난 것처럼 영적인 충만했던 모습이 다 빠져나가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능력이나 영적인 감격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메마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영적인 기쁨과 영적인 힘이 우리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과 영혼이 허탈하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그릇처럼 그런 느낌으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적인 기쁨을 가득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으로,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어야 우리는 충만한 영적 부유함과 영적인 감격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자리에서 추방해 버리고,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인 허탈함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허함과 허탈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 안에 영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영적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있어서는 안 될 죄악된 것,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적인 것이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은혜 대신에 세상의 욕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는 영적인 자리가 있는데, 그 영적인 자리는 비어 있고 욕심만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영적인 공허함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그 영적인 공허함은 물질적인 풍요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공허함과 허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 주머니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찾아서 막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양동이에 구멍이 나 있다면 아무리 많은 하늘의 은혜가 공급된다 하더라도 그 은혜가 우리 안에 머물 수 없어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져갑니다. 아무리 하늘의 생명수가 끊임없이 공급된다 하더라도 구멍난 마음은 금새 영적인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영적인 기쁨과 강건함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영적인 주머니, 영적인 양동이에 혹 구멍이 나 있진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공허함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공허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6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전대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들어오는 것이 없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보아도 소득이 없습니다. 혹 먹을 것이 있어서 마음껏 먹어 보아도 배부르지 않고,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왜 그들은 그렇게 고달프고 공허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까? 

주전 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비천한 자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열왕기하 24:14)고 말할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는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땅 백성들에게 놀림거리가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낯선 이국땅에서의 생활이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70년 동안이나 이국땅에서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전 538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거대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초대 왕인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약 5만 명 가량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70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꿈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기뻐서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시편 126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노래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35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고 난 다음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온 나라 안에 태극기가 물결쳤고, 해방의 감격에 즐거운 함성 소리가 온누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35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도 그렇게 기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이나, 그것도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때 그들엑 그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옛날 바벨론에서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향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옛날 그 화려하게 지어져 있던 성전은 온데 간데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은 고향 땅에 돌아왔다는 기쁨과 함께 / 동시에 성전이 없어졌다는 슬픔을 안고 모두 예루살렘에 천막을 치고 거기에 기거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자기 고향, 자기들의 집으로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일치해서 성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를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요,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은 고레스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주춧돌을 갖다 놓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여건을 주셔서 성전을 짓도록 하셔놓고는 그 일을 평탄하게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천막을 치고 열심히 성전을 짓고 있는데, 그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성전을 짓는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가 아주 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고레스 왕이 전쟁에서 전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천만만의 지원병을 잃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고레스 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아하수에로 왕은 사마리아와 주변 나라들이 올린 진정서를 보고는 성전 짓는 일을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건축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선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춧돌만 놓은 채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들 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기들의 생활 터전을 잡는데 열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장 먼저 고향 땅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하수에로 왕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진정에 따라서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제 상황은 좋아졌습니다. 언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맘만 먹으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성전을 짓는 일을 다시 시작하자고 앞장서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이 역사적인 사명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전 520년경에 학개 선지자를 세우시고는 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라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는데,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먹고 사는 것이 급하다는 이유 때문에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서 먹고 사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경제적인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성전 건축을 중단했을 때에는 주변 나라들의 반대와 아하수에로 왕의 반대에 부딪혀서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어떻게 성전을 짓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핑계에 불과하다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서 ‘아직은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핑계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고, 흉년이 들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소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득을 얻을 수가 없으니 자연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도 먹고 살기가 힘든데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한 상태로 있는데, 너희는 너희 집을 짓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성전 건축을 외면하면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너희 먹고살 궁리만 하고 있으니까 내가 비를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짓되 추수할 것이 없게 하였고, 재앙을 내려 너희의 것을 내 손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9-11절의 말씀입니다.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여건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여건과 환경을 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아서 봉사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을 9절에서는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치 바람에 겨가 날아 가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득을 날려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소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머니는 늘 비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습니까?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소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급한 일에 몰두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변명하기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급한 것보다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중요한 것이 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수많은 일들 가운데 급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꼭 해야 할 중요한 일과 급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급한 일을 놓고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급한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중요한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중요한 것보다 급한 일을 먼저 합니다.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고 말합니다. 급한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급한 것부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언제나 먼저’이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주일에 장사하지 않으면 우선 당장 수입이 적어지기 때문에 가게를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 먹고 사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주 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하면 하나님께서 급한 것은 당연히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데 있어서 매일매순간 급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선 당장 먹지 못하면 배고파 죽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으로 인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같은 급한 문제는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게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주일에 장사하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보다 시험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모레가 시험인데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그래서 급한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주일예배를 빼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급한 것을 추구하면서 9절에 보면 ‘많은 것을 바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랬지만,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소득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뒤로 하고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 짓던 것을 멈추고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 우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될 줄 알았는데, 학개 2:19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의 전을 짓는 중요한 일을 시작한 바로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과 급한 것을 혼동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흔히 급한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급한 것은 급한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급하지 않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입니다. 급하지 않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이기에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려 할 때 우리의 환경이나 여건에서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급하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분들 가운데는 여건이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여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교회 봉사도 그렇고 신앙으로 사는 모습에서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그들의 삶에 넉넉함과 풍요로움이 적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선 당장 내 삶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그 일을 뒤로 미루기만 한다면, 우리는 평생 이웃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우리의 생을 끝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이웃을 위해 돕는 일을 작게나마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베풀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욱 풍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을 재촉하는 시급한 문제가 우리에게 일어났더라도,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삶에 급한 것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들고 생활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가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서 생각하며 사십시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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