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을 향한 여정 (시 19:7-14)

첨부 1


말씀을 향한 여정 (시 19:7-14)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글 가운데서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 중 하나는 프랑스 작가인 <알퐁스 도테>의 <별>입니다. 프로방스 지방을 무대로 하여 한 목동 이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를 사랑하는 마음을 구구절절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퐁스 도테 자신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중학교 사환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쩌면 이 작품 중의 목동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동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에 잠이 든 스테파네트를 보면서 상상도 못할 행복을 맛봅니다. 하늘의 별 하나가 내려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별>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별>처럼 시인들의 시상을 자극하는 것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별을 노래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이란 시에서 별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썼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유명한 <서시, 序詩>에서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별이 담겨 있는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별빛처럼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별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높은 산, 깊은 계곡, 그 속을 흐르는 맑은 물, 계곡 좌우에 늘어선 나무들과 꽃들, 그리고 열매들, 그 사이를 오가는 다람쥐들과 온갖 풀벌레들, 그런가 하면 만년설로 덮인 웅장한 산들, 푸른 하늘을 향해 치솟는 절벽들과 그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들, 하늘을 가를듯한 천둥 번개와 쏟아지는 빗줄기, 광대한 우주 공간 등이 모두 시의 소재가 되고, 우리로 하여금 경외감을 가지게 만듭니다. 세상의 욕심에 물들어 살던 사람도 대자연을 대하면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자연에 비해 도시는 너무도 더럽고 추한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소떼와 양떼가 너무 많아 한 곳에 살기 힘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조금 떨어져 살 것을 제안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가운데 멸망해가는 도시들의 상징입니다. 그곳은 온갖 탐욕과 음란, 악행들이 증폭되어 결국 유황불로 멸망하였습니다. 후에 롯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자비로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 떠난 후에 그는 빈들에 남았습니다. 빈들에서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았고, 하늘을 보았으며, 별을 보고, 달을 보고, 해를 보았고, 궁극적으로는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3장 14-15절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자연은 축복의 땅이요, 도시는 멸망과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맑은 영성>은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양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양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시편 19편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궁창을 통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2절에서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해가 져서 밤이 오고, 또 다시 해가 떠서 새 날이 되는데,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3-4절을 보세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연에는 사람의 말과 글은 없지만, 귀가 열린 사람은 자연을 통해 소리 없는 메시지, 글자 없는 메시지를 듣고 읽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음성을 듣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자연 속에 당신의 솜씨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런 영적 정서를 충분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높은 산에라도 오르면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이 찬송도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 이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광활한 사막으로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들은 사막의 은자들로서 세상의 죄악을 떠나 고요하고 맑게 살길 소원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는 사막을 밝히며 떠오르고, 하루 종일 대지를 열로 달구다가 저녁이면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의 궤적을 바라보면서, 인생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궤적을 따르는 존재임을 배웠습니다. 

또 이처럼 유한한 인생에 비하여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영원하고 광대하신지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욕망을 이기고 거룩해지길 원했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는 혼자 지내거나, 때로는 몇 사람씩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이런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수도원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해온 여행을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가는 여행>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대자연의 품에 안겨 죄악을 이기고, 맑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가는 여행>에 동참하길 원합니다. 도시로 상징되는 욕망의 삶, 탐욕의 삶, 추하고 악한 삶을 벗어버리고, 맑은 영혼으로 사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귀를 열어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음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가는 여행>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그 여행은 <자연을 떠나 말씀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노래하기는 하지만, 자연주의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지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성도는 말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장 분명하고 뚜렷한 하나님의 모습,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자연계시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자연계시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웅장한 산을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몇 날 며칠을 히말라야 산군을 헤매고 다녀도, 백두산 천지에 천막을 치고 몇 달을 살아도, 뱃전에 서서 태평양 바다를 건너도 이런 진리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에 심어 놓으신 것보다 천만 배, 억만 배 많은 당신의 뜻을 말씀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록하여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에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압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압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님뿐임을 압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 죄를 씻으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 지금도 교회 안에 우리를 모아 천국을 향한 걸음을 걷게 하신다는 것, 늘 성령으로 우리 곁에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신다는 것....이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우리는 성경에 담아주신 진리를 우리는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주의자에서 성경주의자, 말씀주의자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연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겨가는 또 하나의 여행을 해야만 합니다. 

시편 19편은 다윗의 이러한 여행을 보여줍니다. 1-6절은 자연을 향해 나가는 다윗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자연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노래했었습니다. 그러나 7절 이하로 내려오면서 자연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말하였습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이라고 했고, 9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도>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어떤 표현을 쓰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사도들을 통해서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말씀들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담겨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야말로 그 어디에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 놀라운 말씀이 지금 우리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정말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합니다. 또 8절을 보면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고, 순결합니다. 또 9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하고 진실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자연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행을 함께 하길 원합니다. 말씀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듦으로써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감으로써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메시아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말씀을 듣고 지팡이 하나만 든 채로 막강 제국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모세, 말씀을 듣고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 선지자들과 맞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밝혀 선포한 엘리야, 말씀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감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 말씀을 듣고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갔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말씀의 세계에서 힘을 얻은 이들을 통하여 만들어져 왔습니다. 마틴 루터에게는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한 절 말씀이 힘이 되었고, 링컨 대통령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란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말로 인생을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읽으라고 권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더 분명한 모습을 뵙고자 하는 일념으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기 때문에 사모해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아 허물을 깨달아야 하며, 말씀을 지킴으로 상을 얻어야 합니다. 10-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 잃은 자에게 길을 보여주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가르쳐 주고, 날마다 겸손하게 살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을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의 연구교수인 김 헌 박사는 고대 아테네의 연설들을 다루면서 <피스티스>에 관해 매우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입증. 증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입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살아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위대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당신의 성경책을 보여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의 성경책을 보여주었습니다. 펼쳐 보니 무디의 성경책은 구구절절이 색연필로 그어져 있고, 여백에는 묵상의 말씀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 <T.P.>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디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실험해 보았더니 입증되었다(Tried and Proved.)는 뜻입니다.> 무디는 말씀대로 실천했고, 그 말씀이 진리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이렇게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말씀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는 인생을 나누어도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책상머리에서 성경책을 펼치고 앉아 그 말씀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면 거래를 해도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책에 고귀한 묵상을 써 넣고 기뻐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대화하길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도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먹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꿀보다 더 단 그 말씀을 먹으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영양분이 되고 생명이 되어, 다시 우리의 말과 생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이 전과 달리 거룩해질 것입니다. 말씀을 먹은 사람의 생각은 전과 달리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경건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과 생각이 거룩해져서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먹었습니다. 그랬기에 14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말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말씀을 먹은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온전한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썩고 부패한 욕망의 도시에서 맑고 정갈한 창조의 자연으로, 그리고 그 자연에 머무르지 말고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세계인 말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과 묵상,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