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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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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마 5:3)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1. 프랑스 연예인으로 노숙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급식과 식사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사랑의 레스토랑’(이 운동은 콜뤼슈가 사망하고 난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랑의 레스토랑’ 콘서트에는 매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가수들이 총 출연한다.)이라는 운동을 전개했던 콜뤼슈(Coluche)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두 무리로 나누겠노라. 부자들은 양식을 가질 것이요. 가난한 자들은 식욕을 가질 것이다.’> 

생태 환경 컬럼을 쓰는 박병상씨의 글입니다. <어느 한 경제학자는 일인당 소득이 1만 달러 될 때까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천박한 수준의 행복은 비례하지만 1만 달러가 넘으면 소득만 증가할 뿐 행복은 정체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4만 달러가 넘으면 행복은 오히려 퇴보한다는데, 필요가 아니라 질투나 시기가 소비를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과시를 위한 소비는 남이 더 값나가는 물건을 소유했을 때 질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나 에어컨을 소유한다는 건 이제 자랑이 아닙니다. 가스레인지나 컬러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일부러 들어놓지 않았다면 모를까. 소득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일인당 평균 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일본에서 부자들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가난한 이가 부자보다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 부자는 가난뱅이를 부러워하지 않겠지만 가난한 이는 부자를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또는 부자들의 소비행각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원한 관계도 없지만 저지르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백주대낮에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의 불행이 그리 만들었을 텐데, 가난한 이의 불행은 기회의 불균형이나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글로벌 리포트>(Global Report)에 보면, 프랑스인 절반이 “나는 가난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반에 가까운 프랑스인은 자신이 가난하거나 가난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경제전문지 레제코(의 의뢰로 여론조사 기관인 CSA가 벌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11%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37%는 ‘가난해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응답해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응답자가 전체의 4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닙니다. 물질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도 복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물질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고 하셨습니다.(창1:27-30) 또한 믿음의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렇게 언약하셨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이 그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여 목축지에 농사를 지었는데도 한 해에 백배의 결실하는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창대하고 왕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를 결코 소흘히 생각하거나 경시하시지 않습니다. 잠언22:2에 보면,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다시 말해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시 112:9) 가난한 사람들을 후하게 구제하는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어 그의 의를 영원히 기억되도록 할 것이며 그는 유력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다시 말해 병들고 소외되고 갇히고 억눌리며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0:42) 그리고 “(마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 102:17)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동방의 의인이며 거부였던 욥은 하나님을 “빈궁한 자의 아버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분”(욥 29:16)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시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난에 아무런 미덕이나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빈궁이 영성(靈性)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이 1993년에 ‘쇠고기 문화’에 던지는 경고장으로 쓴 <육식의 종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세계에 소는 93년 추정치로 약 12억 8천만마리인데 이 소떼가 전세계 토지의 24%를 점유하고 있고, 전세계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을,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를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10억명의 인류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소위 <가진 자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가들이 먹어치우기 위해 키우는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사육하기 위해 전세계 곡물의 3분의 1, 즉 6억톤을 사료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매년 가축에게 먹이는 6억톤의 곡식을 부의 재분배를 통해 인간이 직접 먹는다면 10억명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십억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진국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은 쇠고기 탐식으로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아사자들보다 더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깃덩이 탐닉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가진 자들>은 배가 터지거나 배부른 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들 <가진 자들>에게 자신들의 토지를 소떼 사육장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개발도상국가 백성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소떼들은 배가 터지는 데, 인간들은 배를 곯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7억의 지구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지만 <가진자들>의 독점으로 풍요 속에 빈곤층이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가진 자들>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없는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소위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가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지만, 굶주리고 있는 후진국가들과 가진 것을 함께 하지 못하고 독점하는 정신적, 영적 빈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외적,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가 반드시 행복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2:8-11에 ‘서머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만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세상의 물질적인 면에서 지극히 빈곤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에서 쫓겨나 생활이 무척이나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두고 ‘실상은 부유한 자들’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극한 빈궁과 환란가운데서도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킨 교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악질적인 핍박과 로마 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며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계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핍박받는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환경적으로 부요한 도시에 처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계급에서 중상류층 이상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이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은 엄밀하게 따지면 <나는 부요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극빈에 허덕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도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세상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가난한 자’와 ‘부자’의 기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지혜를 말해주는 잠언15:16에서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인간의 영원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행복한 삶을 가지도록 말씀하신 것이 산상수훈(마5-7장)입니다. 

그 중 8가지 행복을 가르치신 것이 바로 ‘팔복’입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의 행복은 어떤 행함이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being)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행함이나 소유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헬라어, 프토코스)에 대한 원래 의미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상태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혹시 산다 해도 나는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B.C.1070년경, 비옥한 땅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엘가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인한 많은 번민과 소외감으로 날로 그 고통이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알고 있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닌나보다 더욱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브닌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여자로 보고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한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라며 한나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위로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마침내 성전에 나가 괴로운 마음으로 흐느껴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성전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라며 책망했습니다. 이에 한나가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엘리가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 라고 대답합니다. 

한나는 그 길로 금식을 끝내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주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삼상1:1-20) 그리고 한나는 성전에 나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렇게 찬가의 기도를 올립니다.

(삼상2:1-10)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한나처럼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다윗 왕도 그 자신 남부러울 것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시16:2)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는 고백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거나, 무엇을 소유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 행복을 인간에게 열어주신 분은 십자가 예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예수 믿고 예수 안에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되어 여러분의 인생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다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해지면 하나님 나라를 주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미 천국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힘, 또는 어떤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얻어지는 행복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이라야만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환경을 행복하게 조성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마음의 행복을 통해서 주변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 살든지 변함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행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서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행복은 마음에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쉽게 얻을 수도 있고 또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 행복은 믿음을 잃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있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등 팔복에서 나타나는 품성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엇보다 “진실하게 순복”하는 품성을 지녔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기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말씀에 반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천국이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할 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행복은 먼 미래에, 죽어서 천당에나 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속에 영접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천국이 이루어지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아동 문학가로 노베찌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뜰에 있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의 작업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그는 갑자기 “둥지의 위치가 너무 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습격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위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에게 충고할 방법도 없고 거의 완성한 둥지를 헐어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얼마 후 이 둥지에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해다가 먹여 주는 즐겁고 행복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예감했던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새끼들은 고양이에게 희생되었고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 어미 새는 새끼를 찾을 길이 없어 오랫동안 그 둥지에서 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체험이 노베찌 시인으로 하여금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 라는 시를 낳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둥지도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노아는 대홍수의 환난과 고통속에서도 높은 곳에 신앙의 고향을 두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 한 복판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높은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저 높은 곳”에 믿음과 소망을 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의 둥지를 하늘나라에 두지않고 세상과 세상 물질에 두었기 때문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은 교회, 노아의 방주같은 교회가 되지 못하고 토하여 내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둥지, 터전을 저 높은 곳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때로는 궁핍 가운데 처했을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같은 삶의 비결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4:12입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범사에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자족할 줄 알게 된 것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의 곧 없어질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은 선을 행하고 선한 일에 부요하며 나눠 주기를 좋아하고 남의 어려움을 깊이 동정하는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의 장래를 위해 좋은 터를 쌓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딤전6:17-19)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셔서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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